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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독립문과 서재필

 1897년 중국사신들을 영접하던 모화관 앞 정문인 영은문을 헐고 대한제국이 중국의 종속국이 아닌 독립 자주국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세운 문이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그동안 사용했던 중국 연호를 버리고 자체 연호 광무(光武)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본디 자리에서 이곳으로 70m 정도 이전하였다. 

 

 독립문 앞에 있는 두 개의 돌기둥은 영은문(迎恩門) 기둥을 받쳤던 주초석이다. 영은문은 조선 초 태종 7년(1407)에 모화루(慕華樓)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워져 490여 년 동안 조선의 사대주의를 상징하였다.  

 

 영은문 주초석과 독립문, 독립문 외벽의 녹물과 오염된 부분을 깨끗이 닦아내면 보기에 좋을 것 같다.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문 건립에 앞장섰던 서재필

 

 3 1독립선언 기념탑

 

 독립관-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모화관을 갑오경장(1894) 이후 독립협회가 주도하여 개수한 후 독립관으로 개칭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이후 일제에 의해 철거된 것을 본래의 위치에서 350여 m 이동하여 1996년 말 서울시에서 복원하였다. 현재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봉안 전시하고 있다.

 

 옛 영은문 사진-인터넷에서 퍼옴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의 일생

 

 "서재필의 생애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열렬한 개화파 민족주의자로 젊은 나이에 갑신정변을 주도했고, 사대모화의 상징인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으며 〈독립신문〉을 간행했다가 수구파의 미움을 받아 미국으로 쫓겨 간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로서 생업을 꾸리면서 열렬한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파산하여 어려운 생활을 꾸렸고, 해방 뒤 귀국했다가 이승만의 견제로 다시 실의 속에서 미국으로 돌아가 죽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서재필은 전남 보성 출신으로 스무 살에 최연소로 과거에 급제한 후, 1년 뒤 1883년 5월 일본 하사관 학교에서 유학하고 이듬해 7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일본에서 함께 군사교육을 받은 사관 생도들과 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1884년 10월 조련국이 신설될 때 사관장에 임명되었으나, 국내에 주둔한 청군(淸軍)의 간섭으로 무산되었다. 그해 12월 4일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이 탈중화(脫中華)하여 근대적인 자주독립국가를 꿈꾼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사관 생도들을 이끌고 경호책임자로 참여하였다. 갑신정변 후 그는 정령관(正領官, 지금의 대령급) 겸 병조참판이 되었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3일 천하로 끝났다. 그러나, 서재필은 스물두 살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한 지 2년 만에 고관의 반열에 올랐다.


 거사 실패 후 조선정부의 역적이 되어, 박영효 등과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쿠데타 실패로 부모와 처는 음독자살하였으며, 두 살 된 아들은 돌보는 이가 없어 굶어 죽었다. 바로 밑 동생 재창(載昌)은 체포되어 참형되었고, 막내 재우(載雨)는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는 일본에서 약 1년여 망명생활을 했으나 생활이 어렵자 개화파 동지들인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미국생활 중 유색인종으로 차별이 심하고, 노동으로 생활하는 등 고생이 심하자 박영효 서광범은 일본으로 돌아가고 서재필만 홀로 남았다. 1886년 존 홀렌벡이란 독지가의 도움으로 그는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어 시로 이주한 뒤 그곳에 있는 해리힐맨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서구 학문을 배웠다.

 

