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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향기

수원 나혜석 거리

 그동안 불륜의 신여성 이미지만 부각되어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나혜석의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그녀는 신여성이자 독립운동가였고 재능 있는 예술가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지난 1999년 ‘제1회 나혜석 바로 알기 심포지엄’이 열린 이후 이듬해 2월에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며 그동안 가려졌던 진면목들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그녀를 다시 돌아보게 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출생지 수원시에서는 팔달구 인계동 효원공원부터 서쪽 600m 거리에 ‘나혜석거리’를 만들었다.

 

 나혜석(1896.4.18 ~ 1948.12.10) 수원 출신의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우리나라 대표적인 신여성이다. 개화이후 일본을 통해 서구의 신문명을 받아들이던 우리의 신지식인들이 망국의 현실 속에서 봉건적 사고와 신문명의 가치관 속에서 혼란을 겪고 방황을 하던 무렵, 나혜석도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본에 유학하여 그림공부를 했다. 그림공부를 하면서 서구의 여성해방사조에 편승한 그녀는 기혼자였던 오빠 친구 최승구의 연인이 되었다. 최승구가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3.1 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3월 25일 이화학당 학생 만세 사건에 관여하여 5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나혜석은 모순된 현실과 타협하는 길을 선택하게 되고 일본 유학생이었던 교토제국대학을 다니던 친일파 김우영(金宇英)의 6년 구애를 받아들여 1920년 4월 서울에서 결혼했다. 1921년 3월에는 경성일보사 내청각(來靑閣)에서 조선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유화 개인 전람회를 열었었다.

 

  1926년 남편 김우영과 함께 3년간의 유럽 일주 여행 도중 천도교 신파의 우두머리였던 최린(崔麟)을 만나게되고 김우영과 절친한 친구사이였던 최린은 나혜석과 불륜의 관계로 발전하고 결국 나혜석은 김우영에게 이혼을 당하였다. 결혼생활 실패 후 화가로서의 삶에 더욱 매진한 나혜석은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정원'으로 특선하고 이 작품으로 일본에서도 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 입선하였다. 1935년 10월 서울 진고개(충무로) 조선관에서 개최된 소품전의 실패와 아들 선이 폐렴으로 죽은 후 나혜석은 불교에 심취한다. 승려생활을 매력을 느껴 수덕사 아래 수덕여관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불교에 심취했으나 불가에 귀의하지는 않았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한때 청운양로원에 의탁하기도 하였으며 1948년 12월 10일 시립 자제원(慈濟院)에서 사망하였다. 1918년 《경희》 《정순》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소설가로도 활약하였다. 대표적인 회화작품으로는 《나부 1928》, 《선죽교 1933》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수원시 인계동 나혜석 거리 입구  

 

 거리의 양쪽에는 대부분이 음식점과 술집이다. 이들 가게의 출입문이나 담벼락에는 나혜석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낮에는 조용한 일상의 거리에서 밤에는 환락의 거리로 변하는 모습들이, 신여성으로서 나혜석이 가치관의 혼란을 겪은 것처럼, 미묘한 감정들을 교차시켜 주었다. 이곳이 나혜석 거리로 지정된 것은, 거리의 아래 블럭이 경기도 문화예술회관이 있기 때문일 게다.

 

 거리의 한 가운데 신여성 나혜석이 화구통과 스케치북을 들고 서있다. 당시의 말대로 모던한 신여성의 모습이다. 

 

거리의 끝부분엔 한복을 입고 조신하게 앉아있는 나혜석의 모습이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한복 저고리에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주로 학교 선생님)들이 더러 있었는데 요즈음엔 거의 보지 못했다. 

 

  신여성에대한 부정적 인식은 김동인(金東仁)에 의해 더욱 왜곡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김동인은 《문장》 2집에 1939년 3월에는 <김연실전>으로, 5월에는 <선구녀(先驅女)>, 1941년 2월에는 <진주름>이라는 제목으로 3회에 걸쳐 발표했다. 이 작품은 당시 신여성 문학인이었던 김명순(金明淳)을 모델로 하여 한 신여성의 성장과정을 통해 개화의 물결과 자유연애의 이름 아래 도덕적으로 타락해 가는 사회와 인간의 모습을 풍자하고 희화화하였다.  김연실은 평양감영 이속이었던 김여찰의 소실 출생으로 적모(嫡母)의 천덕꾸러기로 성장한다. 이러한 집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명소학교에 입학, 신학문을 배우고 그 학교가 문을 닫자 일본어를 배워 동경유학길에 오르고자 한다. (나혜석은 진명여자고등학교 졸업) 이때 일본어 개인교사에게 처음으로 정조를 빼앗기지만 남녀관계나 연애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그 뒤 동경에 가서 예술과 문학에 눈을 뜨고 문학과 연애를 불가결한 관계로 파악한 그녀는 자의적으로 유학생들과 문란한 연애를 벌이며 선각자적인 의식에 사로잡힌다. 귀국 후에도 여류문사로 활동하면서 다시 여러 남자들과 무절제한 연애생활을 누리지만, 결국 정신적 · 육체적 몰락과 더불어 문학과 연애의 상실, 경제적인 궁핍에까지 이르고 만다. 이처럼 몰락한 연실은 어느 날 셋방을 얻으러 갔다가 이제는 복덕방 영감이 된 옛날의 일본어교사를 만난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신여성의 참된 임무나 구실을 오해하고 자유연애라는 잘못된 행태에만 빠져 타락하고 마는 연실의 삶을 반어적 양상으로 그린 것이다. 그와 더불어 가부장적 봉건가족제도에 얽힌 처첩의 문제, 반상계급의 이동, 적서의 문제 등을 통한 조선 말기 사회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으며, 초기 동경유학생들의 무절제한 연애생활, 초기의 조선문단 등이 사실적으로 그려지면서 풍자되고 있다.
 

 

출처 : 국어국문학자료사전, 이응백ㆍ김원경ㆍ김선풍 교수 감수, 한국사전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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