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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세상의 중심 신탁의 성지 델피

  칼라바카에서 그리스 첫밤을 보낸 후 08시 30분에 숙소를 떠났다. 구름이 조금 보이긴 했으나 아침햇살은 좋았다. 신탁의 성지인 델피는 남서쪽 방향이었다. 평화롭고 한적한 시골길을 달려갈수록 먹구름이 늘어나며 햇살이 변덕스러웠다. 차창 커텐으로 햇볕을 가려가며, 스쳐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 보았다. 

 

   테베의 왕이었던 라이오스는 태어난 아들이 그를 죽일 것이라는 신탁 때문에 핏덩어리인 자신의 아들을 죽이라 명령을 내렸지만, 하인은 간난아이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남몰래 코린토스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코린토스 왕의 아들로 장성한 오이디푸스는 여행 중 얼굴도 모르는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게 되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신의 의지대로 이루어졌다. 동서고금을 통해 하늘이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을 인간은 벗어날 수 없었고, 인간은 그 운명의 굴레를 벗고자 수없이 몸부림쳤다. 우리는 오이디푸스 말고도 유사한 운명론적 이야기들을 어려서부터 숱하게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제 각각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고 노력했고, 그들의 부풀려진 이야기가 신화나 전설로 남아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내 경우엔 운명을 바꿔 팔자 고치자는 얘기는, 그저 신화나 설화 속 이야기거나 과장된 이웃 이야기로 알고 살아간다. 이따끔 팔자 고쳤다는 주변 이야기들이 내 자존심을 후벼 팔 때도 있지만, 나에게는 그저 다른 세상 이야기일 뿐이다. 하다못해 지금까지 아파트 청약에 당첨 한 번 돼보지 못한 처지이고 보면, 더 이상 할 말도 없다. 그런데, 한 술 더 떠서 아파트 청약 한 번 해보지 않은 내 친구도 있다면 세상사람들이 믿을 수 있을까 싶다.

 

  기구하게도 친부를 살해하고 우여곡절 끝에 테베의 왕이 되어 신의 저주를 받던 외디푸스도 신탁과 주변 정황에 모든 것이 자신의 과오임을 알게 된다. 결국 그는 저승에서 자신이 살해한 생부를 뜬 눈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절망감에 스스로 두 눈을 찔러 실명하고 만다. 핏덩이 외디푸스를 버리게 했고, 그 외디푸스가 친아버지를 죽였다고 알린 신탁의 장소 델피로 가는 험한 산길엔 우중충한 먹구름이 몰려들어 제법 을씨년스러웠다. 델피 신전을 두루 돌아보고 박물관으로 이동할 즈음, 두꺼운 구름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기어코 한두 방울 빗방울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내 자신과 이익만을 위해 비는 기복신앙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자신을 위해 노력하고 기원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눈물 위에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늘어나는 점집과 빨간 십자가의 네온싸인들은 그 만큼 우리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반증이겠다. 첨단 문명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며 생활 수단으로 삼는 오늘날에도, 우리는 신화 속의 세계에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깎아지른 듯 험한 바위산 비탈인 델피에 세상의 중심으로 삼고 신전을 지은 그리스 사람들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가 세다는 명산을 찾는 것과 서로 통하는 것이 있을 성 싶다. 영험했다는 델피의 신전에서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해 영적인 기원을 해 봐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운명은 그저 물 흐르듯 순리대로 풀어야 할 것임에도... ... 

 

 

  델피로 가는 길엔 구름이 점차로 많아져 햇살이 변덕스러웠다.   

 

  버스 오른쪽 차창밖으로 범상치 않은 산봉우리들이 보였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델피는 저 산 파르나소스 너머에 있었다 

 

  버스는 들판을 지나 험준한 산을 넘기 위해 산 옆구리를 끼고 굽이굽이 돌아서 고개를 넘어갔다. 산허리를 지나가는 차창밖으로 우리가 지나온 평야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깊은 산 속으로 들어서자, 아직 녹지 않은 눈이 한겨울을 연상케 했다.  

