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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향기

운보의 집

  충북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에 있는 한국화가 운보의 집을 찾았다.  눈 내린 야산에서 불어오는 칼바람 때문인지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날이었다. 날씨는 맑았으나, 여름 하늘처럼 두꺼운 구름들이 창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구름 때문에 들쭉날쭉하던 햇살도 차가운 바람에 따뜻한 기운도 잃었다.  몇 년 전에 방문한 적이 있어서 운보의 집으로 가는 풍경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다만 눈이 내려 들과 산이 흰 세상으로 바뀌어 있다는 것과 응달진 곳엔 빙판이어서 위태로웠다는 것이 다르긴 했다. 운보의 집에 도착하니, 입구에 매표소가 나타났다. 전에는 무료로 개장했었는데, 그 사이 세월이 바뀌어 유료화했나 보았다.  입장료는 4000원이어서 그리 비싸지는 않았다.  멀리서 한적한 시골마을까지 찾아온 노고에 비하면...  매표소 옆 광장에 차를 세웠는데, 주차장 후미진 곳에서 쓰레기를 태우고 있어서 비닐류타는 맹독성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맑고 깨끗한 청정마을, 그것도 미술관 옆에서 쓰레기를 태운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어찌하는 수 없이 코를 막고, 냄새를 피하며 운보의 고택으로 들어섰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 그리고 마당 앞뜰에 있는 정자와 작은 연못, 그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눈 덮인 고택의 풍경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다. 관람객들을 위하여 고택의 내부까지 공개하고 있어서, 마련된 슬리퍼를 신고 살아생전 운보가 머물던 작업실과 거실도 함께 볼 수 있었다. 운보의 집을 후측면으로 나와 운보미술관에 들어가, 그의 작품들을 관람했다. 그의 힘 있는 듯한 글씨 그림, 전통한국화, 석판화들을 두루 보고 그림 판매실에 들려 진열해 놓은 운보의 석판화들을 보았다. 진한 원색으로 찍어놓은 석판화는 그림과 차이가 없어 보였다. 전문가 아니면 구별도 어렵다는 설명이었다. 직원의 말에 의하면 석판화는 150장가량 찍은 후, 석판을 파쇄해 버린다는 것이었다.  판매하는 그림은 거의 마지막 판본 정도 된다는 것인데, 가격은 대략 큰 것이 250만 원 정도였다. 그림이 너무 아름답고 색깔이 강렬해서 구입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으나, 평소 해보지 않았던 일이라 마음뿐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전시실 한편에는 월북작가로 활동하다 작고 했다는, 운보의 동생 김기만의 유작도 볼 수 있었다.  2005년인가 금강산에 갔을 때, 옥류관 근처에서 운보동생의 그림이라며 표구도 안 된 낱 장 그림들을 판매하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미술관에서 나와 조각공원에 잠시 들렸으나 날씨가 너무 추워 끝까지 둘러보지 못하고 빙판길을 걸어서 주차장으로 되돌아왔다. 겨울의 짧은 햇살은 이미 기울고 삭풍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들판을 가로질러 나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내, 그림 판매소에서 보았던 운보의 석판화가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1913~2001)이 71세 되던 해인 1984년에 완공하여 2001년 1월 작고할 때까지 생활했던 곳이다. 운보의 집이 있는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는 김기창의 모친 고향이다. 솟을대문을 지나 정원과 2개의 중문을 통과하면 아름다운 한옥 안채가 나온다.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약 8만 3,000m²의 대지에 운보의 집을 비롯하여 운보미술관·수석공원·조각공원·도자기공방·연못과 정원·찻집·운보의 묘 등이 있다. 운보미술관에는 대표작 50여 점과 도자기·판화·스케치, 유품, 부인 박래현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Travel tip 탄산광천수로 유명한 초정리가 근처이다.  초정약수원탕의 탄산수 목욕은 피부관리에 좋을 듯하다.  초정리 탄산수는 사이다 맛이 나는데, 약수탕에 입욕하면 피부가 따끔거린다. 탄산거품이 피부에 달라붙어 기포를 만들어 낸다. 손으로 피부를 문지르면 사이다 거품처럼 기포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목욕료는 7000원. 인근의 대형 목욕탕 겸 숙박업소인 초정베데스다 스파텔은 현재 내부수리 중이다. 큰길에서 운보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세교 4거리에 전주밥상집"이 있었는데, 6000원짜리 전주밥상이 정갈해서 나그네의 식사로 부족함이 없었다.

 

 

 운보의 집과 운보 미술관

 

 만년에 운보가 머물던 안채의 정면

 

마당 끝자락의 정자와 연못

 

우리가 통과해서 들어왔던 운보의 집 바깥채

 

운보의 집 안채 마루에서 내다본 앞 마당과 뜨락

 

운보의 작업실

 

운보의 방, 호사스러운 호랑이 통가죽과 죽부인이 어울려 보이지는 않았다.

 

운보의 집 측면

 

운보의 집 후측면, 안채의 경우 지붕이 특이하게도 열 십(十) 자 변형 모양이었다.

 

운보의 집 뒤에 있는 운보 미술관, 오른 쪽은 운보의 앉아 있는 동상

 

운보 미술관의 전시물 몇 점

 

 세종대왕의 표준 영정을 그렸다는 운보와 그의 연표.  세종대왕의 어진은 6.25 때 부산 피난지에서 화재로 소실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종대왕의 어진은 운보가 그린 상상화이다.

