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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향기

안동 이육사문학관

  청량사에서 내려와 도산서원을 목적지로 안동으로 향했다. 역시 구불구불한 도로였는데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다. 굽은 길을 돌아 돌아 나가는데, 문득 이육사문학관 안내판이 보였다. 그리고 보니 이육사의 고향이 바로 안동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시 청포도와 함께 떠올랐다.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대부분의 문인들이 간사한 한 치 혀로 조선인들을 일제에 순치시키려 일제에 아부하며 일신의 영달을 꾀하고 있을 때, 육사는 한 평생을 일제에 대항하여 맞서 싸웠다. 그는 시와 행동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서 싸우다가 1943년 일제에 피검되어 해방의 감격을 누리지도 못하고 1944년 1월 16일 북경감옥에서 옥사하고 말았다. 일제 강점기 아래 자신보다 조국의 미래를 생각하며 글을 쓰신 몇 안 되는 문인으로 만해 한용운 스님, 윤동주 시인이 있다. 그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 업적인지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도 큰 가르침을 주시는 겨레의 스승님들이시다.  

 

  이육사 문학관으로 가는 길에 길가에 퇴계종택과 문학관 가까운 고개아래 퇴계선생의 묘소를 지났다. 문학관에 들어서서야 안 일이지만, 이곳이 퇴계선생의 마을이라 행정구역 자체가 도산면이었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 퇴계묘소와 종택을 들린다는 것을 깜빡 잊고 지나치고 말았다. 다음에 볼 거리를 남겨놓아야 또 한 번 가볼 것이라 위안 삼았다. 문학관에 도착하여 입장료 2000원을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전시된 물품은 대부분 사진판넬들이어서 감동이 적었다. 뭔가 급조한 듯한 느낌으로 진실성이 부족해 보였다. 안동시에서 운영한다는 문학관에서 입장료를 받는다는 것도 어색한 것 같고... 좀 더 정성스럽게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보고 감동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으면 좋겠다.  2층 영상실에서 프로젝터로 보여주는 육사에 관한 짧은 영상물을 한 편 보았으나 그것도 못내 아쉬운 대목이었다. 문학관마다 구성과 전시물이 천편일률적이다. 나름 독창적이고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들이 있을 텐데... 문학관 뒤뜰엔 육사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었는데, 역시 사람들의 손때가 묻지 않은 세트장 분위기라 감동스럽지 못했다. 그러나, 위대한 시인이자 독립투사였던 시인이 사시며 숨 쉬었을 공간을 느껴본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내겐 벅찬 감동이었다.  

 

 이육사문학관

 

  문학관 초입

 

  육사 흉상

 

 

 

 

  문학관 두 번 째 방에 전시한 훈장증, 육사의 이름보다도 몇 배나 크게 써진 이름을 보니 오히려 고인을 욕되게 하지는 않을는지 염려스러웠다. 독립투쟁을 하면서 온갖 고통과 맞서다 옥사한 육사 영전에, 녹이 슬어 도금 바랜 저 훈장은 과연 얼마나 위로가 될 것인지. 오히려 고인에게 송구한 마음이 들었다.

 

  역시 그 옆에 추서된 건국훈장 애국장

 

  또 다른 포장증과 국가유공자증. 더더욱 민족사의 비극이자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녹슨 수저 한 벌이 애처로워 보였다. 무슨 논리로 설명해야 이 모순을 극복할 수 있을까...

 

  2층으로 오르는 통로

 

  2층 전시실

 

 복원된 육사의 생가 육우당

 

 

 

  문학관 앞을 흐르는 들판과 낙동강 한 구비, 청포도가 익어가던 고향마을이었다. 문학관 주변에 청포도를 심어 육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했더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에 육사시인이 바라보며 살았던 곳이라 생각하니 감개무량하였다.

 

  이육사 시인의 본명은 원록(源綠)으로, 1904년 4월 4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서 태어났다.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대구 교남학교에서 잠시 수학했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 가입, 그 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의열단의 사명을 띠고 북경으로 갔다 1926년 일시 귀국, 다시 북경으로 가서 북경사관학교에 입학, 이듬해 가을에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좌, 3년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이때 그의 수인(囚人) 번호가 264번이어서 호를 육사(陸史)로 택했다고 전한다. 1929년에 출옥, 이듬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곳 북경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하면서 만주와 중국의 여러 곳을 전전, 정의부(正義府)‧군정부(軍政府)‧의열단(義烈團)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독립투쟁을 벌였으며, 노신(魯迅)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33년 9월 귀국하여 이때부터 시작(詩作)에 전념, 육사란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의 첫 작품은 1935년 『신조선』에 발표한 「황혼」이었다. 

 

  1934년 신조선사 근무를 비롯하여 중외일보사, 조광사, 인문사 등 언론기관에 종사하면서 시 외에도 한시와 시조, 논문, 평론, 번역, 시나리오 등에 손을 대어 재능을 나타냈다. 1935년 시조 「춘추삼제(春秋三題)」와 시 「실제(失題)」를 썼으며, 1937년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자오선』을 발간하여 「청포도」, 「교목」, 「파초」 등의 상징적이면서도 서정이 풍부한 목가풍의 시를 발표했다.

 

그의 시 발표는 주로 『조광』, 『풍림』, 『문장』, 『인문평론』을 통하여 1941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시작활동 못지 않게 독립투쟁에 헌신하여 전 생애를 통해 17회나 투옥되었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광야」와 「절정」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시는 식민지하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저항 의지를 나타내고,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1941년 폐를 앓아 성모병원에 입원, 잠시 요양했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1943년 초봄 다시 북경으로 갔다. 그 해 4월 귀국했다가 6월에 피검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어 수감 중 북경의 감옥에서 옥사했다. 해방 후인 1946년 『육사시집』이 발간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육사 [李陸史]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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