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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마케도니아 테살로니키

  그동안, 얼마나 그리스 여행을 꿈꾸었는지 모르겠다. 여행사에 예약을 했다가 번번이 취소되곤 했다. 여행사에 개인적으로 당부도 해보았지만, 내가 대단한 손님도 아닐진대 기억했다가 성의껏 안내해줄 여행사들도 아니었다. 그리스 여행지로 산토리니가 성황 중이라지만, 애당초 그곳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크레타섬이라면 모를까 배를 타고 편도 8시간을 소비하며 그저 이색적인 풍광을 본다는 것은 지루하고도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숱하게 들어왔던 신화 속의 나라였던 만큼, 그리스가 유럽 여행의 시작이 되어야 했었을 것을, 유럽 내 이 나라 저 나라들을 다니며, 숱한 가톨릭 성당들에서 세월의 흔적과 그 규모에 감탄했었다.  

 

  신화의 나라는 어떤 모습일까. 올림픽 때마다 옛 올림피아 헤라 신전에서 성화를 채화하여 개최지에 보내고 선수 입장시 언제나 맨 처음 입장하는 나라.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현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신화 속 유적들은 어떤 모습일런지... 몇 년 전 재정 위기를 겪으며 유럽연합에서 퇴출당할 위기에 내몰렸었다. 우리나라 언론에선 국민 복지에 지출이 많아 경제가 파탄 났다고 난리법석이었다. 그리스 국민들은 세금을 덜 내려고 수영장에 위장막까지 씌우는 등 이기적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나라 정부의 국민 복지 지출이 대단하지 않음에도 그렇게 방정을 떨었다.

 

  서구문명과 오늘날 민주주의 기원이 되는 그리스 문명. 신화뿐만 아니라 철학이나 문학을 통해서 우리 단군 한아버지보다도 더 친숙하게 들었던 쏘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들이 살았던 나라였다. 드디어 그리스에 발을 딛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 신화나 학자들의 이야기들을 기억하는 만큼도 그리스의 역사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다.  

 

  금년 안에 아테네 직항노선이 개통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현재로서는, 터키를 경유하는 노선밖에 없음에 환승의 고달픔도 따르기 마련이어서 이스탄불을 경유하여 테살로니키로 입국했다. 이스탄불까지 11시간, 테살로니키까지 1시간 30분여, 비행시간은 정확한 것이 아니어서 그 지루함은 배가되었다. 한밤 12시 30분에 떠나는 터어키 항공기 좌석은 다른 항공기보다 조금 넓었으나, 볼거리가 시원찮아 지루한 시간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한국어 더빙이나 자막을 준비한 영상물이 제한적이어서 기내 식사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좁은 좌석에서 몸부림치며 잠을 청했었다.  환승하기 위해 내렸던 이스탄불 공항에선 환승게이트가 중간에 바뀌어 낭패를 볼 뻔했다. 아마도 인솔자가 없었다면,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땅에서 길을 잃고 꽤나 당황했을 것이다.  

 

 

  이스탄불행 터어키 항공 탑승구

 

  인천 공항 12시 30분 이륙

 

  10시간 째 비행 중, 터어키 상공. 제 자리에 앉은 채로 10시간 동안 잠자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한 시간이나 더 남았음을 보여주는 비행 안내

 

  이스탄불 공항에 내려 테살로니키행 환승 탑승구 217을 찾아 한참을 기다렸다. 그새 날이 밝았다.

 

  중간에 바뀐 탑승구 224, 날이 훤하게 밝았다.

 

  테살로니키행 항공기에 탑승했다. 터어키와 우리나라의 시차는 6시간.  8시 30분 이륙

 

우연히 지도를 검색했더니 반갑게도 독도가 나타났다. 터어키 항공 

 

 드디어 마케도니아 중심 도시이자 그리스 제 2 도시인 테살로니키에 9시쯤 도착했다. 그리스와 우리나라의 시차는 7시간

 

  테살로니키 공항청사 밖 

 

  마케도니아 테살로니키를 유럽의 중심으로 만들었던 알렉산더 대왕, 그의 청동 기마상 

 

  버스를 타고 하얀탑이 있는 해변으로 이동했다.

 

  비잔틴 제국 시절 요새로 사용되었으나 오스만 터키 점령하에 감옥으로 쓰이면서 피로 물들었기에 붉은탑이라고도 한다.

    

  테살로니키는 BC 316년에 세워졌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누이 이름을 딴 테살로니키는 146년 후에 로마 속주였던 마케도니아의 수도가 되었다. 6, 7세기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에게 여러 번 공격을 당했지만 비잔틴 제국시대에 번영을 누렸다. 수세기 동안 불가리아인, 노르만족 등의 야만적인 침략을 겪었으며, 1246년 부흥한 비잔틴 제국에게 넘어갔다. 1423년 베네치아에게 양도되었으나 1430년 투르크의 술탄 무라드 2세가 점령했다. 이후 그리스 군대에게 함락되어 1913년 그리스 왕국에 양도되었다.

 

 사도 바오로가 쓴 편지 2통이 이곳 주민들 앞으로 되어 있었으며, 이곳에서 최초로 주교가 된 가이우스는 바오로와 신앙을 함께 하던 사람이었다. 6세기와 7세기에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에게 여러 차례 공격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제국시대에 번영을 누렸다. 732년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 3세(717~741 재위)가 성상(聖像)을 금지한 지 2년 만에 교황의 지배권으로부터 분리시켜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에 종속되도록 했다(성상파괴 논쟁). 성상파괴주의자인 레오 황제와 그 승계자들이 다스리는 동안 테살로니키는 예배 시 성상 사용을 옹호했으며, 이들 예술품 일부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뒤이은 수세기 동안 불가리아인, 노르만족, 기타 다른 민족들이 침략해서 많은 야만적인 행위들을 주민에게 저질렀다.

 

  그리고 1246년 부흥한 비잔틴 제국에게 넘어가기까지 여러 다른 지배자에게 충성을 강요당했다. 투르크인에게 계속 시달림을 받다가 1423년 베네치아에게 양도되었으나 1430년에 투르크의 술탄 무라드 2세에게 점령되었다. 당시 끔찍스러운 대학살이 있었다. 이때 심하게 줄어들었던 인구는 그 세기가 끝날 무렵 스페인에서 쫓겨 들어온 2만 명의 유대인들로 인해 다시 늘어났다. 이곳은 오스만 제국의 일부로 계속 남아있다가 그리스 군대에게 함락되어 부쿠레슈티 협정(1913)에 따라 그리스 왕국에 양도되었다. <다음 백과>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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