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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익산 미륵사지

교과서에서만 보던 반쯤 부서진 모습의 백제미륵사지 석탑을 보러 익산에 갔다.  미륵사지 주차장으로 들어서며, 거대한 철골집과 새로 세운 석탑을 지나쳤는데 전래되던 석탑은 해체되어 보수 중이었다. 넓은 주차장을 지나 미륵사지 경내에 들어서자, 그 넓은 부지에 놀랐다. 박물관을 왼쪽으로 지나니 여기저기 해체해 놓은 커다란 돌덩어리들이 놓여있었다. 어떤 것은 길가에, 또 어떤 것은 철골막사 옆 노천 선반에 있었다. 모두가 석탑에서 나온 석재들은 아니다 싶었다. 석탑을 해체한 곳에 임시로 지은 철골 건물에 들어가니 옛 석탑의 자리에 주춧돌 하나만 덩그러니 놓였다. 건물 뒷문으로 나서자 옛날 미륵사가 앉았을 자리 뒤에 우람한 용화산이 떠억 버티고 서있었다. 미륵산 앞에 미륵사는 9층 목탑을 가운데 두고 좌우 양쪽에 석탑의 옹위를 받으며 서있었을 터였다. 미륵사지 드넓은 경내를 요리 저리 거닐며 옛날 백제 시대 웅장했을 절집들을 상상해 보았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창건하였으며, 삼국시대 절 가운데 백제의 절로는 최대의 규모라고 한다. 백제 무왕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행차하였을 때 용화산(龍華山) 아래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났으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하였다. 왕비가 왕에게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청하였으므로 지명법사(知命法師)의 도움으로 못을 메워 절을 창건하였다.

 

 이 절에는 미래불인 미륵이 3회의 설법으로 미래의 중생을 모두 제도한다는 용화삼회설(龍華三會說)에 입각하여 전(殿)과 탑과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하였다고 한다. 또 이 절터는 무왕의 어릴 때인 서동(薯童)과 선화공주(善化公主)의 설화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창건 이후 역사는 자세하지 않으나, 719년(성덕왕 18) 9월 금마군(金馬郡)의 미륵사탑에 벼락이 떨어졌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전한다. 이는 미륵사의 탑에 벼락이 친 것을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조선조 1407년(태종 7) 나라에서 여러 고을의 자복사찰(資福寺刹)을 정할 때 충청북도 청주의 보경사(菩慶寺), 전라북도 임실의 진구사(珍丘寺) 등의 여러 사찰과 함께 자복사찰로 지정된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는 사찰이 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륵사지 입구

 

 박물관

 

 해체 된 석탑과 복원된 동쪽 석탑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이 해체된 현장

 

 뒤편의 용화산과 절터

 

1992년 절터 주변에 흩어진 옛 석재들을 일부 재사용하여 복원한 동탑(東塔)

 

 

 

 

 동탑(東塔) 앞 전경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당간지주(彌勒寺址幢竿支柱)와 용화산

 

 미륵사지 전경 

 

 박물관 내부- 해체될 때 발견한 사리장엄 전시장

 

 미륵사의 옛 모습

 

 

 금동제 사리 바깥 항아리

 

 

 전시 중인 사리

 

  미륵사 9층 목조탑 모형

 

절터는 사적 제150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의 아버지 맛둥 무왕과 어머니 신라 선화공주가 세운 절이라는 이야기에 그들의 사랑이  1500여 년의 세월을 건너 들려오는 듯하다. 가까운 곳에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으로 추정되는 쌍릉이 있다고 한다. 나그네의 발길은 저절로 그리로 향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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