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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향기

반가사유상

 국립중앙박물관 삼층 불교조각전시장 독립된 공간에서 볼 수 있는 반가사유상,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을 때는 꼭 이곳을 방문하여, 반가사유상의 오묘한 미소를 느껴보곤 한다. 이번 방문엔 화려한 관을 쓴 78호 사유상 대신 내가 좋아하는 삼산관을 머리에 인 83호 반가사유상이 있어서 그 의미가 남달랐다.  마침 박물관 문화해설사의 설명도 함께 듣게 되어 더더욱 좋았다.  

 

  이 반가사유상은 작년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전시되어 미국 유력 언론들의 관심을 받았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앉은 자세지만 정적이지 않고,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면서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모습"이라고 소개하는 등, 뉴욕타임스 등도 찬사를 이어갔다.  한 때, 문화재청은 문화재 훼손 우려를 이유로 '반가사유상 반출 불가' 입장을 표명했지만, 국립중앙박물관과 미국 박물관 측이 포장·운송과정에서 전시품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조건으로 국외 반출을 재요청해왔고, 결국 문화체육 관광부가 중재에 나서면서 반가사유상 등 신라 유물의 미국행이 성사되었다. 내 생각에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걸작으로 꼽는 사람들의 눈에도 이 반가사유상의 오묘한 표정과 자세야말로 최고의 명상미를 보여주는, 조각의 진수를 느끼게 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우리나라 불교 예술품을 대표할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이며, 일본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과 형상이 흡사하여 한일고대불교조각교류 연구에도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하다.

 

  반가사유상은 왼쪽다리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린 반가한 자세에 오른뺨에 오른쪽 손가락을 살짝 대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자세이다. 이러한 형식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여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으로 인도의 간다라, 중국의 남북조 시대 불전의 부조에 종종 등장한다. 중국에서 반가사유상은 5-6세기에 주로 만들어졌으며 태자상(太子像), 사유상(思惟像), 용수상(龍樹像) 등의 명칭으로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6-7세기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일반적으로 미륵으로 간주된다. 우리나라 반가사유상은 이후 일본의 아스카, 하쿠호 시대 반가사유상에 영향을 끼친다.

 

  우리나라에서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로 보는 인식은 신라에서 성행했는데, 신라에서는 전륜성왕(轉輪聖王- 세계의 중앙에 솟아 있다는 수미산(須彌山)의 바깥쪽 동서남북에 있는 승신(勝身), 섬부(贍部), 우화(牛貨), 구로(俱盧)의 네 주(州)의 세계를 통솔하는 대왕. 몸에 32 상(相)을 갖추고, 즉위할 때에 하늘로부터 금, 은, 동, 철의 네 윤보(輪寶)를 얻어 이를 굴리면서 사방을 위엄으로 굴복하게 한다고 한다.) 사상의 유행과 더불어 화랑을 미래의 구세주인 미륵의 화신으로 여기었기 때문에 미륵보살로 불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로 부르는 것은 문헌적 근거가 약하여 반가사유상으로 부르는 것이 보다 무난하다.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크기가 93.5cm로 금동반가사유상 중에 가장 크면서 가장 아름답다. 단순하지만 균형잡힌 신체,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묘사된 옷주름, 뚜렷한 이목구비, 정교하면서도 완벽한 주조기술, 여기에 얼굴에 흐르는 잔잔한 미소는 종교적 의미를 뛰어넘어 숭고미를 더해준다.

 

  머리에는 세 개의 반원이 이어진 삼산관, 또는 연화관을 쓰고 있다. 관의 표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어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데,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창적인 형식이다. 풍만한 얼굴에 눈썹선은 길게 호를 지으며 콧선으로 이어지는데, 작지만 길게 묘사된 눈은 끝이 살짝 올라가 다소 날카로운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이를 무마하듯 단정하게 다문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미소를 짓는 모습이 신비감을 느끼게 한다.

 

  벌거벗은 상체는 가슴근육이 살짝 도드라지고 허리는 잘륙한 형상이다. 오른쪽 얼굴에 대고 있는 손가락은 움직임을 표현하여 율동감이 있으며 이와 대칭되듯, 위로 올린 오른발의 발가락은 잔뜩 힘을 주어 구부린 모습이 생동감을 더한다. 오른팔은 무릎을 위로 살짝 들어 팔꿈치를 받치고 팔에서 비스듬히 꺾어 살짝 구부린 손가락을 통해 뺨에 대고 있어 치밀한 역학적 구성을 보여주며, 살짝 숙인 얼굴과 상체로 유기적으로 이어준다. 

 

  일제강점기에 발견된 이 반가사유상은 출토지가 정확하지 않아 신라작과 백제작으로 보는 견해가 분분하다. 다만 일본 교토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과 유사하여, 일본국보 1호인 반가사유상의 원목이 경상도지방 적송임을 감안할 때 신라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일본서기 623년조에 신라에서 가져온 불상을 고류지에 모셨다는 기록도 있어, 이 기록의 불상을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블로그에서 발췌>

 

 

국보 제 78호 반가사유상 - http://fallsfog.tistory.com/40

 

반가사유상

연화관을 쓴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을 보기 위해 중앙박물관에 갔었다. 작년에 국보 제78호 반가 사유상을 봤기 때문에 1년마다 교체된다는 얘기를 듣고 박물관 3층 불교 조각실에 갔던 것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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