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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향기

석정 문학관

 

 부안에서 김제로 오는 국도는 고속도로보다 더 좋았다. 막힘없이 곧게 뻗은 도로에 아스팔트 포장까지... 게다가 아침에 차량통행도 그리 많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쾌속주행했다. 자동차도 시원스레 쭉쭉 앞으로 나아가 친구에게 "엄지 척" 차성능을 추켜세웠다. 연식이 좀 지나긴 했으나 액셀을 밟으면 밟은 만큼 반응이 빠르고 잘 나갔다. 격포에서 동쪽방향으로 달리는 경로여서 아침햇살에 눈부셨지만 미세먼지가 안개처럼 몰려들어 제법 몽환적 분위기를 보였다. 황사도 아닌, 그 자잘한 미세먼지에 근심걱정을 한 것은 그리 오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어린 시절 코끝이 따가울 정도로 차가운 겨울바람과 바람까지 보일 것 같이 청명하고 눈부시던 햇살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뿌연 시야처럼 불투명한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현대인들의 고달픔이 이른 아침 남녘의 도로를 달리는 동안 오히려 낭만적으로 생각되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발가숭이로 가릴 것 없이 뒹굴며 자랐던 친구들... 이젠 반백이 되어 성글어진 머리카락과 탄력 잃은 살갗에, 옛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변해버렸지만, 어린 시절의 추억들은 바로 엊저녁 일만큼이나 생생하고 또렷했기에, 함께하는 여행도 즐겁고 유쾌했다.

 

 신석정 시인이 부안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목가적인 전원시인으로 교과서에서 읽었던 시인의 "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라는 싯구절이 떠올라 돌아오는 길에 들린 곳이었다. 시인의 문학관은 깔끔하게 정리 정돈되고 성의 있게 전시되어 급조해서 꾸며낸 다른 문학관보다 정감이 있어 보였다. 근무하는 직원들도 친절했고...     

 

석정문학관 외부

 

 

 문학관 안 전시실 입구, 석정 연보

 

전시실 내부

 

 석정시인이 지인들과 교류했던 편지들이 전시된 곳, 내가 좋아했던 강은교 시인의 필적이 좋아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시인들의 편지문은 세로 쓰기였는데, 역시 강은교 시인답게 가로 쓰기 글이어서 더 정다워 보였다. 

 

4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신석정 (1907년-1974년)

  글 장석주

 

  식민지 시대에 ‘부역’이라는 오욕은 피할 길 없는 통과 의례와 같았다. 그러나 신석정(辛夕汀, 1907~1974)은 그 오욕으로부터 자신을 꿋꿋하게 지켜낸다. 신석정은 식민지 시대 막바지의 암흑기에 자신의 시들을 발표하지 않고 서랍 속에 처박아두었다가 해방이 되자 비로소 묶어 한 권의 시집을 펴낸다.

 

  1907년 전북 부안의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신석정은 읍내의 보통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한다. 그는 결혼 뒤 고향의 전원 속에 파묻혀 시인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투르게네프와 하이네, 타고르와 노장(老莊) 등의 문학과 철학 서적을 탐독하며 시를 쓰기 시작한다. 1924년 그는 열일곱 살의 나이로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다.

 

  그러나 신석정은 글쓰기를 포기할 생각으로 써놓은 시들을 불사르는 등 한동안 심한 좌절에 빠진다. 일찍 결혼한 까닭에 가난 또한 큰 짐이 되어 그의 발길을 무겁게 한다. 1930년 그는 박한영이 주재하던 조선불교중앙강원에 들어가 불전을 공부한다. 박한영이라면 최남선과 이광수를 비롯해 서정주와 조지훈 등에게도 영향을 미친 불교계의 거목이다. 신석정은 강원에서 불교 공부를 하는 한편 30여 명의 젊은 학도들을 규합해 회람지 『원선』을 만들기도 하나 종교 자체에는 깊이 빠져들지 않는다. 그는 금강산으로 입산수도를 떠나자는 동료들의 청을 뿌리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박용철의 권유로 잠시 서울에 올라온 그는 김영랑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가담하게 된다. 1931년 그는 『시문학』에 시 「선물」을, 『동광』에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를 발표하며, 이를 계기로 정지용 · 이광수 · 한용운 등과도 교유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낙향한 그는 부안읍 변두리에 뒤뜰이 넓은 초가를 한 채 사서 ‘청구원(靑丘園)’이라고 이름 짓고 이곳에 거주한다. 이 무렵 아직 등단하지 않은 서정주가 그를 찾아온다. 두 사람은 달맞이꽃이 핀 달밤에 석류를 까먹으며 노장과 도연명, 그리고 19세기 미국의 삼림 시인이자 철인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스피노자, 프랑스의 폴 클로델과 레미 구르몽에 대한 얘기를 이슥토록 이어간다.

 

 

  낮에는 고구마밭을 일구고 밤에는 독서와 시작에 매진한 신석정은 1932년 『문예월간』에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 『삼천리』에 「봄이여! 당신은 나의 침실을 지킬 수 있습니까?」 등 청정하고 애수가 담긴 전원시를 꾸준히 발표해 주목받는다. 신석정과 대조적인 시관을 갖고 있던 모더니스트 김기림조차 「1933년도 시단의 회고와 전망」이라는 글에서 그의 시에 대한 감탄을 금치 못한다.

