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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

 갑자기 날씨가 더워졌다. 이러다간 봄 없이 곧 여름철이 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따금 가보는 곳이긴 하지만, 한동안 코로나 여파로 유엔초전기념관이 폐쇄되었었다. 봄나들이 겸 전시물들을 보기 위해 초전기념관에 들렸다. 죽미령은 한국전쟁 당시 기습남침한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미군이 최초로 전투를 벌인 곳이라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다. 당시 참전한 미군 스미스 대대는 사전지식도 없이 7월 1일 주둔한 일본에서 황급히 비행기를 타고 부산으로 들어와 7월 5일 새벽에 오산 죽미령에 참호를 파고 아침 8시부터 남하하는 북한군 탱크부대와 보병 부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적을 모르고 자신만만했던 스미스 부대는 북한군보다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이 전투로 북한군의 전력을 재평가하고 유엔군이 한국전쟁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타국땅에 날아와 적응할 사이도 없이 나흘 만에 전투를 치르면서 소중한 목숨을 잃거나 부상당한 스미스 부대원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은 한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되리라 생각한다. 

 

 오산 죽미령 유엔군 초전 기념비 앞, 참전 유엔군 국기 게양대

 

 유엔군 초전 기념비

 

 기념비 앞 모서리에 무심한 산수유나무에 노란 꽃이 활짝 피었다.

 

 코로나 때문에 한동안 닫혔던 유엔군 초전 기념관

 

 기념관 내부 전시장

 

 스미스 부대의 당시 전투 상황을 입체 지형 위에 동영상으로 보여주었다.

 

 당시 전투 상황도

 

 전투를 위해 대전역에 내렸던 스미스 부대원들을 재구성한 모형  

 

 참전했던 스미스 부대원 명단

 

 유엔군 초전 기념관 뒤에 있는 스미스 평화관, 이곳에서는 당시 전투 현장을 체험할 수 있다.

 

 부산에서 기차로 이동하여 대전역에 내리는 스미스 부대원들

 

 시간별 전투 상황 전개도

 

 스미스 평화관 뒤 조성된 죽미령 평화공원

 

 맨 앞의 세 개의 문이 있는 벽면엔 참전용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평화공원 상징 조형물

 

 스미스 부대원들과 세운 최초의 기념비, 참전용사를 상징하는 540개의 돌이 쌓여있다.

 

 평화공원 전망대로 가는 죽미령 고개

 

 평화공원 뒷모습

 

 고개마루 위 전망대

 

 북쪽 병점과 수원방향을 정찰하는 스미스 중령 동상

 

 전망대 뒤 대형 태극기

 

 전망대 뒤쪽에서 보는 북쪽방향, 

 

전망대 뒤, 산길을 걸어서 우회하면, 스미스 평화관으로 내려올 수 있다.

 

 스미스 부대 참전 경위와 전투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6월 30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미 극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에 따라 같은 날 맥아더는 주일 미군이었던 미국 육군 제8군의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에게 “24사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라.”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7월 1일 규슈 구마모토 우드 기지에서 주둔하고 있던 제8군 제24보병사단 제21연대 제1대대를 부산으로 공수했다.

 이 대대는 대대장 찰스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Smith)로 편성했다. 2개 중대 406명. 장병 1명이 M1 카빈 실탄 120발과 C-레이션 이틀분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부산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다음날 아침 8시에 대전에 도착하였다.


 7월 3일 북한군은 한강을 넘어 남하하기 시작했고 스미스 부대는 7월 5일 새벽 3시 오산 북쪽 죽미령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도로와 철로 사이의 공간에 도로를 포함한 좌측 능선에 B 중대를, 철로 좌측 편에 있는 진지 내 우측 고지에는 C 중대를 배치하고, 75mm 무반동 총 1정씩을 각 중대지역에 배치시켰다. 그리고 4.2인치 박격포를 B 중대 후방 400야드 지점에 예비로 배치하였다.

