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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김좌진 장군 생가

 홍성 IC 부근에 있는 백야 김좌진 장군(1889년 12월 16일 ~ 1930년 1월 24일) 생가를 알리는 이정표를 지나칠 때마다 마음에 걸렸기에 이번엔 큰맘 먹고 찾았다. 의외로 장군의 생가는 이정표에서 가가운 곳에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에 방문했어야 하는데... 그런데 이번 방문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나 보았다. 폐장 시간에 늦지 않는다고 부랴부랴 서둘러 다섯 시 이전에 도착했는데 네시반이 폐장 시간이란다. 마침 입구에서 문을 닫고 나오는 관리인을 만났는데, 우리더러 생가만 얼른 보고 나오란다. 그것도 고마워 얼른 안으로 들어가 장군의 생가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생가라야 옛터에 복원한 게 전부이겠지만, 존경하는 장군이 생전에 태어나신 곳이라 그야말로 감개무량했다. 뒤따라온 관리인에게 이것저것 물었더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장군의 행적을 줄줄이 말씀해 주셨다. 안동김씨 부유한 호족의 아들로 일찍이 15세 때 집안의 노비분서를 불태워 종들을 해방시키고, 이 일대에 있었던 장군 집안의 토지를 소작인들에게 분배하여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어린 나이에 실천하셨다고 한다. 그 후 광복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만주로 건너가 항일운동에 참여하셨다. 마침내 1920년 10월 청산리에서 일본군 3000여 명을 살상하는 대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그 후 장군은 1930년 1월 24일 영안현 산시역에 있는 자택 앞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암살당했다.

 

  충남 홍성은 그야말로 충절의 고장이다. 백야 김좌진 장군을 비롯하여, 매헌 윤봉길 의사, 만해 한용운 선사가 모두 이곳에서 태어나시고 성장하셨다. 일제의 핍박 속에 나라 잃은 암흑의 하늘 아래, 자신을 돌보지 않고 조국의 독림을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바쳐 조국해방을 위해 일제와 투쟁하신 분들. 참으로 거룩하신 분들로 겨레의 영원한 스승이시다.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6-4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 

 

 대문 왼편 측면에 있는 마굿간

 

  행랑채 안에 있는 살림집, 부엌과 작은 방이 두 칸, 대청마루, 사랑방으로 구성되었다. 안방이었을 작은 방 두 칸에 장군의 항일운동하시던 사진이 걸려있었는데, 오래된 것을 복제한 것이라 조악했다. 

 

"청백을 전하는 집안은 800년에 이른다."는  글귀가 장군의 성품을 전하는 것 같아, 있는 자들의 갑질행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현실에 코끝이 찡해졌다.

 

 

생가 오른쪽에 있는 백야 기념관, 이미 문이 잠겨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관리인이 대신 생가 뒤편 언덕 위에 사당과 공원이 있으니 그리로 가보란다.

 

 생가 뒤편 언덕에 조성된 장군을 기리는 사당 앞의 백야사정비.

 

주차장까지 마련한 넓은 땅에 비석과 장군께서 운명하실 때 남기셨다는 "할 일이...  할 일이 너무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  "라는 유언이 새겨진 기림석이 있었다.

 

 

잠겨있어 들어갈 수 없었던 사당 담장 안, 중문 너머가 사당인 '백야사'이고, 오른쪽이 '와룡재'이다.

 

  사당 옆에 있는 공원, 장군의 유년 시절, 청년시절, 독립투쟁하던 시절을 재현한 동상 5기가 있었다.

 

  장군의 어린 시절을 표현한 '유년의 꿈' 동상

 

  대일항쟁을 형상화한 장군 동상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친일행적들을 거짓으로 덮고서 오히려 그들을 미화하며 참으로 오도하는 무리들, 친일로 흥한 자들, 이곳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해야 하겠다.  암흑 시절에 일제에 아부하여 일가의 영화를 탐했던 자들의 후손들이 오히려 사회의 지도층이랍시고, 간사한 세치 혀로 세상을 기망하는 행위들이 가슴을 친다.

 

 Photo by Sony a6000, ILCE-6000L/B. E PZ 16-50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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