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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寺

속리산 법주사

  오랜만에 찾은 법주사였다. 기나긴 겨울이 끝나는 것을 조금은 아쉬워하는 듯 쌀쌀한 바람이 불었으나, 봄기운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이른 아침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산사를 찾았다. 따스한 햇볕에 밤새 얼었던 땅이 녹아 조금은 질척거렸으나, 다가오는 봄기운이라 생각하면 그것도 고마운 일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경내를 돌아보고 있는데, 문화해설사가 입구 쪽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로 가서 설명을 들으면서 처음부터 다시 관람을 시작했다. 설명을 듣다 보니 건축물마다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전각마다 앞에 놓은 설명문이 있지만 해설사의 설명이 더 쉽게 들리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인지...  어린 시절 방문까지 포함하면 수차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방문이 법주사의 유래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다.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이 창건하였고, 그 뒤 776년(혜공왕 12)에 진표(眞表)가 중창하였다. 절 이름을 법주사라 한 것은 창건주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다. 진표와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모악산 금산사처럼 미륵신앙의 중심 도량이 되었다. 

 

 

  법주사 일주문 현판에 호서제일가람이라 올렸다. 그윽한 산세와 어울리는 큰 절의 풍모가 묻어나는 것 같다.

 

  천왕문 앞에 두 그루의 전나무가 입장객들을 맞고 있었다. 이 전나무들로부터 일직선이 이 절의 중심축이다. 천왕문, 팔상전, 쌍사자 석등, 대웅보전이 일렬로 도열해 있다.

 

  높이 33m의 장대한 청동미륵불과 팔상전

 

  천왕문 뒤에서 올려다본 청동 미륵불, 미래에 우리 중생들을 제도하실 부처님이다. 인자한 눈매의 상호가 매력적이다.

 

 내가 처음 찾았던 1970년대 중반, 이 자리엔 거대한 시멘트 미륵불이 있었다. 본디 이곳에 옛날 산호전(珊瑚殿), 산호보광명전(珊瑚普光明殿), 또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이라 불리던 법당이 있었단다. 이 법당 안에는 신라시대 진표 스님이 조성한 금색의 미륵장륙상이 있어 오랫동안 법주사의 구심적 역할을 해왔었다. 그러나 1872년(고종 9)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복원 차 이 미륵장륙상을 녹여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하는 데 사용하였다. 

 

  이후 1939년 주지 석상(石霜) 스님과 김영곤(金永坤) 거사의 시주에 의해 미륵불 조성불사를 착수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했던 것을 1964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의 시주로 시멘트  미륵불을 세웠는데, 예술성도 떨어졌지만 30여 년간의 풍상 끝에 붕괴 직전에 있었다고 한다.

 

  이에 1990년 주지 월탄 스님과 사부대중들이 불사를 일으켜 높이 33m의 청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완성하였다.  이 미륵불 입상은 통통하고 원만한 얼굴에 머리는 나발로 중앙 계주가 있는 육계를 갖췄다. 머리 뒤의 두광은 투각으로 화염문과 법륜, 화불을 장식하였다. 법의는 통견식으로 걸치고 법의 자락은 상반신에서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로 자연스럽게 흐르고, 하반신에서는 무릎 밑으로 U자형 주름을 이룬다. 대좌는 복련과 앙련으로 구성된 연화대좌이다. 그런데, 이 불상에 청동의 파란 녹물이 흘러내려 보기에 좋지 않아,  2000년에 80kg의 금으로  도금을 했다. 이때 부처님 상호와 손바닥 부분은 두텁게 도금한 덕에 녹물 없는 모습이 되었고, 그 외 부분은 도금이 엷은 탓으로 녹물이 흘러나와 변색되고 있다. 이 미륵부처님 아래 지하에는 건립에 도움을 주신 시주들의 이름이 벽면에 빙 둘러 새겨져 있고, 한가운데는 반가사유상을 본존으로 모신 용화전이 마련되어 있다.

