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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모로코

   아프리카 북단의 모로코 역시 광활한 땅을 가진 나라였다. 과거 800년간 스페인을 점령하여 이슬람 문화의 융성을 이루었던 그들은 아프리카로 쫓겨온 후, 근세에 이르러 프랑스와 스페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1956년 독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인구 3000여만에 GDP 3000불 정도의 빈국에 머무르고 있다. 넓은 들과 비옥한 토지, 풍족한 농산물 등, 모든 것이 넉넉한 98% 이상의 이슬람 국가지만, 거리에는 궁기가 흘러 서민들의 삶은 그리 넉넉해 보이지 않았다.  탕헤르에서 카사블랑카의 여정도 그리 쉽지는 않았다. 해협을 건너기도 했지만, 작은 도시들과 평원지대를 지나고 지나서 어둠이 내려앉은 뒤에야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로코 원주민인 베르베르 사람들의 고대사는 분명하지 않다. 페니키아인과 카르타고인이 해안에 거점을 만들고 로마인도 한때 모리타니 부근의 해안지대를 지배하였다. 아라비아에서 진출해 온 이슬람 세력이 모로코를 정복한 685년 이후 베르베르족도 이슬람화되어 711년 스페인을 침공하였다. 740년경부터 소왕국으로 분열되었으나 788년 이드리스 왕조가 통일하였다. 11세기에 알모라미드왕조가 마라케시를 수도로 스페인에서 세네갈강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였으나 12세기에 알모하드왕조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13세기에 들어 스페인에서 패배한 이들은 쇠퇴하고, 메리니드왕조가 뒤를 이었다가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중엽에 걸쳐 와타시드왕조가 지배하였다. 이 시대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침략을 받았고 오스만투르크의 압력에도 저항하였다. 

 

  1830년 알제리가 프랑스령이 된 후 모로코는 서유럽 국가의 분할경쟁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1880년대에는 침략의 대상이 되어 1904년 프랑스·스페인의 협상을 거쳐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보호령으로 분할되었다. 모로코의 민족주의는 1921∼1926년 아브드 엘크림의 반란을 계기로 조직화되었고, 다시 제2차 세계대전 후 반(反)프랑스 해방투쟁을 거쳐 1956년 3월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스페인도 모로코의 독립을 인정하고 북부 보호령의 시정권(施政權)을 포기하였다. 또 그해 10월에는 탕헤르, 1958년 4월에는 스페인의 남부 모로코령도 회복하여 입헌군주국 모로코로 통일되었다. 

 

  1961년 사회주의적인 국왕 벤 유세프가 병사한 후 그의 아들 하산 2세가 즉위하였다. 그 무렵부터 모로코는 우익민족주의로 전향하여 모리타니·알제리와 분쟁을 계속하였으나 그 후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또 1969년 스페인령 이프니가 정식으로 반환되었으며, 1976년 4월 스페인령 사하라의 북쪽 반을 병합하였다. 이후 서부 사하라 지역의 병합을 위한 국가적 노력이 진행되고 있으나 UN과 인접 관련국의 반대로 현재 답보상태에 있다. 하산 2세가 사망하자 왕세자인 모하메드 6세가 1999년 7월 즉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탕헤르 인근의 바닷가 주택

 

  인근 도시의 주택가

 

  지중해식 주택 

 

  비닐하우스 너머엔 대서양이 빛나고 있었다.

 

   수도 리바트에 있는 높이 44m의 하산탑과 무하메드 5세의 묘

 

   대서양 해안에 있는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는 페니키아, 이후에는 카르타고와 로마의 무역항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던 도시이며 당시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아랍인들에게 정복당한 이후 이곳은 요새화된 군사 진영이 되었으며, 모로코 최초의 알모아데 왕조 술탄인 압드 알 무민은 12세기 이곳을 스페인 출정의 기지로 삼았다. 그의 손자이며 흑인 노예의 아들인 야쿠브 알 만수르('정복자')는 1184년 권력을 잡았다. 정력적인 통치자였던 그는 스페인으로 더 깊숙이 쳐들어가 기독교 포로들을 데려와, 그가 수도로 삼은 라바트에서 웅대한 건설의 노예로 사역하게 하였다.

 

  그가 지었던 도시 성벽의 일부가 아직도 남아 있으며, 도시의 중앙 관문인 훌륭한 '밥 우다이아' 역시 남아 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야심찬 계획은 '모스크 엘 하산'이었다. 알라르코스에서 스페인인들에게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계획된 이 모스크는 그가 거느린 군대 전체가 들어갈 정도로 크게 지어질 예정이었으나, 야쿠브는 탑이 완성되기에는 너무 이른 때였던 1199년 사망했다. 

 

  모스크에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주요 부분이며, 라바트의 상징이 된 건축물은 '하산 탑'이라는 이름의 미나레트이다. '아름다운 탑'을 의미한다. 붉은 돌로 이루어진 탑은 44m 높이로 솟아 있으나, 당초 계획대로라면 이 두 배의 높이가 될 예정이었다. 여섯 개의 각 층에는 방이 하나씩 있고 건물 안에는 폭넓은 경사로가 위쪽을 향해 올라가게 되어 있는데, 이는 술탄이 말을 탄 채 올라갈 수 있도록 건설되었다. 모스크를 짓기로 원래 예정되었던 부지의 다른 한쪽 끝에는 1960년대에 무하메드 5세의 능묘를 지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산탑을 에워싼 붉은 담장

 

  하산 미나레트 앞에 있는 200개의 기둥은 모스크가 들어서도록 예정되었던 구역이란다.