 52 포병대대장 밀러 O. 페리 중령은 보병 진지 후방 약 2000야드 떨어진 지점에 5문의 포를 배치하고, 1문의 포는 6발의 대전차 포탄을 줘서 보병과 포병 진지 중간 언덕에 배치하였다. 그래서 비 오는 7월 5일 아침 오산 북방 죽미령 지역에는 540명의 미군(보병장교 17명, 병 389명과 포병장교 9명과 병 125명)이 북한군을 기다렸다.


 비가 내리는 아침이었지만, 07:00시가 조금 지나서 수원 가까이에서 북한군의 움직임이 보였다. 08:00시경 8대의 전차가 죽미령으로 남하하고 있었다.

 08:18시 미군의 포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포격을 했으나 북한군 전차를 멈출 수 없었다. 스미스 중령은 적 전차가 700 야드 내에 들어오자 75mm 무반동총과 2.36인치 바주카포로 전차를 공격했다. 전방에 추진된 포도 대전차포탄을 쏘아 결국 북한군 전차 2대가 멈췄다.

 북한군 전차가 불이 나자, 3명의 승무원이 탈출하면서 미군에 사격하여 미군 기관총 부사수가 전사하였다. 한국전선에서 일어난 최초의 미군 전사자였다. 북한군 3명은 미군에게 사살되었으나, 세 번째 북한군 전차부터는 미군을 무시하고 지나쳐 총 33대의 전차가 미군의 보병 진지를 지나쳐 갔다. 스미스 부대는 대전차 포탄이 떨어지고, 나머지 화기는 북한군 전차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한국 전선에서 미군과 북한군의 최초 접전은 이와 같이 진행되어 09:00경에 일단 끝났다.


 33대의 적 전차는 스미스 부대의 포병 진지까지 통과하면서 4대가 파괴되거나 움직일 수 없게 되고 3대가 부서졌다. 그리고 나머지는 오산을 향해 남진하하였다.

이로부터 한 시간이 지나갔을까 하는 즈음에, 스미스 중령은 수원 가까이에서 긴 행렬의 트럭과 보병이 접근해 오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비가 끈질기게 쏟아지는 가운데 내려오는 적 보병의 행렬은 약 6마일(10 km) 정도였다. 3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접근하는 이 보병 행렬은 한 시간 후면 미군의 방어 진지에 도달할 것으로 판단되었는데 이는 북한군 4사단의 주력이었다.

11:45시경 북한군의 호송트럭이 1000야드 전방에 접근했을 때 스미스 중령은 “그들을 엄벌에 처하라(Throw the book at them).'라는 명령을 내렸다. 박격포와 50 구경 기관총을 쏘아 남침을 저지했다. 적 트럭에 불이 붙고, 적들은 공중에 튀어 오르기도 했다. 곧 3대의 적 전차가 접근하여 전차포와 기관총을 쏘기 시작했다. 북한군들은 트럭에서 내려 산개하기 시작했다. 양측 보병의 치열한 접전이 시작되었다.

14:30시경 3시간여를 싸운 스미스 부대는 포병과 연락이 끊어지고, 소총탄도 떨어져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었다. 스미스 중령은 우측에 있는 C중대를 먼저 철수시켰다. 그러나 나중에 철수한 B중대의 2소대는 철수명령도 전달이 되지 않을 정도로 다급하게 철수를 서둘렀다. 부상이 경미한 병사들은 본대와 합류해서 철수했지만 중상자들은 어쩔 도리가 없이 전쟁터에 남겨지게 되었고 그 후 상당수가 사망했다. 540명의 스미스 부대원 중에서 150명이 전사하고, 포병대대 소속 장교 5명과 병 26명은 실종되어 최초로 투입된 미군 부대의 피해는 결코 적지 않았다. 미군이 가진 대부분의 장비는 북한군의 손에 들어갔으나 북한군 4사단도 42명의 전사자와 85명의 부상자, 전차 4대를 손실했다. <위키백과에서 발췌하여 첨삭함>

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C%82%B0_%EC%A0%84%ED%88%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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