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빛이 맑고 고왔다. 벌써 초여름인 듯 햇볕이 따갑다. 역사를 재구성하여 조선 궁궐을 입체적으로 안내하는 덕수궁 투어에 참여했다. 덕수궁은 그동안 여러 번 갔었고 대한문 앞을 이따금 지나치는 곳이라 관심이 덜한 곳이었는데, 의외로 입장객들이 많아 놀랐다. 궁궐탐방이 아닌 도심 속 휴게소로도 그만한 공간이 없을 듯하다. 다만 그 앞에 대형 확성기를 놓고 시위하는 사람들 때문에 시끄러웠던 것이 흠이었다. 과거에서 찾아온 Y가 안내하며 들려주는 덕수궁과 고종에 얽힌 이야기가 애처러웠다. 일제에 강탈당한 조선말의 비참했던 우리 역사가 참으로 슬프다. 제 나라 하나 지키지 못하고 일제에 농락당하다 결국 나라까지 빼앗기고 독살당한 고종의 이야기가 오늘에 다시 되풀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한 마음으로 외세에 맞서 경제와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할 때에 부정선거 운운하며 열심히 투표하자는 주장은 얼마나 자가당착인가. 과거를 잊은 자 미래가 없다란 말은 수없이 되새겨도 모자람이 없을 터에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고 독선에 빠져 오늘의 정세를 돌보지 못하는 현실이 답답하다.
대한문(大漢門)은 덕수궁의 정문으로 ‘대한’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라는 뜻이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었던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동문인 대안문(大安門) 주변이 환구단을 비롯하여 새로운 도심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정문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지금의 이름은 1906년(광무 10) 문을 수리하면서 바꾸게 되었다. 원래 대한문은 약 33m 앞에 있었으나 1970년대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극우 집회에 사용된 성조기가 대한민국 궁궐 앞에 펄럭이는 현실이 너무 낯설다.

대한문 뒤 금천교- 1986년에 발굴하여 복원하였다.

투어의 시작 - 대한문 앞에서 수신기와 이어폰을 지급받고 Y의 뒤를 따라 투어를 시작했다.

광명문(光明門)은 함녕전의 정문으로 ‘광명’은 ‘밝음을 맞다’라는 뜻이다. 1938년 일제에 의해 중화문의 서남쪽으로 옮겨져 보루각 자격루와 흥천사 동종 등을 전시하였다. 2018년 약 80여 년 만에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겼다. 일주문도 아닌 터에 회랑과 전각들은 사라지고 육중한 대문만이 덩그라니 서있는 모습이 어색하다.


덕홍전(德弘殿)의 ‘덕홍’은 ‘덕이 넓고 크다’라는 뜻으로, 이곳은 원래 고종의 황후인 명성황후의 혼전(왕과 왕비의 신주를 종묘로 모시기 전까지 임시로 신주를 모시는 건물)인 경효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이후 고종은 고위 관료와 외교 사절 등 빈객을 접대하기 위한 접견실로 사용하였다. 내부는 천장의 샹들리에와 봉황문양의 단청, 오얏문양 등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원래 덕홍전 주위에는 행각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행각 일부만 함녕전 남행각에 맞닿아 있다.

함녕전, 함녕전(咸寧殿)은 1897년 고종의 환궁과 함께 지어진 황제의 침전으로, ‘함녕’은 ‘모두가 평안하다’라는 뜻이다. 1904년(광무 8) 아궁이에서 시작된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 다시 지었다. 고종은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1919년에 세상을 떠났다. 함녕전 뒤편에는 계단식 정원으로 꾸며 아름다운 장식을 한 굴뚝들을 설치하였다. 함녕전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고종이 사용하던 황금색 의자

함녕전 뒤 그늘 계단에 앉아서 제공된 수신기로 고종이 명성왕후를 그리워하며 왕비의 능참봉과 전화로 대화하는 절절한 사연을 재현한 목소리를 들었다. 고종은 왕후를 진정 사랑했을까.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나이들어서는 아내에게 종속되었던 고종이 아니던가.

정관헌(靜觀軒)의 ‘정관’은 ‘고요히 바라보다’라는 뜻으로, 『고종실록』에 의하면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임시로 봉안했던 장소로 사용하였다. 정관헌은 동서양의 양식을 모두 갖춘 건물인데 기단 위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조석 기둥을 둘러서 내부 공간을 만들었고, 바깥에는 동·남·서 세 방향에 기둥을 세운 포치(건물의 입주나 현관에 지붕을 갖춘 곳)가 있다.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의 전통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고종은 이곳에서 가배(커피)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커피에 독을 타서 독살한 것으로 추정한다. 고종 독살설은 1919년 3.1 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만세운동은 상해 임시정부를 만들고 이는 독립투쟁의 구심점이 되었다.




