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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향기

예산군 추사고택

  바야흐로 따스한 봄날씨에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꽃놀이 가기 좋은 날이었다. 애석한 것은 구름이 끼어 날씨가 화창하지 않다는 것이었는데, 다행스럽게 미세먼지 농도가 보통 수준이어서, 작심하고 집을 나섰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집 밖부터 차들이 밀리기 시작해서, 충청도 시골길까지 한적한 도로를 거의 만나지 못했다. 말끔하게 정돈된 추사고택에 이르러, 추사 기념관부터 들려, 추사의 생애부터 학습했다. 조선말 유명 서예가로 알고 있던 추사 김정희, 기념관 안에서 새로 알게 된 것은 그가 당대의 명문거족의 후손이라는 것이었다. 

 

  예산땅에 자리 잡은 것도 영조시대 영의정이었던 김흥경(경주 김씨)의 아들 김한신을 영조대왕이 사위로 맞으면서 비롯되었다. 영조대왕이 애지중지하던 화순공주를 시집보내면서, 이곳 예산 땅, 용궁리에 집을 지어주었는데, 김한신과 화순옹주는 추사의 증조부모이다.  추사는 어려서부터 실학에 뜻을 두고 박제가를 스승으로 삼고, 24세 때 동지부사인 부친을 따라  청나라 연경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당대 청나라 학문을 이끌며, 글씨와 금석문에 뛰어난 78세의 옹방강을 만나 평생의 스승으로 삼았다 전한다.

 

 추사기념관은 추사의 생애와 그의 복제된 글씨들을 주로 전시하고 있었다. 추사의 생애를 요약해서 보여주는 영상관도 있었고...  입구 안내데스크 여직원이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해서, 입구부터 출구까지 추사의 기록들을 눈 안에 새겨 넣었는데, 기억력이 엉망이라 벌써 그 내용들이 하룻밤 사이에 아득해져서 기억 저편에서 가물가물거린다.    

 

 

  기념관 앞 추사 동상

 

  기념관 안 추사 초상

 

  기념관과 추사고택 사이에 있는 추사의 묘소

 

  추사고택 사무실

 

  추사고택 정문

 

  사랑채

 

  안채

 

  안채와 대문

 

  안채와 사당 옆 뜨락에는 수선화가 가득했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 갔을 때 그가 위로받았던 것이 수선화였단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

 

  사당

 

  사당 아래 안채와 사랑채

 

  사랑채에서 바라보는 사당

 

  사랑채 정면

 

  사랑채 측면

 

  안채의 부엌과 출입문

 

  안채의 안방, 추사가 쓴  '만수무강'이 걸려 있다.

 

  안채의 대청마루

 

  안채 부엌, 안방, 대청마루

 

  밖에서 보는 안채와 사랑채

 

  대문과 행랑채

 

  도로 건너 추사 체험관

 

  추사고택 바깥모습

 

 

  추사 생애

 

  추사의 증조부는 영조대왕의 장녀 화순공주로 당대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이었던 김한신이었다. 김한신(1720-1758)은 서울에서 살다 장인인 영조가 마련해 준 예산 용궁리에 터를 잡고 살았다. 김한신이 39세로 죽자, 화순옹주는 곡기를 끊어 14일 만에 남편을 따라 죽었다. 사랑하는 딸을 잃을까 노심초사했던 영조는 딸의 단식을 말렸으나, 화순옹주는 뜻을 굽히지 않고 동갑내기 남편을 따라 순절하고 말았다. 후사가 없었던 이들 부부에 양자를 들여 봉제사하게 했는데, 그가 바로 추사의 할아버지였다. 추사 역시 12살에 부모 슬하를 떠나 큰 아버지 김노영에 양자로 입양되었다. 추사고택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가 여덟 살 무렵까지 머물던 곳이다. 

1809년(순조 9) 22세에 생원이 되었고, 1819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세자시강원설서 예문관검열을 거쳐, 1823년 규장각대교 충청우도 암행어사와 의정부 검상(檢詳)을 지냈다. 1836년(헌종 2) 성균관대사성과 병조참판을 역임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관련된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뒤 헌종이 즉위하자 이번에는 자신이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헌종 6)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848년 만 9년 만에 풀려났으나, 다시 1851년(철종 2)에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에 대한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예론(禮論)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후 풀려났다. 2차례 12년간 유배생활을 마친 그는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서화와 선학(禪學)에만 몰두하다 71세로 생을 마감했다.

 

화암사 https://fallsfog.tistory.com/708?category=49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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