 

 

  우리는 정지용 씨처럼 현대 문명 그 속에서 그 주위와 자아의 내부를 향하여 특이하고 세련된 시안(詩眼)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현대 문명의 잡답을 멀리 피한 곳에 한 개의 ‘유토피아를 음모하는 목가시적인 신석정’을 잊을 수는 없다. 그 뒤 신석정은 1936년 『신동아』에 「돌」, 『중앙』에 「송하 논고(松下論告)」, 『조선문학』에 「눈 오는 밤」, 1939년 『조선문학』에 「월견초(月見草) 필 무렵」 등을 발표하고 같은 해 ‘인문평론사’에서 첫 시집 『촛불』을 펴낸다. 이어 1940년 『조광』 3월호에 시 「명상」과 「황혼」, 9월호에 「애가(哀歌)」, 1941년 『삼천리』 4월호에 시 「변산 일기 ― 중계, 사지 목재, 능가봉, 청림」 등을 발표한다. 일제 말기에도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글쓰기를 하는 그의 생활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 암흑기에 이르러 작품을 발표하지는 않던 그는 얼마 뒤 꿈에 그리던 해방의 날이 오자, 그 감격과 회한을 이렇게 노래한다.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 달빛이 흡사 비 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보리라.

 

 신석정, 「꽃덤풀」, 『신문학』 2호

 

  그러나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거나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보려던 꿈은 문단의 이데올로기 싸움과 혼란상으로 여지없이 망그러진다. 해방 뒤 문우이자 동서인 장만영은 여전히 궁핍을 껴안고 사는 그에게 서울로 올라올 것을 권한다. 그러나 신석정은 고향을 지키며 1946년 『신문예』에 「비의 서정시」, 1947년 『신천지』에 「움직이는 네 초상화」 등을 발표한다. 1947년 마흔 살이 되던 해, 그는 일제 말기에 겉으로 침묵한 채 은밀히 써둔 시들을 엮어 두 번째 시집 『슬픈 목가(牧歌)』를 내놓는다. 『슬픈 목가』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낭만주의 색채 위에 해방 직전의 암담한 현실과 고향 상실에 따른 슬픔이 짙게 묻어 있는 시집이다.

 

 

  성근 대숲이 하늘보다 맑어 / 대잎마다 젖어드는 햇볕이 분수처럼 사뭇 푸르고 // ‘아라사’의 숲에서 ‘인도’에서 / ‘조선’의 하늘에서 ‘알라스카’에서 // 찬란하게도 슬픈 노래를 배워낸 바람이 대숲에 돌아들어 / 돌아드는 바람에 슬픈 바람에 나도 젖어 왼 몸이 젖어······ / ······ // 벙어리처럼 목놓아 울 수도 없는 너의 아버지와 나는 /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 내 심장을 삼으리라.

신석정,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일부, 『슬픈 목가』(1947)

 

 

  1951년 신석정은 전주 ‘태백신문사’에 입사해 편집 고문으로 일하다가 3년 만에 그만둔다. 이어 1954년 전주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전북대 문리대에 강사로 나간다. 1956년 그는 『현대문학』에 시 「서정 소곡(抒情小曲)」 · 「운석(隕石)처럼」 등을 발표하며, 같은 해 ‘정음사’에서 또 하나의 시집 『빙하(氷河)』를 간행한다. 이 시기에는 6·25 체험으로 말미암아 그의 시에서도 현실 사회에 대한 관심이 드문드문 나타난다.

 

  1956년 『문학예술』에 「피가 도는 돌이 되어」 등을 발표한 그는 1958년 이병기와 함께 『명시조 감상』을 펴내고, 1959년 『자유문학』에 「나에게 어둠을 달라」 등을 발표한다. 1961년 이후에는 김제고교와 전주상고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1962년 『자유문학』에 「무명(無明)의 항변」 · 「영구차의 역사」, 『문학춘추』에 「4월의 노래」 등을 발표한다. 1967년 예순 살 때 그는 시집 『산(山)의 서곡(序曲)』을 펴내 이듬해 한국 문학상을 받는다.

 

  1970년 그는 ‘한국시인협회’에서 시집 『대바람 소리』를 출간하고, 1972년 10월 『문학사상』 창간호에 시 「오한(惡寒)」과 산문 「시 정신과 참여의 방향」 등을 발표한다. 1972년 문화 포장을 받은 데 이어, 1973년 그는 한국 예술 문학상을 받는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전북 문화상 심사를 하던 자리에서 고혈압으로 쓰러져 투병 생활에 들어간다. 신석정은 병석에서도 시 「가슴에 지는 낙화 소리」와 산문 「병상 수필」을 쓰지만, 1974년 7월 6일 예순일곱의 나이로 삶을 마감한다. 그가 숨진 뒤 같은 해에 유고 수필집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이 나온다.

 

  원문 출처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60XX69100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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