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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공주 우금티 동학 혁명군 전적지

  우금티 전적지 두 번째 방문이다. 날씨는 추웠지만 하늘이 맑아서 걷기에 좋았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알림터 위 안내문부터 읽으며 우금티로 향했다. 계단 위 고갯마루 옆에 있는 위령탑은 옮겨 새로 건립해야 한다. 이 고개 너머에서 전투가 벌어진 곳을 왜 고개 넘어 동학군이 넘으려던 우금티 안 쪽 관군과 일본군이 주둔하던 우금티 안쪽 공주 쪽에 세웠는지 이해되지 않고, 동학을 빌미로 권력에 아부하며 자신만의 영화를 추구하던 부나비 같은 인물들이 동학혁명군의 원령들을 위로한다며 위령비를 세웠다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이 고개를 넘어 충청감영을 접수하고 한양으로 진격하려던 동학군은 고개 너머에서 일본군과 관군에게 전멸되고 말았다. 1894년 음력 10월 23일부터 11월 15일간의 전투는 신식 화기로 무장한 조선군 3200명, 일본군 200명과 구식 조총과 농기구와 죽창으로 공격한 동학 농민군 20000명의 전투였다. 동학군은 이 전투에서 17000여 명이 전사하고 3000여 명이 살아 남아 퇴각하였으나 결국 농민군은 와해되고 말았다. 

 

  우금치 전적 안내문

 

동학 농민군 위령탑

 

위령탑 왼쪽으로 우금티 고갯길이 보인다.

 

  본디 있던 고갯길을 없애고 산줄기를 잘라 길을 내고, 콘크리트 구조물을 설치해서 흙으로 위를 덮어 터널을 만들었다. 고개를 훼손하지 않고 직접 터널을 뚫어도 됐을 것을 왜 이리 터무니없는 짓을 했을까 이해되지 않는다. 역사 유적지를 보존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일 텐데...

 

  터널 옆으로 올라가는 고갯길, 우스운 것이 공주시에서 올라가는 길은 있어도, 이인에서 올라오는 맞은편 고갯길은 없다. 동학 농민군들이 궤멸되면서 까지 오르려고 했던 고갯길마저 터널 때문에 사라졌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행정가들의 발상답다.

 

  터널 위 흙을 덮어 고갯길을 운동장으로 만들었다. 무슨 체육대회라도 하려는지... 당연히 고갯길답게 원상 복구해야 할 것을...

 

  동학군을 묘사한 장승이 못다 한 한을 표출하고 있었다.

 

  고개 너머 동학군이 진격하여 이인면에서 공주로 넘으려던 우금티 골짜기

 

동학군이 공격하던 방향, 우금티 고개, 4차선 도로로 끊은 후 지붕을 덮고 터널을 만들어 더욱 볼 성 사납다.

 

고갯길 당산목은 백여 년 전의 참상을 기억하고 있을까?

 

 일본군이 주둔했던 고갯길 왼쪽 능선

 

  공주 방향 터널의 끝 지점, 소나무 몇 그루로 고갯길의 참상을 덮고 있었다.

 

  고갯길 터널 끝에서 바라본 공주시가

 

  다시 위령탑으로 내려가 비문을 읽어 보았다.   전면의 글

  인내천과 사민평등의 종지 아래 후천개벽의 혁명정신으로 무장하고 동학접주 전봉준이 호남의 만석보 기슭에서 수천의 농민군을 편성하여 첫 봉화를 든 것은 갑오(서기 1894년) 정월 십일. 이십일께는 다시 대거하여 백산을 점령하고 습격해오는 관군들을 격파하면서 승승장구 - 사월말에는 전주성까지 함락하게 되니 혁명의 성공이 눈앞에 다가오는 듯했었다. 그러나 청일 양국의 무력간섭 아래 이 나라의 주권마저 위협받게 되자 정부 측이 먼저 화해하기를 청하니 우국 애민의 일념에서 동학군은 마침내 양보하여 전주성을 내어주고 그 여력을 오로지 지방조직에만 기울였다.