 미국에서 어렵게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컬럼비안 대학교(현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부설 코크란 대학에서 세균학을 전공하여 졸업한 후 의사가 된 서재필은 1894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개명하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필립 제이슨이란 미국명은 '서재필'을 '필재서'로 거꾸로 한 뒤, 비슷한 어감의 영어 이름으로 개명한 것이다. 이후 1894년 컬럼비아 대학교병원에서도 잠깐 근무하다 워싱턴에서 개인 병원을 개업하고, 이듬해 미국 여인 뮤리얼 암스트롱(Muriel Armstrong)과 결혼하였다. 서재필의 부인은 제임스 뷰캐넌 전 미국 대통령과 사촌 형제이자 남북 전쟁 당시 철도 우편국을 창설했던 미국의 정치인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George Buchanan Armstrong)의 딸이다. 둘은 가정교사로 만나 연애를 시작, 워싱턴 D.C. 교외에 있는 커버넌트 교회에서 간단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뮤리엘 집안에서는 서재필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결혼을 결심한 뮤리엘의 마음은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는 서재필이 밤길에 불량배에게 희롱당하던 뮤리엘 암스트롱을 구해줬기 때문이었다는데, 서재필이 177.8cm 정도로 당시로서는 상당한 장신이었고, 갑신정변 때 직접 칼을 들고 싸웠을 만큼 뛰어난 무력과 완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불량배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대통령 가문의 결혼식이어서인지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주류 언론의 조명을 꽤 받았다고 한다. 개인 병원 운영은 인종차별로 생계유지가 어려웠다. 

 



  1894년 일제가 동학 농민 봉기를 구실로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친일 개화정권을 수립하면서 갑신정변 주동자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져 박영효, 서광범 등이 귀국하여 복권되었다. 특히 1895년 5월 박정양 내각이 성립되자 이 내각의 실세였던 내부 대신 박영효는 개화당 동지인 서재필을 외부 협판으로 임명하고 귀국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당시 병원을 개업한 직후일 뿐만 아니라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귀국하지 못했고 그 후 실각한 박영효가 미국을 방문하여 재차 귀국을 권유하자, 1895년 12월 26일, 갑신정변의 실패로 고국을 떠난 지 11년 만에 미국인 아내와 함께 옛 조국 땅을 다시 밟았다. 당시 신변 문제 때문에 서재필은 미국에서부터 사설 경호원을 고용하여 귀국길 내내 대동하도록 했다. 필립 제이슨은 중추원 고문이 되어 막대한 월급을 받으며 미국인으로 살았다. 그는 ‘서재필’ 이란 조선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제손 박사’로 기명하며 미국인의 풍습으로 미국인처럼 생활했다. 1896년 스테파니 제이슨(Stephanie Jaisohn Boyd)을, 1898년 뮤리엘 제이슨(Muriel Jaisohn)을 낳았다. 

 



  마침 당시 정부에서는 근대적인 신문 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서재필은 정부의 출자금 5천 원으로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정부 기관지 또는 독립협회 기관지로 활용하였다. 그는 이를 개인 소유로 등록하였다. 주택구입비와 후한 월급도 받았다. 신문을 발행하면서 논설을 자주 썼는데, 영어로 쓰고 이를 번역해 게재했다. 그 뒤 1899년 서재필은 대한제국 정부에 4천 원을 받고 〈독립신문〉을 팔았다. 정부가 출자한 신문사를 자신의 명의로 등록했다가 개인의 자산으로 되팔아 재산을 불리기도 했다. 



 또 다른 한편,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정부정책의 시비를 가리고 민중이 참여한 개혁운동을 펼치는 기관으로 삼았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긴 지 5개월이 지난 1896년 7월 2일 광화문 거리에 있는 외부에 명사들이 모여들었다. 독립협회 총립총회에서는 사업목표로 독립문을 짓고 독립공원을 조성하기로 결의했다. 임원진은 회장에 안경수, 위원장에 이완용, 위원에 이상재 등 8명이었다. 서재필은 미국 시민권을 가졌다고 하여 임원에 들지 않고 고문을 맡았다. 이들은 무엇보다 독립문 건립을 서둘러 1897년 말에 완공하였다.