 

 운보의 작품들

 

월북작가였던 운보의 동생 김기만의 병풍 그림

 

운보의 아내 박래현이 그린 시화

 

운보의 석판화

 

미술관 옆 조각 공원

 

운보의 집을 나오는 길...

 

 운보 김기창

 

 김기창은 1913년 서울 운니동에서 당시 총독부 토지관리국 직원이던 아버지 김승환과 어머니 한윤명 사이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덟 살(승동보통학교 2학년)에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청각을 상실한 후 언어 장애의 증세가 있었다. 하지만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의 소개로 이당(以堂) 김은호 화백에게 동양화를 배워 1931년 조선미술대전에 출품하여 1940년까지 6회 입선, 특선 3회를 기록했다. 광복 전의 활동은 주로 일제의 내선일체 사상을 정당화하는 친일 활동으로 점철되었다.

 

 1943년에 아내 우향 박래현과 처음 만나서 3년간의 필담연애 끝에 1946년 결혼하였다.  1957년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 주최 교 한국 현대작가전에 초대 출품했다. 1960년 국전 초대작가가 되어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타이베이(台北)와 홍콩에서 열린 한국미술전에 출품했고 이어 도쿄(東京)·마닐라에서 열린 한국미술전에도 출품했다. 1962년 수도여자사범대학(훗날 세종대학교)으로 교직을 옮겼고 문화자유전에 출품했다. 1963년에 5월 문예상 미술본상을 수상했고,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도 한국 대표로 출품했다. 1964년 미국무성의 초청으로 도미(渡美), 1969년에 재차 도미하여 뉴욕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홍익대학교와 세종대학교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1979년 한국농아복지회를 창설하여 초대회장에 취임하였고, 1984년에는 서울 역삼동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복지센터인 청음회관을 설립하였다.

 

  위의 글만 보면 그는 영락없는 한국화의 대부쯤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그의 뛰어난 붓놀림으로 일제 군국주의를 떠받쳐 준 전력을 가진 화가다. 그 그림들이 고스란히 남아 이를 대변해주고 있다. 운보는 스승인 이당 김은호와 더불어 사제지간이 모두 친일화가이다. 그는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고 그림을 통해 일제의 전쟁동원에 적극 협력하였다.  일제 말 친일 미술전의 핵심인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 후소회 동문인 장우성과 함께 일본화부 추천작가로 발탁되었다.(1942∼44) 자연스레 친일파의 나락에 빠져든 것이다. 김기창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고무하기 위한 선전 작업에도 앞장섰다. 이는 우선 신문·잡지류의 대중매체에 실린 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총후병사>1944.4 매일신보에 게재된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1943.8.6), 조선식산은행의 사보 《회심(會心)》지에 실린 그림과 훈련병을 그린 <총후병사>는 펜화에 담채를 가한 삽화이다. “완전군장으로 간이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병사의 옆모습을 포착한 것으로 얼굴과 주먹 쥔 손에는 성전에 참여한 멸사봉공의 굳은 의지가 생생하게 담겨있다”고 이태호 명지대 교수는 《친일파 99인》에서 밝혔다.  그러나 <총후병사>에 대해서 김기창은 "정식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삽화에 불과해 친일한 작품으로 볼 수 없다."고 친일작품행위를 부정했다. 이러한 운보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에 당시 남양군도에서 대검을 소총에 끼운 채 적진을 향하고 있는 일본군의 육박전을 묘사한 <적진육박>(1944)이라는 작품이 공개되면서 이 말은 거짓말임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적진육박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소위 ‘황국신민’의 영광을 고취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경성일보사가 1944년 3월부터 7개월간 서울에서 연 ‘결전’ 미술전람회에 출품됐다”고 밝혔다.  24살 때인 조선미술전람회(줄여서 “선전”)에서 최고상을 받은 운보는 연 4회 특선 경력으로 27살 나이에 “선전” 추천작가가 되면서 “추천 작가된 영광”을 일제군국주의에 동조하는 것으로 갚은 사람이다. 조선남화연맹전(1940.10), 애국백인일수전람회(1943.1)를 통해 일제의 기금 모집에 적극 협력 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유려한 붓끝을 놀려 일제군국주의를 찬양, 고무하는 그림을 그려낸 화가이다.

 

 그의 화풍은 자유롭고 활달한 필력으로 힘차고 동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여, 고시적인 풍속화에서부터, 형태의 대담한 왜곡을 거쳐 극단적인 추상에 이르기까지 구상, 추상의 전 영역을 망라하는 폭넓은 작가적 역량을 구사했다. 또한 복음서의 예수 전승(傳承)을 한국적으로 해석, 예수를 한복을 입은 한국인으로 묘사한 동양화를 그렸는데 이는 예수를 한국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기독교를 토착화하기 위한 신학적인 시도로 보인다. 하지만 역사적 예수는 로마 제국, 헤롯 왕실, 예루살렘 성전의 착취를 받는 가난한 농촌공동체요,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없는 곳', '이방인의 갈릴리'라고 불릴 만큼 무시와 소외를 받는 지역인 갈릴리에서 변변치 않은 직업인 목수로 살아간 민중이었는데, 김기창 화백의 그림에서는 양반의 옷을 입고 있는 모순이 있다. 대표작으로 <세종대왕 초상> <군마도> <청산도> <소와 여인> 등이 있다. 친일 미술인 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평의원으로 있던 이당 김은호의 제자로, 그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고무하기 위해 그린 <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 < 완전군장의 총후병사 > 등은 1943년 8월 6일 치 < 매일신보 >에 실렸다. 사후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미술 분야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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