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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비잔틴 최후의 도시 미스트라

  올림푸스를 떠나 스파르타가 가까워질 무렵 차창밖으로 범상치 않은 산맥이 시야에 들어왔다. 스파르타 서쪽 산맥으로 티아게토스 산맥이었는데, 정수리가 하얀 눈으로 덮여 스파르타를 굽어보고 있었다. 지진이 심한 그리스엔 높은 빌딩이 없다. 고대 그리스 최강의 군사도시였던 현대 스파르타는 자그마한 소도시였다. 작고 나지막한 건물들이 왕복 4차선 도로를 따라 오밀조밀 모여있던 스파르타시 북쪽 끝무렵에서 그리스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식당 벽난로엔 장작불이 빨갛게 타고 있었는데, 바깥 날씨가 제법 쌀쌀함에도 종업원은 반팔 티 차림이었다. 식사 후, 잠깐 나와 습관적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더니 식당 북쪽 가파른 산 위에 작은 성채가 보였다. 사전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성채를 보며 무심코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 성채가 우리가 가려는 미스트라 성채였다. 식당 가까운 곳, 성채로 들어가는 길목에 작은 동상이 있어서 가까이 다가갔다. 놀랍게도 비잔틴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 동상이었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비잔틴 제국의 부흥을 도모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콘스탄티노플에서 오스만 투르크 군에 대항하여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마지막 전투에서 그는 황제의 장식을 모두 떼어내고 일개 병사 차림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다 전사했기 때문에 그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고 전한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비잔틴제국은 이곳 미스트라에서 투르크 군에게 7년을 저항하다가 1460년 최후를 맞았다.  그 후 그리스인들은 오스만 투르크 지배 아래 신음하다가 1832년에서야 오늘의 국경을 이루는 실질적 독립이 이루어졌다. 그리스인들은 1825년 3월 25일을 독립기념일로 삼는다.

 

  불과 35년 타국에게 압제를 받았던 우리는 그 치욕의 역사가 아직도 청산되지 않음에 가슴 아파하는데, 수백년간 이민족 치하에서 신음했을 그리스인들의 비극이 어떠했을지 감히 상상되지 않는다. 300여 년 세월이라면 한 나라 역사가 바뀌는 게 다반사임에도, 4백 년 가까운 세월 후에 독립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낸 그리스인들의 끈질긴 투쟁이 놀랍기만 하다. 그들은 독립 후에도 왕정과 군사 쿠데타 등 독재와 억압을 이겨내고 오늘의 민주사회를 건설하였다. 오늘날 경제가 어렵다고는 하지만 과거 3만 불 소득을 이룬 적도 있어서, 그들의 끈질긴 투지로 노력한다면 곧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 중턱 쯤에서 내려 성채의 후문으로 들어가 투어를 시작했다. 산비탈에 그처럼 아름답고 슬픈 폐허가 있을 줄 상상조차 못 했다. 비잔틴 제국을 찾아든 예술가들과 학자들이 못다 한 문화의 꽃을 여기에서 피웠고, 마지막 항거지로 치열했던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을 것이었다. 일부 교회들과 왕궁은 복원되어 옛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허물어진 집들과 성채의 벽들이 산비탈 아래 펼쳐진 스파르타 평원을 바라보며 세월에 부대끼고 있었다. 구르는 돌덩이 하나에도 영예와 처절한 전투의 피가 숨 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옛 성채의 무너진 돌벽들의 골목들을 걸으며, 스파르타의 흥망성쇠가 펼쳐졌던 장엄한 평원을 바라보았다. 무너져 내린 돌 틈에 피어난 봄꽃들과 험준한 뒷산, 고대 영욕을 지닌 채 말없이 서있는 성채의 유적 위에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인들의 숱한 영화와 슬픔들을 스파르타의 넓고 푸른 하늘이 넉넉하게 품고 있었다.     

 

  차창 밖 눈 덮힌 티아게토스 산맥

 

  스파르타 끝, 미스트라 입구 부근에 있는 그리스 전통 식당

 

  미스트라로 들어가는 길목 어귀, 산 위에 작은 성채가 보였는데, 십자군 원정 때, 이곳을 차지한 프랑크족 빌라르두앵이 세운 성이다.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동상. 노란 바탕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 문장이 새겨진 비잔틴 제국의 깃발이 그 위에서 나부끼고 있었다.

 

  산 중턱 미스트라성채으로 들어가는 입구

 

  성채로 들어가는 후문

 

  왕실교회였던 성 소피아 교회

 

  교회 뒤 비탈진 산 정상 아크로폴리스에 프랑코 인들이 구축한 빌라드두앵 성채

 

 교회 앞 석축 밑 지붕없는 폐허 아래 왕궁이 보인다.  왕궁 오른편 평원은 스파르타시

 

  복원된 왕궁

 

  아래 성 디미트리오스 교회

 

  성 디미트리오스 교회

 

  성채 위에서 교회로 들어오는 출입문

 

교회 위에서 올려다 본 빌라드두앵 성채와 궁전

 

  교회 본당의 제단

 

  아래마을 성터에서 올려다보는 왕궁

 

 성채 아래에서 바라본 산비탈의 미스트라 성

 

 

미스트라 역사

 

  중세에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모레아로 불렀는데, 미스트라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스파르타 지역과 아르고스 지역 메세니아의 일부를 포함하는 모레아 지방의 수도였다. 