함녕전 후측면과 아궁이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Ernest Bethell)과 특파원 코웬(Cowen)은 영국 일간지 『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icle)』 5면 톱기사로 이 화재를 전 세계에 타전했다. 이들은 기사에서 덕수궁 화재가 단순 과실이 아니라 "일본 측에 의한 방화(放火)로 추정된다"고 폭로했다. 고종황제를 위협하고 창덕궁으로 강제 이주시키기 위해 일제가 고의로 불을 질렀을 가능성이 크다는 취지였다. 이후 베델은 해고된 후, 양기탁과 함께『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본격적인 항일 언론 활동을 펼쳤다. 한국명 '배설'

석어당 뒷면

석어당(昔御堂)은 즉조당과 함께 덕수궁의 모태가 되는 건물로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 ‘석어’는 ‘옛날에 임어(왕이 왕림)하다’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가 임시로 거처했던 곳이다. 광해군 대에는 선조의 왕비 인목왕후가 유폐되기도 하였고, 1623년 인조반정 후 광해군을 문책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인조는 경운궁의 전각 대부분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나 석어당과 즉조당은 보존하였다. 석어당은 덕수궁에 있는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2층 건물이자 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이다.

석어당 현판-고종의 친필이다.

석어당 뒤에서 대청마루를 지나 중화전 측면이 보인다.

석어당 뒤와 즉조당(卽阼堂)은 석어당과 함께 덕수궁의 모태가 되는 건물로, ‘즉조’는 ‘왕의 즉위’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15대 광해군과 16대 인조가 왕위에 올랐고, 1897년 대한제국 이후에는 정전으로 사용하였다. 이때 이름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렀다가 1902년(광무 6) 중화전이 세워지면서 다시 즉조당으로 불렸다. 이후에는 고종의 후궁인 황귀비 엄씨가 생활하다가 1911년에 세상을 떠난 곳이다.

준명당(浚眀堂) 축대에 난간을 세웠던 구멍, 덕혜옹주를 보호하기 위해 난간을 세웠단다.

준명당(浚眀堂)은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된 건물로, ‘준명’은 ‘다스려 밝힌다’라는 뜻이다. 이곳은 즉조당과 함께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음 해에 복원하였다. 1916년에는 고종의 딸 덕혜옹주의 교육을 위해 유치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준명당과 즉조당

석어당

중화전(中和殿)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중화’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이라는 뜻이다. 고종이 이곳에 환궁한 후 5년 정도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다가 1902년(광무 6) 다른 궁궐의 정전처럼 2층 구조의 중화전을 지었다. 그러나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소실된 후 1층 규모로 중건하였다. 중화전으로 오르는 계단 답도에는 다른 정전의 답도와 다르게 봉황이 아닌 용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이는 대한제국 선포 후에 지어진 건물로 황제를 상징하는 용을 장식한 것이다. 중화전 마당에는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서 있는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중화전의 용상과 일월오봉도, 일월오봉도는 병풍 모양으로 접을 수 있는 구조, 오봉도 뒤로 침전으로 갈 수 있는 문이 있다.

설명하는 Y뒤로 덕홍전과 함녕전이 있다.



황제를 상징하는 용 조각



중화문 옆 남아있는 행각의 부분

중화문(中和門)은 중화전의 정문으로 중화전과 함께 지어진 문이다. 중화전과 마찬가지로 답도에는 용을 장식하였다. 원래 문 좌우로 행각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현재는 동쪽에 일부만 남아 있다. 중화전과 중화문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준명당과 즉조당을 지나 석조전으로 이동

석조전(石造殿)은 고종이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서양식 석조건물로, ‘석조’는 ‘돌로 짓다’라는 뜻이다. 영국인 하딩이 설계한 이 건물은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지었다. 석조전은 서양의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건물의 앞과 동서 양면에 발코니가 설치된 것이 특징이다. 지층은 시종이 기거하는 방과 부속 시설이 있었고, 돌계단을 올라 들어가는 1층에는 접견실과 귀빈 대기실, 대식당 등이 있고 2층은 황제와 황후가 거처하는 침실과 여러 용도의 방으로 구성되었다.
1910년에 준공된 후 고종은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을 만나기 위한 접견실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세상을 떠난 후 덕수궁이 훼손되는 과정에서 석조전은 일본 미술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광복 후 1946년부터 47년까지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사용하였고, 1948년부터 50년까지는 유엔 한국위원단의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였다가 2009년부터 복원공사를 하여 현재는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만방에 알리고자 1907년 6월, 네들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3명을 파견했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3인을 파견했으나, 일제의 훼방과 열강들의 냉담으로 공식참석을 못하고, 각국 대표와 언론에 호소문을 전달하였다. 이위종의 연설과 호소문이 언론에 보도되어 조선의 억울함이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7월 20일 양위식을 강행하였다. 이어서 순종이 즉위하고 4일 후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었으며, 얼마 후에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됐다. 이것도 모자라 일본은 헤이그 특사의 책임을 물어 궐석 재판을 열고 이위종과 (이미 죽은) 이준에게 종신형을 언도했으며, 이상설에게는 사형을 선고했다. 이 때문에 이상설과 이위종은 죽을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석조전 앞 분수, 석조전 서관인 미술관은 현재 보수중.


