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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아방궁과 대당부용원

  아방궁은 西安 서쪽에 있었다는 진시황의 궁전으로 아방촌(阿房村)이라는 한촌(寒村)에 있다. 시황제는 함양궁(咸陽宮)을 비롯하여, 그의 손으로 멸망시킨 육국(六國)의 궁전을 본뜬 육국궁 등 많은 궁전을 지어 미인과 즐겼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셴양[咸陽]의 대안(對岸)에 더 큰 궁전을 지으려고 하였다. 그전에 지은 궁전이 아방궁으로, 규모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동서 약 700m, 남북 약 120m에 이르는 2층 건물로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건설에는 죄수 70만이 동원되었으나 시황제의 생전에는 완성되지 않아 2세 황제에 의해 나머지 공사가 진행되었다. 셴양 부근에 세워진 수백에 달하는 궁전군(宮殿群)은 2층으로 지은 복도와 담장 때문에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길로 종횡으로 이어져 아방궁에서 위수[渭水]를 건너 직접 셴양이나 난산[南山]의 정상에도 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황제들은 그 사이를 오가며 자기의 소재를 비밀로 하였다 한다. 아방궁을 포함한 이 궁전군은 BC 207년 항우(項羽)가 진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불에 탔는데 불길이 3개월 동안 꺼지지 않고 계속되었다고 한다. <두산백과>

 

  호화궁궐의 대명사인 아방궁,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어, 아방궁터가 멀리 보이는 들녘에 아방궁을 세트장으로 꾸며 돈벌이를 하고 있다. 궁안에는 넓은 공연장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 앞마당부터 거대한 인물조형물을 세워 대륙적 풍모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아방궁을 운영하는 주체가 어디인지 관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개인적인 서안 여행자라면 절대 비추이다. 볼 것도 없는 엉성한 세트장에다, 구경거리를 위해 10여 분간의 짧은 공연도 있었으나 유치한 수준이었다. 

 

 

 아방궁 정문앞 마당의 조형물

 

들어가는 입구 계단에서 들여다본 아방궁 내부

 

아방궁 담장 안에도 거대한 조형물들을 세웠다.

 

들어오는 입구방향, 가운데는 커다란 공연장이 있다.

 

본전에 오르는 계단 중간에 시황제상이 우뚝 서있었다.

 

아방궁 꼭대기 본전에서 간단한 공연으로 생전의 시황제의 모습을 재현했는데 유치한 수준이었다. 별 내용도 없는 공연을 보려다 선글라스를 바닥에 떨어트려 렌즈가 깨졌다. 렌즈값이 아까울 정도로 볼 품 없는 공연이어서 씁쓸했다.

 

아방궁 정문앞의 조형물과 입구

 

  원래 당대(唐代) 부용원[芙蓉园] 유적지의 북쪽에 조성된 중국 최초의 대형 황가원림(皇家园林)식 문화테마공원이다. 공원 내 호수 면적이 전체의 1/3을 차지하며, 각종 전시실과 공연장 등의  명소가 있다. 건축물들의 스케일이 매우 크고 호수로 둘러 싸인 주변 경관이 아름다웠다. 단체 관광객들은 후문으로 출입해야 한단다. 정문은 매우 크고 웅장하던데... 후문인 구천문

 

중국엔 역사적 소재들을 공연하는 상품들이 발달된 것 같다. 예전에 갔었던 소주의 송성가무쑈도 거창하고 화려하던데...

 

백희루라는 소공연장, 야외에서 음식을 먹으며 관람하도록 했다.

 

안으로 들어가는 길가에 세운 사슴 같은 용조형물

 

대당부용원 출입문

 

건물의 규모 하나는 대륙의 풍모를 어김없이 보여주는 듯했다.

 

내부의 전시물들

 

  건물의 최상층에서의 후면 전망- 호수 주변의 건물 배치가 일사불란하게 계획적이었다. 호수가엔 낮은 건물들을 짓고, 멀리 울타리처럼 고층건물들을 배치했다.

 

좌중간에 보이는 탑은 그 유명한 대안탑으로 삼장법사가 서역에서 가져온 경전들을 봉안한 곳이다. 삼장법사는 서유기에 나오는 스님인데 실존인물이다.

 

최상층 내부의 전시물

 

중국 명필들의 글씨들을 돌병풍에 새겨 세웠다.

 

 전면 풍경- 망망한 평야에 산은 보이지 않았다. 뿌연 하늘아래 넓고 넓은 들만 이어지고 있었다.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사신들을 맞고 있는 당현종과 양귀비 밀랍인형들을 전시하여 당나라 시대를 재현하고 있었다.

 

대당부용원 뒷문으로 나와 호수를 바라보며 한 바퀴 돌아 나왔다.

 

인공적인 돌산에 안개분수를 설치하여 관람객들의 흥취를 돋구웠다. 낙타는 돈 받고 기념사진 촬영을 하게 하는 상업용이다.

 

  중국인들은 옛 유적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지 않는다고 한다. 유물들을 훼손하지 않는 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인데, 그야말로 만만디 정신이다. 하루아침에 유적들을 감자 캐듯 파내는 우리나라 관계자들의 조급증 내지 성과주의는 깊이 반성해봐야 할 태도이다. 장제스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쫓겨가며 중국의 보물들을 모조리 반출했기에 정작 본토에는 유물이 없다는 이야기도 옛말이 되었다. 공산당 정부 수립 후 발굴된 유물만 해도 엄청난 양이기에 각지에 박물관이 즐비하다. 매장된 유물을 포함한다면 무궁무진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기에 그들은 중화의 대륙적 풍모를 큰 자긍심으로 승화하여 세계 속의 큰 나라로 군림하려는 것이다. 다만 50여 소수민족을 억압하며 모든 것을 견강부회하여 제 것이라 우기는 치졸함을 버리지 못한다면 대륙인의 도약도 옹졸한 졸장부의 만용에 불과할 것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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