  그런데 불구하고 군국주의 일제의 엄청난 야욕은 돌연 남의 나라 주권을 침해하면서 경쟁상대인 청국 군을 패주 시키고 한반도 전역을 독점하고자 날뛰게 되니 정녕 국가의 명맥이 통틀어 풍전등화가 되고 말았다. 이에 한동안 후퇴했던 동학군은 드디어 항일구국의 독립군으로 재무장하고 총궐기하였다. 남북접이 호응 합세하여 이십만의 대병력을 논산평야로 집결시키고 전봉준과 손병희 두 총령의 작전지도 아래 서울까지 진격하는 주요 거점으로 공주성부터 공략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십월 하순부터 전개된 공주성의 대공방전은 이 우금치를 중심으로 날이 갈수록 처참하고 가열하게 되었다. 한 고지의 주인을 사오십 차례나 바꾸어 가면서 세계 전사에 유례없는 격전을 되풀이하였다. 그리하다가 새로 투입된 일본군의 증원부대가 근대의 무서운 살인무기 기관총으로 연속 맹사격을 퍼붓게 되니 악전고투 삼일 만에 동학군은 막대한 희생자를 내인 채 전우들의 시산혈하를 넘고 넘어서 십일월 십일 논산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대망의 혁명위업이 여기서 좌절당하고 계속되는 추격과 살육 속에 그들의 위국단침조차 알아줄 이 없었다. 그러나 님들들이 가신지 팔십 년 516 혁명 이래의 신생 조국이 새삼 동학혁명군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시월유신의 한 돐을 보내게 된 만큼 우리 모두가 피어린 이 언덕에 잠든 그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하여 이탑을 세우노라. 오가는 천만 대의 후손들이여! 그 위대한 혁명정신을 영원무궁토록 이어받아 힘차게 선양하라.


서기 1973년 11월 11일 
제자 대통령 박정희
글  문학박사 이선근
글씨  양재한
동학혁명군위령탑건립위원회 세움

  글쓴이 이선근은 516 군사쿠데타를 미화하고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찬양하였다. 그 탓인지 516과 시월유신, 대통령 박정희 글자는 누군가가 알아볼 수 없도록 쪼아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친일 독재 정권을 찬양하던 글쓴이도 결국 권력의 주구로 전락해버린 셈이다. 동학 농민 위령탑에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가 제자 휘호를 남기고, 비문에 그의 독재 정권을 찬양하고 있는 위령비는 진정 동학 혁명군의 원령을 위로할 수 있을까?  위령탑이 세워진지 50여 년, 그동안 동학 혁명 정신을 찬양하고 계승하자는 학자들과 정치가들은 무엇을 했단 말인가. 아직까지 동학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남아, 전몰하신 원령들이 구천에 떠돌며 못난 후손들을 원망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후면의 감사문 - 내용은 10여만 동학 혁명군 영령들을 위해 이 탑을 세우고, 박정희 휘호와 하사금과 비문을 쓴 이선근 박사 설계 감수를 맡은 정인국 교수, 글씨를 쓴 양재한 등에 감사함을 천도교령 최덕신이 알리는 글이다.  천도교령 최덕신은 박정희와 갈등하다가 월북하여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호의호식하면서 구차한 생명을 이어 갔다. 사망 후 북한 혁명 열사의 묘에 안장되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위령탑이다. 동학 혁명군의 원혼을 위로는 커녕 짓밟는 탑이 오늘도 이 고개에 버젓이 서있다는 것이 수치스럽단 생각이다.

 

위령탑 뒤, 깨진 조형물

 

 알림터 앞에 있는 시비

 

 고갯길 아래로 진열해 놓은 시화 판넬들...

 

 우금티 홍보관인 알림터

 

 우금티 주변 지형도

 

  알림터 영상관에 홀로 앉아 짧은 영상 하나를 보고 나왔다. 보국안민을 위해 삽 대신 죽창을 들었던 이만여 명의 농민군이 신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우금티의 가슴 아픈 역사가 지표 없이 방황하는 오늘날 우리 현실과 같아 무거운 마음으로 홍보관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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