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천으로 유명한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에 봄볕이 찾아들었다. 따스한 햇살 따라 행락객들도 따라 들어 봄기운이 넘치고 있었다. 70년대 후반, 직장 동료 따라 처음 들렸던 수덕사였는데, 그간 수차례의 변신을 거듭한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 한 때 거대한 돌계단을 쌓아 빈축을 샀었는데, 세속의 배금주의 상징 같던 돌계단이 없어지고 옛 모습으로 회귀했지만, 초입 거대한 황하정사 전각이 가로막고 있어 그때를 완전 벗지는 못한 듯싶었다. 다행히도 입구까지 늘어섰던 여관들과 식당들을 한 곳에 모아 보기에 좋았다. 90년대쯤에 스리랑카에서 모셔 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처음 친견한 곳이 이곳이기도 했다. 그때 임시로 황하정사 안에 부처님 사리를 모셔놓고 참배객들에게 공개했었다. 유리잔에 담긴 부처님의 빨강 빛 진신사리가 어찌나 영롱했었는지 눈이 부셔서 바로 볼 수 없을 정도였던 기억이 새롭다. 그 진신사리 3과는 이제 대웅전 아래 새로 건립한 금강보탑 속에 모셔져 있다.
'수덕사의 여승'이란 노래로 유명했던 곳, 한 때 춘원을 사랑했었다는 일엽이 스님 되어 만년을 보냈던 곳으로 유명세를 치렀던 곳이었는데, 이젠 그 이야기 대신에 동백림 간첩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응로 화백의 유적과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 시절 이응로 화백의 글자 그림 중 '조선 노동당 만세(?)'로 기억되는 작품을 사진과 함께 보도한 신문의 기사를 읽었었는데, 그 작품의 진위여부는 지금도 모르겠다. 동백림 사건이 조작되었다면 그 작품도 왜곡 보도된 것이었을 텐데 아직까지 정정하거나 수정한 기사를 읽은 기억이 없다. 조작된 간첩 누명으로 고문을 당하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 그 심정은 어땠을까 생각하면 너무나 끔찍해서 몸서리 쳐진다.
수덕사는 백제 때 고승 지명이 처음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대웅전은 안동 봉정사 극락보전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고려시대 건물로 국보 49 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7년 이곳을 수리할 때 1308년이라는 건물의 건립연대를 알게 하는 글씨가 발견되었다. 근세인 조선 고종(高宗) 2년에 만공(滿空)이 중창한 후로 선종(禪宗) 유일의 근본도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
황하정사 누각 아래 전경
황하정사 뒤 측면에서 올려본 대웅전 축대
황하정사 옆에 있는 성보박물관
범종각 축대 끝에서 내려다 본 황하정루 뒷면
고려시대 1308년에 건립된 대웅전, 맞배지붕의 목조건물이다.
연등 가운데 솟은 탑이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품은 금강보탑이다.
대웅전 맞배지붕, 주심포와 배홀림 기둥. 배흘림기둥은 아래에서부터 점점 굵어지다가 사람 키 정도 높이에서부터 다시 가늘어지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건물의 기둥과 지붕을 연결하는 공포의 구조가 주심포를 취하고 있다.
주심포란 기둥 사이사이 공포가 놓이는 다포 구조와 달리 기둥 윗부분에만 공포가 놓이는 형태를 말하는데 부석사 무량수전 등에서와 같이 고려시대의 건물에서 찾아볼 수 있는 구조이다. 대웅전 측면을 보면 기둥이 놓이고 그 위에 대들보와 종보가 차례로 놓여 있는데 기하학적인 구조가 마치 한 편의 그림처럼 보인다.
관음전 앞의 관음바위와 관음보살
관음전 앞 풍경, 왼쪽 대웅전과 오른쪽 백련당
대웅전 측면 기둥의 무늬, 고려시대부터 이어온 700여 년이 넘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관음바위에 동전을 붙이는 사람들, 과거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풍속도이다.
백련당 옆의 쌍사자 석등, 그 아래가 황하정루
황하정루 측면과 대웅전 축대
일주문 옆 개울 건너에 있는 수덕여관, 이응로 화백의 아내가 운영했다는 곳이다.
수덕여관 뒤뜰에 있는 이응로 화백이 새긴 암각화 두 점
수덕 여관 아래 수덕사 선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