 

 

팔상전 -  현전하는 우리나라 유일한 목탑 형식의 목조 건축물이다. 법주사의 형상이 물 위에 뜬 배의 모양이라 석탑 대신 목탑을 세웠다고 한다. 통일신라 때 만들었으나 돌로 짠 기단부를 제외하고 임진란 때 소실된 것을 임란 이후인 1605년에 새로 짓고 1626년에 중수하였다. 법주사의 법당 앞뜰의 중심부에 서 있는 이 건물은 평면이 정사각형인 단층 기단을 돌로 짜고 사방에 계단을 내었으며 탑신부는 5층의 목조건물로 되어있다. 현대에 이르러 이 목탑을 해체하고 새로 세울 때 부처님 사리와 이 탑을 세우신 사명대사의 사리가 나왔다고 전한다.

  1층 탑신의 사방에는 출입구가 계단과 통하게 되어있고 각 층의 칸수는 1, 2 층이 5칸 3, 4 층이 3칸 그리고 5층이 2칸으로 줄어들었다. 내부에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폭의 그림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八相圖, ‘팔(八)’ ‘팔(捌)’은 같은 글자)가 있어서 팔상전이라 한다.  팔상전 내부는 사방 어느 곳에서나 출입이 가능하며 내부를 한 바퀴 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대규모의 목탑 형식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건물로 주목받고 있다.

  추녀 귀퉁이마다 물고기 모양의 풍경을 단 것은 목조건물이 불에 약하기 때문에 물속에서 유영하는 물고기들을 내걺으로써 화재를 예방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또한, 탑 1층 추녀 아래 네 귀퉁이마다 용머리가 조각되어 용들이 이 목탑을 휘어 감아 용꼬리가 5층 추녀 위로 올려 갔는데, 이 또한 화재를 막기 위한 구조적 배려라 했다.   

  수백 년이 지난 나무들이 서로 정교하게 맞물려 풍상 속에 도우뚝 서 있는 것이 대견스럽다. 화재로 망실됐다 복구되었으나 비리로 얼룩진 숭례문을 생각하면 보존에도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것 같다. 비록 단청이 낡아 나무들의 거친 무늬살들이 드러나 있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 목재들의 아름다움이라 생각하면 볼수록 대견스러웠다. 

 

 

  팔상전 풍경 너머, 쌍사자 석등과 대웅보전 

 

  쌍사자 석등

 

  사자 석등에서 본 범종루와 팔상전 부분

 

  대웅보전, 모악산 금산사와 같은 공법으로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외형으로는 2층 구조이지만, 안에서 보면 일이 층이 통합된 하나의 구조이다.  내부가 촬영 금지 구역이라 사진을 찍지 못했는데, 팔상전과 마찬가지로 임란 때 소실된 것을 전란 후 중건한 것이다.  사진 찍으면 뭐라도 훼손되는지, 잔존하는 권위적 태도가 못마땅하다. 플래시 발광 촬영만 금하면 될 것 같은데... 

 

 

  대웅보전 앞, 오른쪽 전각이 원통보전이다.

 

  원통보전 옆에 있는, 향로를 이고 있는 보살상. 오랜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제대로 보존했더라면 섬세한 흔적들을 좀 더 볼 수 있었을 것을... 

 

  오른쪽부터 천왕문과 팔상전, 대웅보전

 

  왼쪽부터 천왕문 팔상전 범종루

 

 법주사 발치, 아랫녘 돌에 새겨진  마애불

 

  마애불 근처에서 바라본 원경, 세속을 떠난다는 속리산 이름만큼이나 풍광이 수려하다.

 

 

  언 땅을 녹이는 봄바람이었지만, 아직은 그 쌀쌀함에 귓불이 차가웠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법주사를 떠났는데, 속리산 주봉인 문장대와 천왕봉이 멀리 바라보였다.  몇 년 전 등반 때, 눈이 내리고 날씨가 흐린 탓에 아름다운 주변 경치를 제대로 보지 못했었는데, 날씨가 풀리고 여유 있어지면 다시 한번 도전해보리라 마음먹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산사 아래 상가에서 하룻밤 숙박하고 식사를 했는데, 밥값이 장난이 아니었다.  평일이라 모텔의 숙박료는 저렴했으나 식사비는 최하 8000원이었다.  메뉴도 서로 엇비슷해서 선택의 폭도 넓지 않은 것이 흠이었다. 아무래도 관광지라 물가가 비싸다지만, 보다 서민들에 마음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친숙한 곳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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