돈덕전(惇德殿)은 1902년~1903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행사(칭경예식)를 위해 지은 건물로, ‘돈덕’은 ‘덕이 도탑다’라는 뜻이다. 화려한 유럽풍 외관의 벽돌로 지어진 돈덕전은 1층은 폐현실, 2층에는 침실이 자리하였으며, 각국 외교사절의 폐현(황제나 황후를 만나는 일) 및 연회장, 국빈급 외국인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1907년에 순종이 이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하고 가졌던 곳이다. 순종이 즉위한 직후, 일제는 고종과 순종의 정치적 분리를 위해 1907년 11월 순종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압박하여, 창덕궁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궁이 되었다. 이 시기에 고종이 계신 경운궁은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를 담아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돈덕전은 고종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방치되었다가 1920년대에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2023년에 재건하였다.


고종의 길, 옛 러시아 공관에서 덕수궁으로, 아관파천에서 환궁했던 길. 선원전 지역, 역대 선대왕들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 지내던 곳으로 복구작업이 한창이다.


조선저축은행 중역사택-일제의 잔재를 아직까지 지우지 못한 부끄러운 역사의 현장이다.

선원전 영역과 그 뒤 복원 현장


과거의 역사를 안내하던 Y가 밝히는 그녀의 정체


Y의 뒤를 따라 전하는 가사에 곡을 붙여 재구성한 뜨거운 독립군가를 들으며 정동공원까지 왔다. 옛 러시아 공사관이 있던 언덕, 정동 공원이 Y와 마지막 장소였다.

덕수궁은 원래 조선 제9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고, 그 후에도 월산대군의 후손이 살던 곳이었다. 월산대군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은 세조의 왕세자이자 아버지인 의경세자가 요절하여 당시 4세였던 탓에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고, 삼촌인 예종이 즉위했으나 그 역시 1년 2개월 만에 19살 나이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이때, 월산군의 동생 자을산군의 장인이었던 한명회와 세조비 정희왕후는 월산군의 친동생인 자을산군을 예종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위에 올렸다.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긴 월산군은 왕위에 욕심내지 않고 풍류생활을 하며 35세까지 평화롭게 살았다. 성종 즉위 후, 아버지가 덕종으로 추존되면서 성종 2년 월산대군이 되었다. 성종은 재위기간 25년 향년 37세로 역시 일찍 사망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도성의 궁들이 모두 소실되자 1593년(선조 26)부터 임시 궁궐로 사용하여 정릉동 행궁(貞陵洞 行宮)이라 불렸다. 이후 1611년(광해군 3) 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이 정해지면서 정식 궁궐이 되었다가, 창덕궁이 중건되면서 다시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1895년 경복궁에서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를 잃고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아관파천)했다가 1년만에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이 1897년(광무 1)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황궁에 맞게 규모를 확장하고 격을 높였으며, 궁궐 내 서양식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전통 건축물과 서양식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고, 1907년 일제에 의해 고종이 황위에서 물러나자 궁의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덕수궁의 규모가 대폭 축소되어 대부분의 건물들이 철거되었다. 동시에 공원화가 진행되어 궁궐로서 그 면모를 잃었다. 1946~47년에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덕수궁의 복원이 꾸준히 이루어져 현재에 이르었다.
덕수궁은 조선 역사의 아픔을 깨우치는 슬픈 곳이다. 왜의 침략으로 조선의 궁궐이 소실되자 월산대군의 집은 선조 때 임시 궁궐로 사용되다가 광해군 때 창덕궁 재건 후 별궁인 경운궁으로 불렸다. 조선말 일제 낭인들에 왕비를 잃고 압박에 시달리던 고종이 1897년 아관파천 후 환궁하면서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황궁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미 국운이 쇠한 후라 일제의 압박을 극복하지 못한 탓에,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그의 아들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자 덕수궁으로 불리며, 고종이 죽을 때까지 그의 임종을 지켰던 쓸쓸한 궁궐로 남았다. 일제는 주인잃은 덕수궁의 전각들을 제멋대로 훼손하여 공원처럼 사용했다. 오늘에 이르러 전각들을 복원하며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가꾸고 있으나 여력이 부족해 보인다. 덕수궁 대한문 맞은 편 동쪽 언덕 위에서 조선호텔 뒷정원처럼 초라하게 버티고 있는 환구단을 보면 더욱 할 말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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