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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300 결사대의 스파르타

  미스트라 투어 후, 호텔에 여장을 풀고 스파르타 유적 탐사에 나섰다. 숙소에서 가까운 곳으로 시가 북쪽 끝 지점 축구장 앞에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가 청동상으로 재현되어 두 눈을 부릅뜨고 칼과 방패를 들고 서있었다. 영화 '300'에서 보던 근육질 단단한 사나이 모습으로 고대 스파르타 군대의 용맹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BC 480년 스파르타를 침공한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의 대군에 맞서 친위병 300명과 함께 남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스파르타인들은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는 전설이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300 결사대에서 비롯되었다. 이 동상 앞에 서서 청동상을 바라보자니, 영화 '300'에서 재연되었던 영웅들의 장엄하고도 처절했던 전투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해상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아테네와 달리 스파르타는 평원 속에 자리잡은 농업 도시국가였다. 그들은 전쟁으로 포로들을 잡아 농사짓는 노예로 부렸다. 그들을 복종시키고 부리기 위해서 강력한 전사들이 필요했다. 그 전사를 기르기 위한 교육이 바로 스파르타 교육이다. 그 때문에 사내아이들은 7살부터 전투 체력을 길렀고 늙어 죽을 때까지 전사여서 고대 그리스에서 스파르타는 최강의 군사력을 가질 수 있었다 전한다.  

 

  운동장 축대를 왼쪽으로 돌아 수십 미터 거리 올리브 농장 울타리 안에 스파르타 유물 발굴 현장이 있었다. 이미 보았던 델피나 미스트라 만큼 웅장하고 장엄하지는 않았다. 올리브 농장 울타리 안, 나무 사이 언덕길을 오르며 군데군데 조금씩 파헤친 발굴 현장과 기우는 오후 햇살 아래 장엄하게 스파르타 평원을 굽어보고 있는 타이게토스 산맥의 위엄으로 과거의 영화를 유추해 보았다.  

 

 

 

  스파르타 시 북쪽 끝 축구장 앞에 선 청동상 레오니다스왕

 

  올리브 농장 안 유물 발굴 현장

 

  무너져 내린 스파르타 성의 외벽

 

  비잔틴 교회 흔적

 

스파르타 아크로폴리스

 

  스파르타 평원을 굽어보는 타이게토스 산맥과 원형극장이 있는 언덕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번 우러러본 레오니다스 왕, 300 결사대로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페르시아 크세르크세스 대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스파르타 시가

 

 

테르모필레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

 

테르모필레 전투는 페르시아가 두 번째로 그리스를 침공할 당시 사흘 넘게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는 테르모필레("뜨거운 문")에서 기원전 480년 8월 또는 9월에 아르테미시온 해전과 동시에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이끄는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과 크세르크세스 1세의 페르시아 제국이 맞붙었다. 제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나이가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패배한 페르시아는 뒤늦게 앙갚음을 하고자 다시 그리스를 침공하였다. 크세르크세스는 거대한 육해군을 거느리고 그리스 전체를 정복하고자 하였다. 아테네 장군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리스 연합군이 테르모필레 고개에서 페르시아 육군의 진입을 막고, 동시에 아르테미시온 해협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막자고 제안하였다.

 

병력 7,000여 명의 그리스 연합군은 기원전 480년 여름에 북쪽으로 행군하여 고갯길을 봉쇄하였다. 고대 사료에서는 백만 명으로 짐작하였던 페르시아 군대는 8월 말 또는 9월 초에 고개에 다다랐다. 병력면에서 압도적인 열세였던 그리스 군대는 역사상 유명한 일전에서 후위대가 궤멸되기 전까지 총 이레 동안(그중 사흘간은 전투)이나 페르시아 군을 막았다. 아르타바누스가 이끄는 1만 명의 선발대를 포함해 이틀 꼬박 전투를 벌이고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 1세가 이끄는 소규모 군대가 페르시아의 거대한 군대가 지나갈 길 한 곳을 막았다. 

 

이틀째 전투가 지나고 에피알테스라는 지역 주민이 그리스인을 배신하고 그리스 전열 뒤로 이어지는 작은 샛길을 누설하였다. 포위당했음을 알게 된 레오니다스 왕은 그리스 군대의 진열을 해체하고 후방을 지키기 위하여 스파르타인 300명, 테스피아이인 700명, 테바이인 400명 그리고 여타 몇 백 명을 배치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이 전사하였다.

 

일전이 끝나고 아르테미시온의 연합군은 테르모필레의 비보를 들었다. 당초 그리스의 전략은 테르모필레와 아르테미시온 양쪽에서 적을 막는 것이었으므로, 육지에서 길을 내어준 이상 그리스 함대는 살라미스로 퇴각하기로 하였다.

페르시아인들은 보이오티아로 쇄도하였고, 당시 사람들이 피난을 떠나고 텅 빈 아테네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 함대에 결정적인 일격을 노리던 그리스 연합군 함대는 기원전 480년 말 살라미스 해전에서 침략군을 격퇴하였다. 그리스에서 발이 묶일 것을 두려워한 크세르크세스는 군대 대부분을 페르시아로 철수시켰으며, 마르도니오스에게 그리스 정복을 완수하도록 맡겼다. 그러나 이듬해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인을 무찔렀으며, 이로써 페르시아의 침략은 종식되었다.

 

고대와 현대, 테르모필레 전투를 일컬어 조국 땅을 지키려는 애국적인 자유민 군대의 위력을 보여주는 예로 삼는다. 또 이 전투는 훈련, 장비, 지형의 이점을 살려 전력 증강을 꾀한 사례로 꼽히며, 압도적인 적에 맞서는 용기의 상징이 되었다. <위키 백과>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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