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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광릉

  남양주시 진전읍 부평리 산 100-1 소재 광릉은 나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 세조의 묘이다.  권력욕에 눈이 먼 수양대군은 모략가인 한명회와 손잡고 계유정란을 일으켜 김종서를 비롯한 단종의 측근들을 무참히 살육하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왕위를 빼앗은 후, 단종복위 운동이 일어나자 성삼문을 비롯한 충신들을 참살하고, 영월로 귀양 보냈던 단종의 목숨마저 빼앗는 등, 패륜을 서슴지 않았다.

 

  칠삭동이에다 능참봉에 불과했던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지략가가 되어 계유정란의 일등공신이으로 권력을 장악하였고, 자신의 딸들을 세조의 아들과 손자에 시집보내는 등 자신의 권력기반을 더욱 탄탄히 하였다.  세조의 둘째 아들이었던 예종의 왕비였던 딸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일찍 요절하였고, 예종 역시 즉위 14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왕이 되지 못하고 요절했던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에게 딸을 시집보냈던 한명회는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와 밀약을 맺고, 의경세자 둘째 이들이었던 사위를 왕위에 올렸다.  그 덕으로 한명회는 성종의 장인이 되어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였으며,  13세의 성종을 세조의 비였던 정희왕후는 7년간 섭정으로 수렴청정을 하며 권력의 달콤한 맛을 보았다. 그러나, 성종의 원비였던 딸 역시 후사도 없이 요절하고 말았다.

 

  광릉은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봉안하고 두 능의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식인 동원이강(同原異岡)릉으로서, 이러한 형태의 능으로는 최초로 조영되었다.  좌측 능선의 봉분이 세조의 능이며 오른쪽의 봉분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광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간소하게 조영되었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세조의 유언에 따라 이전까지 석실로 되어 있던 능을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부역 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비용을 절감하였다. 또한 봉분 주위에 둘렀던 병풍석을 없애면서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은 난간의 동자석주에 옮겨 새기는 등의 상설 제도를 개혁하였다. 능하구역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참도가 생략되어 있다. 이렇게 간소하게 개혁된 상설제도는 이후의 왕릉 조성에 모범이 되었다.

 

   광릉자리는 원래 다른 이의 묘자리였으나 풍수상 길지라 하여 묘자리의 주인이 세조에게 바쳤다고 전해지며 일부 풍수가들은 세조의 광릉 자리가 좋아 조선 500여 년을 세조의 후손들이 통치하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1468년(예종 즉위) 11월 28일 주엽산 아래 세조를 예장하고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483년(성종 14) 3월 30일 정희왕후가 승하하자 같은 해 6월 12일 광릉 동쪽 언덕에 예장하였다. 

 

  이번에 올라간 곳은 세조의 비였던 정희왕후의 능이었다.  홀수날은 세조의 능을, 짝수날은 왕비의 능을 개방한다.

 

  정희왕후의 능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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