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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태종 이방원과 순조의 헌인릉

 어제까지 황사에 가려 뿌옇고 서늘하던 날씨가 하룻만에 맑은 하늘을 보였다. 푸른 하늘에 상쾌한 기분으로 집을 나섰으나, 갑자기 기온이 치솟아 여름 날씨를 방불케 했다. 재킷을 벗어 들고 걸었지만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 없었다. 봄 꽃가루들이 눈송이처럼 날려서 알러지 때문에 마스크도 벗지 못하는 어려운 외출이었다.

 헌인릉은 조선을 반석 위에 올린 조선조 3대 임금 태종과 조선 23대 순종 임금의 묘이다. 애석하게 헌인릉 주변엔 정보기관이 있어서 평일임에도 헌인릉 방문과 상관없는 차량들이 주차장에 가득 차있었다. 입구인 인릉을 거쳐 헌릉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왔는데, 인릉은 아래에서 바라볼 때 경사가 심해서 봉분이 잘 보이지 않았다. 헌인릉 아래엔 비닐하우스 화훼단지들이 많아 왕릉과 조화롭지 않았다.  

 인릉은 조선 제23대 왕 순조와 왕비 순원왕후를 모신 합장릉이다. 순조(1790~1834)는 이름 공(玜). 묘호는 당초에 순종(純宗)이었으나 1857년(철종 8)에 개정되었다. 정조의 후궁인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에게서 부왕의 2남으로 태어났으나 1남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일찍 죽어 1800년(정조 24) 왕세자에 책봉되고 그해 6월에 11세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즉위와 함께 영조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3년간 하면서 경주김씨 김관주(金觀柱)와 심환지(沈煥之) 등의 벽파가 정치를 주도하여, 정조가 구축한 탕평정치의 기반을 모조리 파괴하고,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를 통해 정조를 보위했던 남인 세력을 소탕했다. 그로 인해 노론 벽파는 그녀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 완전한 노론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1803년 말에 순조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시파인 순조의 장인 김조순에 의해 노론 정권이 궤멸되어 60여 년에 걸친 안동 김씨 세도정권이 출범하게 되었다. 그 후로 정조의 결정에 따라 장인이 된 김조순(金祖淳) 및 외가 인물들의 권력 강화에 맞서 선왕의 여러 정책을 모범으로 국정을 주도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19세 되던 재위 8년 이후로 정승 김재찬(金載瓚)의 보필을 받아 실무 관원과의 접촉, 암행어사 파견, 《만기요람(萬機要覽)》 편찬, 국왕 친위부대 강화, 하급 친위 관료 육성 등의 방식으로 국정을 파악하고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래 강화되어 왔고 영조 ·정조대의 탕평책에도 꺾이지 않은 소수 명문 가문이 주도하는 정치질서를 개편하지 못하고 건강을 상한 데다가, 1809년의 유례없는 기근과 1811년의 홍경래의 난에 부딪히면서 좌절하게 되었다. 더욱이 국정주도권을 장인 김조순이 장악하여 이른바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자리잡음으로써 적극적인 권한행사를 하지 못하였다. 1827년에는 오랫동안 계획해 온 대로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에게 대리청정시키고 국정 일선에서 물러났다. 세자는 김조순 일파를 견제하면서 의욕적으로 정치의 개편을 추진하였지만 3년 후에 급서함으로써, 다시 순조가 정사를 보았으나, 1834년 죽을 때까지 권한이 위축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두산 백과에서 발췌하고 첨삭>


입구의 인릉

 

인릉 아래 정자각과 비각

 

 정자각 안에 있는 제수 진설도 등

 

 철종 때 세운 비석, 처음 묘호는 순종이었으나, 철종 8년에 순조로 개명하였다.

 

고종 때 세운 비각, 순조 숙황제로 격상하였다.

 

 인릉에서 헌릉 가는 길

 

헌릉

조선 3대 임금인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쌍분묘이다. 야심가였던 이방원(1367~1422)은 정몽주를 죽이고, 조선 건국에 공이 많았으나, 둘째 어미 강씨의 과욕으로 왕세자 책봉에서 밀려나고, 강씨와 결탁한 정도전 일파에게 목숨까지 위태롭게 되자, 역으로 아내 민씨의 도움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정도전 일파와 이복동생인 왕세자 방석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다. 이후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도움을 받았던 처가의 처남들을 죽임으로써 염려되던 외척의 발호를 미리 막았다. 이 때문에 아내 민씨와 갈등이 심해졌으나, 아들 세종의 효심으로 아내와 함께 이곳에 묻혔다. 

헌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신도비각, 그리고 언덕 위에 태종 내외의 쌍묘가 보인다. 

 

정자각과 비각

 

정자각

 

태종의 신도비는 비석 받침의 귀부가 깨어져, 그 옆에 새로 신도비를 세웠다.

 

후대에 새로 세운 신도비

 

태종의 묘역

 

입구로 돌아 나가는 습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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