 

  이슬람세력이 서진하자, 비잔틴은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고 이슬람의 침범을 막고자 원병을 요청했는데 원정군인 십자군들은 성지 탈환은 뒷전에 두고 보물이 산적한 비잔틴 제국을 탐하여 아예 1204년 십자군 원정에 나선 베네치아군과 프랑크 원정군들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버렸고, 이들은 콘스탄티노플을 1261년까지 지배했다. 

 

  그들은 점령지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그리스 전 지역을 테살로니키 아테네 모레아 등 몇 개의 봉건 왕국으로 나누어 전제군주국을 만들었다. 이곳 모레아에는 프랑크족인 윌리앙 드 빌라르두앵이 전제군주가 되어 다스렸다. 빌라르두앵은 1246년경에 미스트라에 성채를 건설했다. 고대 그리스 최강의 국가였던 스파르타의 영광의 자취가 스러진 이후 천여 년 이후에 스파르타의 남서쪽 험준한 타이게토스 산 기슭에 거대한 성채도시 미스트라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비잔틴 제국의 대다수를 형성하고 있던 그리스인들과 정통 계승자를 자처하는 귀족 세력은 라틴족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비잔티움 망명 정부를 세웠다. 1208년 알렉시우스 3세의 사위인 테오도루스 라스카리스는 터키의 서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니케아 제국을 세웠다. 니케아 제국은 1261년 라틴족이 점령했던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였다. 미스트라는 이보다 이태 전인 1259년 비잔틴 제국의 정통을 계승한 팔레올로구스 황가의 일족인 미카엘 팔레올로구스에게 양도되었다.

 

  미스트라는 프랑크족이 모레아 지방을 지배하기 위한 중심 도시로 건설하였다. 아크로폴리스에 견고한 성채를 세우고 전제군주를 위한 왕궁을 건립하였다. 고대 그리스 최강 스파르타 땅에 이민족의 성채 도시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팔레올로구스 황가에 의해 비잔틴 제국이 다시 부활되면서, 미스트라 역시 황가의 일족이 전제군주가 되어 다스리는 비잔틴 제국의 전제군주국의 하나가 되었다.

 

  미스트라의 도시 건설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어졌다. 해발 620여 미터의 산 정상에는 빌라르두앵이 성채를 구축했고, 비잔틴 제국의 팔레올로구스 황가에 의해 개축되었다. 신의 성역이자 유사시 군사적 시설로 이용되었던 고대 그리스 시대의 아크로폴리스와 달리 프랑크족 지배기와 비잔틴 제국기의 성채는 오로지 군사 방어기지 역할에 충실했다. 즉 성채 내에 군사시설 이외의 신전을 건설하지 않았다.

 

  미스트라는 산의 7부 능선쯤을 중심으로 내성을 쌓아 상부 도시를 형성하게 했고, 3부 능선쯤을 경계로 외성을 두르고 하부 도시를 배치했다. 상부 도시에는 황궁과 귀족들의 가옥, 황실 교회가 들어섰다. 하부도시에는 수도원과 교회, 주요 관청의 건물과 공직자들의 가옥이 형성되었다. 일반 백성들은 외성 밖 산기슭과 가까운 평원에 마을을 형성해 살았다.

 

  미스트라는 비잔틴 제국의 후기에 가장 번성한 지역이었다. 콘스탄티노플에 이어 실질적으로 제국의 두 번째 수도로서 학문과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리스 문명을 계승한 비잔틴 제국의 특성상 그리스인들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펠로폰네소스 지역에 있던 미스트라가 번영했던 것도 자연스럽다. 오스만 투르크 세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험지에 구축된 성채와 스파르타와 아르고스의 비옥한 평원을 곁에 둔 때문이었다. 바다를 통한 상품의 교역이 용이한 것도 한몫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콘스탄티노폴 전투에서 전사하고 성은 함락되었다. 유일하게 비잔틴 제국의 속령으로 남아있던 모레아는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동생들인 토마스와 디미트리오스가 공동 통치를 하고 있었지만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디미트리오스가 오스만 제국의 힘을 빌려 토마스를 제거하려 하자, 메흐메트 2세는 이것을 명분으로 모레아를 공략하여 드디어 성을 점령함으로써 비잔틴 제국은 멸망하였다. 모레아에서 분쟁하던 토마스는 로마로 망명하고 디미트리오스는 에디르네의 왕궁에 갇혀 그곳에서 죽었다.