 독립문을 세운 자리는 조선시대 중국사신을 맞이하는 영은문이었는데, 이문은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의해 이미 일부 헐려 있었다. 영은문은 사대모화의 상징물이었다. 그런 연유로 일본은 ‘조선이 청나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구실로 청나라 대신 조선을 일본에 종속시키기 위한 책동을 부렸다.  따라서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은 청나라의 간섭을 배제하겠다는 뜻으로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한편 서재필은 미국의 입장에서 〈독립신문〉의 논조를 펴나갔다. 그런데 러시아는 남하정책을 펴면서 고종의 아관파천을 이용해 친러정권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그를 중추원 고문직에서 해고시키려 했다. 그에게 고문직의 사임이 강요되자, 그는 10년 계약의 남은 기간 월급을 모두 지불한다면 사퇴하겠다며, 계약의 남은 기간인 7년 10개월분의 봉급 2만 8천2백 원과 미국으로 돌아갈 여비 6백 원까지 받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본의 아니게 미국으로 돌아가, 펜실베이니아에 개인 병원을 개업하고, 대학에서 해부학을 강의하면서 지냈다. 하지만 1919년 3.1 운동을 전후해선 다시 기고문 등을 실으며 외교적 선전 활동을 하게 된다. 임시 정부의 대미 외교 고문을 한동안 맡기도 했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1925년엔 호놀룰루의 범태평양 회의에 한국 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하여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규탄하기도 했다.

 


 조국이 해방되자, 1947년 미군정에서 그를 정무관(政務官)으로 초청하여 고국에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당시 우리글과 우리말이 아주 서툴러 의사소통을 제대로 못했다 한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하였으나 당시 서재필은 국적이 미국이였기 때문에 피선거권이 없었다. 본인도 대통령 자리에 큰 미련이 없었고, 정세와 고령으로 인해서 출마할 생각도 없었다고 한다. 이때 라디오 방송 연설을 영어로 했다고 한다. 그래도 지지자가 없지는 않았는지, 국회에서 간선으로 실시한 제1회 대통령 선거에서 무효표가 되긴 했지만 1표를 얻긴 했다. 그러나 어쨌든 서재필의 고사로 인해 이승만과 서재필을 경쟁시키려는 미국의 계획은 틀어졌고, 이는 이승만이 이후 대통령에 한결 편하게 오르는 기회가 된다. 그래도 보은격으로 김규식에 이어 조선적십자사 2대 총재 자리에 오르게 되지만 곧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1948년 자택이 있는 미국 미디아시로 돌아와 다시 의사로 활동하다 한국에서 6 25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1년 1월 5일 필라델피아 근교 노리스타운의 몽고메리병원에서 87세로 생애를 마쳤다. 필라델피아 공동묘지 납골당에 안치된 서재필과 그의 아내 유골은 돌봐주는 이가 아무도 없어 묘지 관리인이 주인없는 유골인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수십년째 방치되었다. 이를 1983년 현지 교민 장익태 씨와 서재필 친형의 증손자인 서동성 씨가 사비 2천 달러를 들여 좀 더 좋은 납골당으로 이장해 관리하기 시작했다. 서재필은 모아둔 재산이 없이 가난하게 살았으며,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둘째 딸도 한겨울에 난방도 못하고 살만큼 궁핍했다고 한다. 생전에 딸을 둘 두었으나 장녀와는 사이가 소원했는지 장녀에게서 난 손자(93년 당시 70세)는 아주 오래 전부터 연락이 두절되었고, 차녀는 독신으로 사망해 사실상 혈육이 없는 것과 같았다. 차녀 뮤리엘은 사망하기 전 서동성에게 “아버지의 유골을 한국으로 모셔달라”며 울면서 부탁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1977년에 고 서재필 박사에게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94년 그의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봉환되어 4월 8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외증손 이상호 씨가 유해를 운구했다.

 


 서재필이 우리 역사에서 독립운동가로 부각된 것은 그의 독립협회를 통한 활동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가 언론인으로서 언론계에서 자신의 활동과 업적을 과장하고, 해방 후 미군정 당국이나 친미파들이 독립운동가로서의 이미지를 강조한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의 고향 보성에 기념관이 설립되어 있고 동상도 세워져 있다. 더욱이 국사 교과서에서 그의 활동을 지나치게 기술한 탓으로 대중들의 머릿속에는 그가 대단한 독립운동가로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 서재필에 대한 평가는 양극화되어 긍정적으로 추앙하는 한편,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이화의 인물 한국사-  다음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45XX13000105> 위키 백과 등에서 발췌하여 첨삭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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