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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연산 돈암서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도 불구하고 오전 한 때 날씨가 화창했다.  안동 도산서원이나 영주 소수서원은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었으나 연산의 돈암서원은 처음이었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돈암서원을 포함한 한국의 서원 9곳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돈암서원은 1634년(인조 12)에 창건했는데, 조선 중기 대표적 유학자 사계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기호학파의 대표적 서원이다. 

  서원은 예학의 종장인 사계 김장생 사후에 그의 제자들과 유림들이 창건하였으며,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 예학의 산실이 되었다. 현종 원년(1660)에 사액을 받았으며, 고종 8년(1871)에 흥선대원군이 전국 650여 개에 서원철폐령을 내려 47개만 남겼을 때도 명맥을 유지하였다. 

  돈암서원은 고정산 줄기를 배산으로 하고 앞에는 들판을 가로지르는 연산천이 흐르고 있어 배산임수의 명당에 동쪽을 향해 앉았다. 남쪽으로 4km 정도 거리에 사계 김장생 선생의 묘역이 있다. 묘역 가까이 있는 탑정호와 백제 군사박물관 계백장군의 묘 또한 지나치기 아까운 곳이다.

  서원의 분위기가 영남지방의 모습과 많이 달랐다. 서원 밖의 커다란 2층누각과 서원 안의 건물들도 반듯한 모양새로 예학을 연구하고 가르친 사계학파의 학풍을 닮은 듯했다.

 

 

  한옥마을 주차장 왼쪽의 안내 표지판

 

  홍살문과 하마비

 

  서원 전면의 2층 누각 산앙루

 

  서원의 정문인 입덕문

 

  서원을 세울 때, 건립 성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돌, 주로 광산 김씨 문중 사람들이 많았다.

 

  산앙루 정면

 

  입덕문에서 바라본 서원 전경

 

  전사청으로 들어가는 중문

 

  전사청

 

  돈암서원 원정비와 양성당, 우측은 거경재

 

  좌측의 정의재, 정의재는 거경재와 함께 유생들의 기숙사이다.

 

  양성당과 원정비, 원정비에는 돈암서원을 세운 사연과 김장생 부자의 업적을 적었다.

 

  정회당, 김장생의 부친 김계휘가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양성당과 뒤편의 숭례사(사우) 

 

  장판각, '황강일기' '사계유고' '신독재유고' 등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내삼문

 

  내삼문과 숭례사, 숭례사는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내삼문 담장에는 지부해함,박문약례,서일화풍 등 김장생과 그의 후학들의 예학정신을 12개의 글자로 그려 넣었다.

  지부해함(地負海函) 땅이 온갖 것을 등에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주듯 포용하라.

  박문약례(博文約禮) 지식은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서일화풍(瑞日和風) 좋은 날씨, 상서로운 구름, 부드러운 바람돠 단비, 즉,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

 

  양성당 앞 전경

 

  응도당, 유생들이 공부하는 곳. 맞배 지붕 아래 작은 처마를 덧대고 괴임목으로 받치고 있는 특이한 구조의 건축물이었다.

 

  돈암서원의 들머리격인 연산 한옥마을, 무료 주차장이 있다. 

 

  사계 김장생(1548~1631)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서울 출신. 할아버지는 지례현감 김호(金鎬)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우참찬 신영(申瑛)의 딸이다. 아들이 김집(金集)이다.


  1560년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등을 배웠고,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갔다. 1578년(선조 1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고,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그 뒤 순릉참봉(順陵參奉)과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를 거쳐 활인서(活人署)·사포서(司圃署)·사옹원(司饔院) 등의 별제(別提)와 봉사(奉事)가 내렸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뒤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인의(引儀)를 거쳐 정산현감(定山縣監)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이 된 뒤, 명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에 공이 커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로 승진하였다. 1596년 한 때 연산으로 낙향했는데, 단양·양근 등지의 군수와 첨정(僉正)·익위(翊衛)의 관직이 거듭 내려졌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 호남 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해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1601년 조정에서 『주역구결(周易口訣)』의 교정에 참가하도록 불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듬해 청백리로 올려졌으나, 북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1605년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 뒤에 익산군수를 지내고, 1610년(광해군 2) 회양·철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동생이 연좌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75세의 나이에 장령으로 조정에 나갔으나, 곧이어 사업(司業)으로 옮겨 원자보도(元子輔導)의 임무를 겸하다가 병으로 다시 낙향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왕이 공주로 파천해오자 길에 나와 어가를 맞이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원자보도의 임무를 다시 맡고 상의원정(尙衣院正)으로 사업(司業)을 겸하였다. 집의(執義)를 거친 뒤 낙향하려고 사직하면서 13가지의 중요한 정사(政事)를 논하는 소를 올렸다.

  그 뒤 좌의정 윤방(尹昉), 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발의로 공조참의가 제수되어 원자의 강학을 겸하는 한편,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기도 하였다. 1625년에 동지중추부사를 임명받았으나 이듬해 다시 사직해 행 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한 뒤 이이·성혼(成渾)을 제향하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웠다.

  같은 해 용양위부사직으로 옮기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였다. 곧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하고, 그 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한 달 만에 다시 사직해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한 뒤 1630년에 가의대부로 올랐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줄곧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인조 즉위 뒤에도 향리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지만, 김장생의 영향력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李貴)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학문과 교육으로 보낸 향리 생활에서는 줄곧 곁을 떠나지 않은 아들 김집의 보필을 크게 받았다.

  김장생의 문인은 많은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최명룡(崔命龍)·김경여(金慶餘)·이후원(李厚源)·조익(趙翼)·이시직(李時稷)·윤순거(尹舜擧)·이목(李楘)·윤원거(尹元擧)·최명길(崔鳴吉)·이상형(李尙馨)·송시영(宋時榮)·송국택(宋國澤)·이덕수(李德洙)·이경직(李景稷)·임의백(任義伯)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를 즐비하게 배출하였다. 아들 김집도 문하이지만, 문인들 사이에는 김장생을 ‘노선생’, 아들을 ‘선생’으로 불렀다고 한다.

  학문적으로 송익필·이이·성혼 등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 하지만 예학(禮學) 분야는 송익필의 영향이 컸으며, 예학을 깊이 연구해 아들 김집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인조 즉위 뒤 서얼 출신이던 송익필이 아버지 송사련(宋祀連)의 일로 환천(還賤: 천인으로 되돌아감)되자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같은 문하의 서성(徐渻)·정엽(鄭曄) 등과 신변사원소(伸辨師寃疏)를 올렸다.

  또한, 이이와 성혼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1만 8000여 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하였다. 스승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小學集註)』를 1601년에 완성시켜 발문을 붙였는데, 『소학(小學)』에 대한 관심은 예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저서로는 1583년 첫 저술인 『상례비요(喪禮備要)』 4권을 비롯, 『가례집람(家禮輯覽)』·『전례문답(典禮問答)』·『의례문해(疑禮問解)』 등 예에 관한 것이 있고,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경서변의(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沙溪先生全書)』가 전한다.

1688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을 비롯해 안성의 도기서원(道基書院) 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출처 :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1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