 
 
  미스트라는 그리스 민족의 마지막 자존심과 같은 곳이다. 그리스인의 제국이었던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배출한 곳이고,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보다 더 오래 전제군주의 독립을 지켜낸 곳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비잔틴 후기 문화 예술의 중요한 흔적을 유산으로 남겨 놓은 문화의 보고이기도 하다.  또한, 미스트라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거대한 종교도시이기도 했다. 하부 도시에 산재한 숱한 교회와 수도원은 쓰러져 가는 비잔틴 제국을 그리스도의 힘을 빌려 지켜보려 안간힘을 쓴 팔라이올로구스 황가의 애잔한 노력이 배어있다. 


스파르타의 옛 도시 미스트라는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보루였고, 그리스인들에게 아픔과 영광의 역사가 교차한 애환이 서린 곳이다.  <http://www.dailian.co.kr/news/view/519254>발췌 후 첨삭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와 마케도니아 지방 드라가슈 가문 출신의 세르비아인 아내 헬레나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콘스탄티노폴에서 보냈으며, 1443년 모레아의 황제 소유영지를 통치하고 라틴인들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1448년 형인 요한네스 8세 팔라이올로고스가 자녀 없이 죽자 다른 형제인 데메트리오스와 제위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는데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2세에게 중재를 요청한 결과, 콘스탄티노스가 결정되어 1449년 미스트라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1451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된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에 대한 위협을 가해오자, 콘스탄티누스는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재결합에 동의함으로써 서유럽의 지원을 얻어내려고 노력했으나 끝내 무산되었다. 결국 가브리엘로 트레비사노가 이끄는 소수의 베네치아 공화국 함대와, 주스티니아니 롱고가 이끄는 제노바 공화국 용병의 지원을 받아 독자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방위조직을 갖추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메메드 2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의 군대의 침공하는 것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1453년 4900명 정도의 그리스인들(무기를 들 수 있는 남성에 수도승까지 모두 포함한)과 2000명의 자진해서 잔류한 외국 용병들이 메흐메드 2세를 맞아 싸웠다. 황제는 전선에 직접 나섰으며, "활을 쏘고 창을 던져라, 저들에게 로마인들의 후예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려라!" 며 사기를 북돋았다고 한다. 그리고 메흐메트 2세의 항복 제안에 대해서는 이 말을 남겼다. 

  "당신에게 도시를 넘겨줄 권리는 나에게도, 이 곳에 사는 그 누구에게도 없소, 우리 모두를 위해서, 상호간의 이해에 따라, 우리 생명을 아끼지 않고 자유 의지에 따라 죽을 것이오." 

 

  콘스탄티노플은 그 뒤에도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강력한 방어력을 바탕으로 몇번의 파상공세를 6천 남짓한 병사를 바탕으로 이겨냈다. 메흐메트 2세의 마지막 공격지점은 외부 성벽 중 가장 약한 곳, 리쿠스강이 흘러드는 지점이었다. 황제는 첩자를 통해 공격지점을 들었지만, 방비를 단단히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바시-바주크에 의한 1차 공세, 정규군에 의한 2차 공세, 심지어 예니체리 군단의 3차 공세까지 모두 막아냈지만, 비어있는 통로를 따라 올라간 오스만 병사가 탑에 오스만 군기를 세움으로써 성이 함락되었다고 생각해버린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방어전을 지휘하고 있던 용병대장 주스티니아니가 투르크군의 사격에 부상을 입고 방어선에서 이탈하여 배로 도망가버렸다. 배로 옮겨진 주스티니아니는 회복하지 못하고 며칠 후 바다를 건너던 중 배 안에서 사망하였다. 방어군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고 황제가 근위대와 함께 최후의 저항을 하던 중, 수비군이 열려있는 비밀문을 잠그지 못했고 그 문을 통해 오스만 군대가 난입해 들어오면서 결국 성은 함락되었다. 

 

  "성은 함락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있구나!"

 

  그는 위의 유언을 남기며 적에게 돌진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후의 종적을 알려진 바가 없다. 마지막으로 적군에게 돌격하면서 자신의 몸에 달고 있던 황제로서의 상징물을 죄다 떼어냈기 때문에, 황제의 시체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투르크인들은 황제가 신었다는 보라색 부츠를 근거로 '황제의 시신'을 찾아 목매달았지만, 그것이 황제의 주검임을 확인하는 정확한 사료는 없다.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그리스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당시 천사들이 내려와 콘스탄티누스 11세를 구하여 대리석상으로 만들었으며, 투르크의 지배가 무너지고 그리스가 해방될 날 다시 부활하여 앞장서게 될 것이다.'라는 전설이 생겨났다. 

 

 

    러시아와 그리스의 연관성



  러시아는 이 때부터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 조이 팔레올로기나가 이반 3세와 결혼한 것을 근거로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자칭하였다.  <나무 위키 백과>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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