 

고도가 높아지자 몰려들던 먹구름은 잠시 동안이었지만 기어코 비를 뿌렸다.

 

  깊은 산속에도 드문드문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눈길을 벗어나, 대관령 아흔 아홉구비길 만큼이나 휘고 구부러진 고갯길을 돌고 돌아 산마루를 넘어 가파른 산길로 다시 올라갔다.

 

  아랫녘 바다는 이오니아 해의 코린토스 만

 

  고갯길 마루에 제법 큰 마을이 나타났는데, 이곳이 곧 델피 마을이었다. 신전이 발굴되기 전에 신전의 돌더미를 바닥 삼아 집을 짓고 살았는데, 발굴이 시작되면서 신전 아래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마을 한가운데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델피 아폴로 신전으로 향했다. 

 

  마을 밖 델피 신전 출입문

 

  아폴로 신전 안내문

 

  신전 주변엔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비바람에 눈까지 내려도 계절은 거스를 수 없나 보았다.

 

  신전 아래 시민들의 광장인 아고라

 

  아고라를 지나 창고터 앞 길가의 받침돌에 고대 그리스인들이 새긴 문자들이 나타났다.

 

  아고라에서 창고터를 지나온 길

 

  창고터를 지나 한 구비 돌아가는 길에 놓인 옴파로스. 세상의 중심으로 제우스가 낙점했다는 배꼽 표시로 원형 기둥 위에 올려져 있었단다.

 

옴파로스와 보물창고, 그 뒤가 아폴로 신전이다. 

 

  봉헌물을 보관하던 보물창고

 

  아폴로 신전 아래 스핑크스가 서있던 좌대터. 이곳에 12m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스핑크스를 올려놓았다. 

 

  아폴로 신전

 

  아폴로 신전 앞의 제단, 제단 뒤의 구조물은 청동 뱀 동상, 진품은 터어키 이스탄불에 있다.

 

  아폴로 신전의 뒷면

 

  신전 아래 보물 창고, 멀리 고대 체육관 터와 아테네 신전이 보였다. 가보고 싶었는데, 가이드는 손가락으로 멀리 가리키며 김나지움이란 말 한마디로 설명을 끝냈다. 확인을 하고 되물어서 가봤어야 했었을 것을...   

 

  아래 녘에 있는 아테네 신전, 점심 먹던 식당 벽에도 사진이 붙어있었는데, 지나쳐 버린 것이 못내 아쉽다. 

 

  아폴로 신전 위, 원형 극장

 

  원형 극장 앞 전경

 

  원형 극장 위에 고대 운동장이 있으나 출입을 제한하고 있었다. 하는 수없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다시 아폴로 신전 앞으로 내려왔다. 아래의 고대 청동 뱀 구조물은 페르시아 전쟁 중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승리한 아테네가 페르시아 군의 방패를 녹여 기둥으로 만들어 아폴론 신에게 바친 승리의 기념비이다. ‘델피 삼각기둥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본래 아폴론 신전 앞에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원형은 세 마리 뱀이 서로 꽈리를 틀어서 중앙의 기둥을 이루고 그 위로 세 개의 뱀머리가 황금으로 된 세발솥을 떠받치고 있었으며, 몸체에는 이 전투에 참가했던 31개 도시 국가명이 새겼었다고 전한다.

 

   델피가 쇠락하자 로도스에서 봉헌한 사두마차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졌고, 1204년 십자군에 의해 머리 윗부분이 절단되어 무기로 만들어지거나 현금으로 바뀌었다. 예전 이스탄불 블루 모스크 근처 히포드롬 광장에서 꽈리를 튼 몸체만 남아있는 델피의 청동 뱀기둥을 본 적이 있다.

 

  신전에서 내려오는 길

 

  보물창고 앞에서 설명을 듣는 학생들

 

  옴파로스 있는 곳에서 창고터를 지나 아고라 광장, 매표소로 내려가는 길

 

  델피 박물관, 아폴로 신전에서 4-5분 거리

 

  아폴로 신전 아래 있던 스핑크스상, 높이 12m 기둥 위에 올려져 있었다. 이집트 스핑크스와 다른 모습이다.

