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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창경궁의 여름

  하늘빛이 너무 고왔다. 버스를 타고 창경궁으로 가면서, 탈 때 사용한 카드를 내릴 때도 찍어야 하는데, 두 개의 카드 중 어느 것을 썼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른 버스로 환승했을 때 환승멘트가 없어서 결재가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세월의 흐름이 더 가속되나 보다. 방금 한 일을 금방 잊어버리는 빈도수가 점점 늘어난다. 그러나 저러나 창경원에 가서는 치매 같은 건망증도 깨끗이 씻고 아름다운 궁궐과 구름꽃 핀 하늘의 조화에 넋 놓고 다녔다. 때마침 만난 문화해설사를 졸졸 따라다니며 전각들의 역사를 소상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때뿐, 연대나 왕들의 이름은 금방 헷갈려 버렸다. 설명 듣는 것에 열중하다 보니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연못까지의 해설코스를 마치고, 식물원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며 못다 한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경복궁이나 창덕궁과는 달리 동쪽으로 앉은 청경궁. 주로 여성들의 공간이었기에 아기자기하고, 그나마 조선 전각들이 가장 많이 남아있어 고풍스러운 곳이라고 해설사는 말했다. 간악한 일제에 의해 동물원으로 훼손되고 많은 전각들이 사라졌지만, 나름대로 복원에 힘쓰고 있어 아름다운 궁궐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일제가 창경궁과 종묘사이를 갈라놓은 율곡로는 지금 터널공사를 하면서 흙으로 덮고 있다. 금년 말에 완공이라는데, 공사진척이 빠르지 않아 시간은 더 걸릴 수도 있다고 한다. 훼손된 조선의 궁궐들이 제모습을 찾아가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오백 년 사직을 포기하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나라 전체를 일제에 헌납한 구한말의 위정자들이 한심스럽다. 통째로 나라를 일제에 헌납한 덕에 그들은 작위를 받고 권세를 누리며 살았지만, 백성들은 짓밟히며 목숨을 잃기도 했다. 해방 후 아직까지도 조선의 반쪽 국가를 경영하면서도 친일잔재세력들은 일본을 비호하며 친일파임을 서슴지 않고 주장하기도 하며, 일부 뇌물 정치가들은 뒷돈을 받고 부정을 저지르는데 양심의 뉘우침도 별로 없는 듯하다. 지난날의 과오를 반면교사로 삼아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할 터인데... 아름다운 궁궐의 모습을 느끼면서도, 사진을 담는 동안, 머릿속이 그리 맑고 상쾌하지 못했다.    

 

명정전으로 들어가는 중문인 명정문 

 

명정전- 일제가 없애버린 품계석과 바닥의 돌들을 80년대 복원했다. 조선시대에는 마당의 규모가 작아 대부분의 행사는 경복궁이나 창덕궁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임금께서 집무하시던, 편전인 문정전(남향) 

 

문정전(좌측 후면 전각) 옆에 있는 궁궐의 공부방 격인 숭문당(동향) 

 

명정전에서 숭문당 까지는 복도로 이어진 하나의 건축공간으로 그 배치가 아기자기했다. 명정전 뒷문으로 나오면, 각종 궁궐 연회를 열었다는 함인정이 있다. 좌측면 담장 너머는 창덕궁 낙선재로 생각된다.  

 

함인정에서 바라본 명정전 후측면 

 

함인정 마루에 걸터앉아 잠시 쉬었다. 뜨거운 한낮임에도 바람의 통로처럼 서늘한 바람이 끊이지 않았다.  

 

함인정 마루에서 바라본 환경전과 경춘전. 경춘전은 주로 대왕대비 처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정조대왕이 태어나기도 한 곳이다. 환경전과 경춘전 사이를 지나면 중전의 처소인 통명전이 있다. 

 

전측면에서 본 경춘전, 좌측은 환경전과 함인정. 

 

  경춘전 뒤의 통명전, 중전의 처소라 경복궁의 교태전처럼 용마루가 없다. 통명전은 창경궁 내전 가운데 으뜸 건물로 꼽힌다. 1834년에 다시 세운 침전의 중심 건물로, 현존하는 중궁전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이곳에서는 희빈 장씨의 인현왕후 저주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씨는 희빈으로 내려앉은 희빈 장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하며 자신의 처소인 취선당에 신당을 차리고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파묻었다고 한다. 저주사건이 발각되자, 결국 희빈은 취선당에서 사사되었다.

 

  통명전은 개방중이었다. 신발을 벗고 통명전 대청마루에 올랐다. 대청에 걸린 편액은 순조의 어필로 금믈로 쓴 진품이란다. 좌우의 작은 방들에서는 직원들이 침구작업을 하고 있어서 생략했다.

 

통명정 뒤뜰, 경복궁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소탈한 여인네의 성품처럼 단아하다. 

 

  통명전 우측의 연못, 통명전과 창덕궁 후원 담장 사이의 공간에 맑은 물로 직사각형의 연못을 만들고 석교를 놓았다. 물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한 듯, 물이끼가 잔뜩 끼었다. 가끔씩 청소라도 해주면 좋을 것을...  본디 창덕궁과 창경궁은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공간인데, 창덕궁 후원을 세계 유산으로 지정받기 위해 분리했다고 한다.

 

  통명전 좌측면에서 본 전경. 그 옆에는 양화당 

 

  양화당 뒤, 언덕에서 바라본 남쪽 풍경 

 

  양화당 뒤 언덕에서 연못으로 가는 숲 속에 있는 성종대왕 태실과 비석. 본디 궁궐에 태실을 두지 않으나 일제가 경기도 광주에서 이곳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이 주변은 창경원 당시 맹수우리가 있었던 자리이다.

 

  본디 임금이 농사짓던 곳이라는데, 일제가 파놓은 호수, 옛날 창경원 밤벚꽃놀이의 백미를 이루던 보트장이 있던 곳인데, 복원하며 가운데 인공섬을 만들었다. 백성들의 무지가 잘 드러난다. 일제가 궁궐을 훼손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철저히 짓밟도록 했고, 망국의 백성들은 별 의식도 없이 일제의 뜻대로 벚꽃을 즐겼으니, 참으로 얼굴이 뜨거워진다. 이를 복원한 것은 총칼로 백성들을 짓밟던 5 공화국 시절이니 참으로 역사는 아이러니하다.

 

식물원 주변

 

  창경궁은 주로 여인네들의 궁궐이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장희빈의 경우 후궁으로 살 때는 창경궁에서 지내다가 중전이 되어서는 창덕궁으로 처소를 옮겼다.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장옥정은 창경궁으로 쫓겨왔고 인현왕후를 저주하다가 이곳에서 사사되었다.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숨을 거둔 곳도 이곳이며, 많은 조선의 왕자들이 이곳의 전각에서 태어났다.  

  창덕궁 후원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특별대우를 받는데, 본디 한 곳이었던 창경원 뒤뜰도 대우는 받지 못하나, 정취는 창덕궁에 못지않다. 본디 한 영역이기에 좋고 나쁨이 있을 리 없다. 창경궁 숲도 녹음이 그윽하여 그늘이 깊고 휴식 공간도 많아서 매우 시원하고 상쾌했다. 입장료 1000원으로 한여름철 피서지로 이용해도 최고의 선택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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