 

  하산 탑 경내에 있는 모하메드 5세의 영묘

 

  모하메드 5세는 현 모로코 국왕의 조부로서 프랑스 식민지 시대 모로코 왕국의 술탄(1927~1953)으로 지내다가 코르시카에서 2년간 유배생활을 마친 후 귀국해서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여 모로코 국왕(1957~1961)을 지낸 인물이다.

 

  영묘를 지키는 병사, 빨간 제복에 흰 망토가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영묘 안에도 귀퉁이마다 병사들이 있었다. 얼마를 받고 누구를 위해 저리 서있을까. 

 

  영묘의 천정 

 

  내부

 

 묘의 출구에서 내다본 하산 탑

 

  카사블랑카의 호텔 로비. 정면에 국왕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호텔 주변의 야경

 

  무하메드 5세 광장.  카사블랑카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가장 번화한 곳이라고 한다. 시내 관광 및 쇼핑의 기점으로 반원형 돔이 길잡이 역할을 하는데, 광장 중앙의 분수대와 주위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 건물들이 조화를 이룬다. 광장 앞 하얏트 리전시 호텔 1층에 위치한 '바 카사블랑카(Bar Casablanca)'는 할리우드 영화 <카사블랑카>를 미국에서 찍을 때 배경인 '릭스 카페 아메리칸'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단다. 당시 영화 포스터, 주연배우들의 사진들이 1960년대의 복고풍 분위기를 한층 돋워주며 연중무휴 관광객들의 기념사진 촬영 장소로 유명하다. 시 청사가 위치한 이곳이 중심점이 되어 도로들은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중심지역이다. 

 

  하산 모스크. 하산 2세가 1986년에 기공하여 8년 만인 1993년에 완공시킨 거대 모스크로 바닷가 매립지 위에 세웠다. 미나레트의 높이가 210m로 세계 모스크 중 가장 높으며 사원 외부까지 총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슬람 거대 사원이다.  내부의 장식은 스페인의 알람브라 궁전 양식을 따랐다. 이른 아침 동이 터올 무렵의 모스크 풍경.

 

  모스크 맞은편에 있는 학교

 

  모스크 주변의 해안(대서양).

 

  거리의 아침

 

페스로 가는 길에 들린 휴게소

 

  주유소의 주유원이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으란다.

 

  페스. 수도 라바트의 동쪽 160km, 리스 산계(山系)의 남쪽 기슭에 있는 도시. 801년 이드리스 왕조의 제2대 이드리스 2세가 수도로 삼고, 마그레브에서의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후 1276년에 마리 니드 왕조가 새로운 페스를 건설하였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 강가의 옛 도시가 페스알발리, 왼쪽의 새로운 도시가 페스알제디드이다. 대서양 연안의 카사블랑카나 라바트에서 지중해 연안의 알제로 통하는 대상로의 요지로서 독자적인 상공업이 발달되고 있다. 857년에 창립한 이슬람 신학대학과 아랍 문예 중심의 알 카라윈 대학도 있다.

 

  황금으로 장식된 고대 왕궁의 문 

 

  점심을 먹은 식당인데, 내부의 장식이 호사로웠다. 모로코인들은 겉은 허술하게 차려도 내부는 화려하게 꾸미고 사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페스의 거리

 

  8세기 도시로 세계 최대의 미로들이 얽혀있다는 메디나 골목, 외부인이 한 번 들어가면 출구를 찾지 못한다고 했다. 

 

  비둘기 똥을 섞어 염색한다는 테러니 천연 재료 염색장, 입구에서 박하잎을 나눠줘서 무슨 까닭인지 몰랐었는데 비둘기 똥냄새 예방용이었다. 가죽 상점 옥상에서 내려다본 전경.

 

  염색장 전망대 옥상의 가죽 가방 판매점

 

 페스에서 탕헤르로 복귀하는 길, 차창 밖 풍경.

 

  탕헤르 호텔, 이곳에서 1박 후 다시 해협을 건너 타리파로 이동했다.

 

  탕헤르항으로 이동하는데 갑자기 버스 뒤에 아이들이 달라붙었다. 스페인으로 밀항을 꿈꾸는 아이들이란다. 뒤에서 차들이 달려드는데 아이들은 죽고 살기로 버스에 매달렸다.

 

  탕헤르항에서 페리를 타려는 소형 트럭 캠핑카, 내부도 들여다보고 싶었는데 마음만 있었다.  유지비도 들지 않을 다목적으로 쓸 수 있는 경제적 캠핑카였다.

 

  탕헤르 출국심사대에서 바라본 시가지

 

    낮게 내려앉은 구름만큼이나 우중충해 보이는 탕헤르를 별 느낌도 없이 그렇게 떠났다.

 

 모로코에서 2박 3일 만에 다시 스페인의 타리파로 되돌아왔다.

 

  2박 3일 만에 타리파항에서 입국심사와 짐 검사를 받고 스페인에 재입국했다.

 

  날씨가 모로코의 마을들처럼 잔뜩 흐렸다. 모로코에서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스페인으로 다시 들어가는데, 뭘 보고 가는지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없었다. 영화로 유명해서 엄청 낭만적일 것 같던 카사블랑카에도 인상적인 것은 없었다. 그저 밋밋한 평원들과 누추해 보이는 거리 풍경들이 전부였을 뿐이었다. 매우 불쌍한 표정으로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던 어린아이들과 죽고 살기로 버스에 달라붙는 청소년들의 모습에서 가난했던 우리의 어린 시절들이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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