 

  아폴로 신전 주변 모형

 

  옴파로스 

 

  신화 속에 델피는 제우스가 동서 세상의 끝자락에서 반대방향으로 풀어놓은 두 마리의 독수리가 만난 장소로서, 고대 그리스에서 세상의 중심이라 여겼던 곳이다. 이러한 까닭에 그 중심인 배꼽을 상징하는 돌인 옴파로스Omphals’를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 보관했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고대 그리스 세계의 동서축을 남부 이탈리아에서 터키의 앙카라까지로,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에서 마케도니아까지를 남북의 축으로 본다면 델피가 실제로 지리적인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세상의 중심이라 여겼던 이곳 델피에서 그들의 운명에 대하여 신탁을 물었다. 아폴론이 이 땅을 차지하기 전인 초기 미케네 시대에도 델피는 원시 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신성한 땅이었다. 그 무렵 델피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숭배하는 성역으로서 신탁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후로 테미스, 데메테르, 포세이돈 신을 모시다가 미케네 시대 말엽에 이르러 아폴론이 신탁의 수호자가 되었다. 기원전 8세기부터 차츰 명성을 얻으면서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그리고 델로스의 아폴로 신전과 함께 그리스의 종교적인 중심지가 되었으며 기원전 6세기에는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신탁소가 되었다.

 

  아폴론의 신탁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성소 입구의 카스탈리아 샘에서 몸을 씻어 심신을 정화하고 적당한 희생동물을 골라 봉헌물로 바친 뒤 신전으로 올라가 신관에게 신탁을 받으러 온 이유를 말한다. 신탁의 순서는 추첨으로 결정되는데 델피에 봉헌물을 많이 바쳤거나 도움을 준 도시 국가의 시민은 우선적으로 신탁을 받았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신탁을 받으러 몰려들었기 때문에, 이는 대단한 특권이었으며 몇 달씩 델피에 머무르며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신탁 의뢰인의 사연을 들은 신관은 신전에서 가장 깊숙한 지하방에 있는 여사제 피티아(pythia)에게 질문을 전달하게 되는데, 오직 피티아 만이 지하방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신관은 방 밖에서 대기해야 했다. 피티아는 카스탈리아 샘물을 마시고 월계수 잎을 씹은 뒤 신성한 삼각대에서 앉아 지하의 갈라진 바위 틈에서 나온 증기를 들이마신다. 그리하여 환각 상태가 된 피티아가 신의 계시를 받아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면, 신관이 이를 운문의 형태로 받아 적어서 의뢰인에게 전달하였다. 델피 신탁이 애매모호함으로 악명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진실성을 의심받지 않았던 까닭은 인간이 신의 의지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고대인들의 굳은 신념 때문이었다.

 

 델피는 신탁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성역주변의 도시국가들이 신전관리와 제례유지를 위해 결탁한 인보동맹의 핵심이 되기도 했으나 로마시대로 들어서면서부터 쇠락의 조짐을 보이다가 390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이교도 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델피의 역사도 함께 막을 내렸다. 이후 중세시대에는 성역의 폐허 위에 카스트리 마을이 세워져 아폴론의 성역마저 자취를 감추었으나 19세기 말 프랑스의 고고학자가 발굴에 착수하여 마을의 서쪽을 재건하고 델피라 명명하였다<http://tourdonga.com/delphi-gr-1707/ 발췌

 

  신화에 따르면 아폴론이 이곳을 지키던 괴물 여신 피톤을 죽임으로써, 이곳은 아폴론을 숭배하는 주요 성소가 되었다. 델피의 아폴론 성역은 범그리스적인 성소로, 기원전 586년부터 4대 범그리스 경기 중 하나인 피티아 경기가 열려, 4년마다 모든 그리스 세계에서 온 운동선수들이 실력을 겨루었다. 경기의 승자는 피톤의 살해를 재현했던 소년이 템피 계곡의 월계수를 잘라와 월계관을 쓰는 영예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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