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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공주 무령왕릉

 수년만에 무령왕릉을 방문했다. 그때보다 모형관의 모습이 달라졌다. 하기야 그대로 두고 방치한다면 발전도 없겠지만... 그런데, 딱히 특별한 무엇이 없는 듯하다. 유일하게 무덤 속 인물의 정체가 밝혀진 왕릉임에도 전시물이나 무령왕의 업적들이 심금을 울릴 만큼 마음속에 와닿지 않았다. 

 유네스코 지정 유적지구라고 요란스런 입간판 표지만 있을 뿐 유적다운 유적은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백제 수도 60여 년 동안 도읍지였다면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그나마 망국의 수도였기에 그 옛날 삼국시대 백제의 유물들이 제대로 보존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네스코 지정 역사지구라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무엇이 있어야 할 텐데 허전한 것이 그저 아쉽기만 하다.

 무령왕릉 모형관을 나와서 진짜 왕릉지역을 가려는데, 가림막을 치고 공사를 하고 있어 애석하게 둘러볼 수 없었다. 무령왕릉은 1971년 송산리 5, 6호 고분의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발견했으나, 급히 서둘러 발굴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축조연대와 무덤 속의 인물이 무덤 속 석수 앞에 있던 왕과 왕비의 지석에 기록되어 분명하게 알 수 있었고, 도굴 흔적이 전혀 없어 부장품들이 온전하게 발굴되었다. 

 

 "지석은 왕의 출생연도나 경력에 대한 기록은 없고 장례에 필요한 기사만 있었다. 왕의 지석 앞면에는 무령왕이 중국 양나라로부터 받은 작호, 사망시 나이와 시신을 능묘에 안장한 시기가 적혔고, 뒷면에는 동·남·북에 방위간지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능묘에 관한 방위도 혹은 능역도를 겸한 것이다. 왕비의 지석 앞면에는 무령왕 사망 후 3년 뒤에 왕비가 사망한 사실과 그로부터 3년 뒤에 왕과 합장한 사실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전일만문'이라는 묘지 대금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른바 지신으로부터 토지를 매입해 능묘를 삼았기에 문권을 작성해 증거로 한다는 토지 매입권이다.

 고분의 구조는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던 벽돌무덤 형식을 모방하고 있다. 봉토의 평면은 직경 20m가량의 원형이며 널방은 남북방향을 축으로 한 긴 네모꼴의 평면을 갖고 있다. 남북길이 4.2m, 동서너비 2.72m이며 높이는 2.93m이다. 왕과 왕비를 합장했는데 왕과 왕비 모두 옻칠된 일본산 나무관에 각기 안치되어 있었다.


 왕과 왕비의 장신구인 금제 관장식, 귀걸이, 은제 허리띠, 금동 신발, 목걸이, 팔찌 등과, 그 외 무기류, 청동제품, 자기류, 목제품 등 다양한 유물들을 발견하였다." <다음 백과에서 일부 발췌 첨삭>    

 

무령왕릉 안에서 왕릉을 지키던 석수 모형 뒤로 왕릉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왕릉 모형 입구

 

왕릉 안 모형

 

왕릉 발굴 당시 내부 모형

 

 벽에 전시된 황금관 장식과 머리 꽂이 등 유품

 

장검과 머리 받침, 요대와 구리거울

 

손잡이 끝에 둥근 고리가 달린 장검 

 

일본에서 태어난 무령왕은 재위 당시 백제의 옛땅이었던 한성 지역을 수복하여 강성한 백제로 부흥시켰다.

 

무령왕릉 주변

 

무령왕릉 이웃에 있는 공주 한옥 마을, 주로 식당가와 한옥 숙박 체험관, 카페 등으로 이루어진 미니 한옥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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