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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향기

거제 청마 기념관

  북상하는 길에 거제시 북서쪽에 있는 둔덕면 방하리 소재 청마기념관을 방문했다. 그동안 청마 유치환은 통영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거제도에서 이곳 산방산 아래 마을에서 태어났단다.  그가 태어난 마을에  기념관을 세우고,  태어난 곳에 초가집 생가를 복원하였다.   멀지 않은 곳에는 그의 묘가 있다.

 

   청마 유치환은 옛적부터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맨 처음 공중에 단 줄을 안 그는./ "이란 그의 시 <깃발>이 실려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게다.  통영에 가면 그의 문학관과  공원까지 조성되어 그를 기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생각에도 이 시는 높은 깃대 끝에 펄럭이기만 하는 깃발의 모습에서,  언제나 높은 곳에서 바라보이면서도 멀리 있는 이상향을 그리워하기만 할 뿐,  매달려 있기 때문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이미지를 끄집어내어 강렬하면서도 허무하고 공허함으로 형상화했기에 쉽게 공감이 되는 작품이다. 

 

  한 사람의 시인을 두고, 각지에서 그의 문학관을 짓고 기념하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시인의 문학성을 기리며, 시인과 관련된 향토의 자긍심을 높이고, 우리 문화를 보다 널리 알리는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청마 기념관

 

기념관 옆에 있는 생가

 

기념관 내부

 

유치환(1908.7.14 ~ 1967.2.13) 

호 청마(靑馬). 유치진의 동생으로 통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豊山]중학에서 4년간 공부하고 귀국하여 동래고보(東萊高普)를 졸업,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1년 만에 중퇴하였다.  정지용(鄭芝溶)의 시에서 감동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 1931년 《문예월간》지에 시 《정적(靜寂)》을 발표함으로써 시단에 데뷔, 그 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시작을 계속, 1939년 제1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를 간행하였다.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허무와 낭만의 절규 《깃발》을 비롯한 초기의 시 53편이 수록되어 있다. 1940년에는 일제의 압제를 피하여 만주로 이주, 그곳에서의 각박한 체험을 읊은 시 《수(首)》 《절도(絶島)》 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이 무렵의 작품들을 수록한 것이 제2시집 《생명의 서(書)》이다. 8·15광복 후에는 고향에 돌아와서 교편을 잡는 한편 시작을 계속, 1948년 제3시집 《울릉도》, 1949년 제4시집 《청령일기》를 간행하였고, 6·25 전쟁 때는 종군문인으로 참가하여 당시의 체험을 《보병과 더불어》라는 종군시집으로 펴냈다. 그 후에도 계속 교육과 시작을 병행, 중·고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통산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간행하였다. 그의 시는 도도하고 웅혼하며 격조 높은 시심(詩心)을 거침없이 읊은 데에 특징이 있는데, 이는 자칫 생경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어떤 기교보다도 더 절실한 감동을 준다.

  제1회 시인상을 비롯하여 서울시문화상·예술원공로상·부산시문화상 등을 받았다.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사후에 그의 오랜 연고지인 경주에 시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시조시인 이영도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 중 200통을 추려 모은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치환의 친일행적에 대한 기사문

 

"유치환, 친일사전 빠진 게 면죄부 아니다"
통영예총, '청마우체국' 추진... 민족문제연구소 "추가 조사중"

  통영예총이 최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시인 유치환(1908~1967, 호 '청마')이 포함되지 않자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민족문제연구소는 "수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면죄부가 주어진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유치환의 친일 논쟁은 오래되었다. 유치환이 쓴 시 "수(首)"는 항일독립군을 꾸짖고, 시 "전야(前夜)"는 학도병 지원을 촉구한 작품이라는 지적을 받아 왔다. 또 유치환이 1942년 2월 <만선일보>에 발표한 "대동아 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라는 제목의 글도 친일이라 보고 있다.

  2007년 12월 통영에서는 '학술토론회'가 열리기도 했다. 당시 복거일 씨와 홍정선 인하대 교수,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는 "유치환은 친일이 아니거나 친일이라도 문제 될 게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과 김재용 원광대 교수, 박태일 경남대 교수는 "유치환은 친일 작품을 썼고, 그래서 기념사업을 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보였다.

  

통영예총, 11월 회의 열어 정부에 '청마우체국으로 개명' 건의

  이런 가운데 지난 8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 유치환이 빠져 있다. 현재 통영에는 유치환 생가가 있는데, 통영예총은 유치환 기념사업을 벌이겠다는 입장이다.

통영 중앙우체국을 '청마우체국'으로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 유치환은 생전에 편지를 즐겨 썼는데, 통영 중앙우체국에서 5000여 통의 편지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우체국 앞에서 유치환의 시 "행복"을 새긴 시비가 세워져 있다.

  통영예총은 2004년 5월 정보통신부에 중앙우체국을 '청마우체국'으로 개명할 것을 건의했으나, 유치환의 친일 행적이 밝혀지면서 유보됐다. 이런 가운데 통영예총이 <친일인명사전>에서 유치환이 포함되지 않자 우체국 개명 작업을 다시 추진하기로 한 것.

  정해룡 통영예총 회장은 "민족문제연구소는 망자에 대한 예의도 없는 모양이다. 사회적으로도 심정이 가지만 물증이 없으면 '무죄 추정' 아니냐. 청마가 서정주처럼 확실하게 글을 발표한 것도 아니다. 무덤에 묻힌 사람한테는 관대해야 하는데, 민족문제연구소는 없는 친일 자료를 찾아내겠다고 하는데 말이 안 된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미국 LA에도 '도산 안창호 우체국'이 있듯이, 중앙우체국을 청마우체국으로 바꾸어 문화관광상품으로 하자는 것이며, 그곳에서 편지를 쓰면 사랑도 이루어지고, 싸웠던 사람도 편지를 띄우면서 풀어지도록 하자는 취지다"면서 "11월 안으로 통영예총 회장단 회의를 열어 추진할 것이며, 정부에도 공문을 보내고,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민족문제연구소 "유치환은 친일행적 분명, 추가 조사 뒤 수록 여부 결정"

  이에 대해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은 "친일인명사전에, 그것도 1차에 수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친일인사가 아닌 것은 아니다"면서 "유치환은 친일행적이 분명한데, 친일인명사전에 수록 기준에 따라야 하는데 다소 미흡한 부분이 있어 더 조사를 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 사무처장은 "사전 '보유편'에는 추가 자료가 발굴되면 수록될 사람들이 더 늘어날 것이다. 이번에 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고 해서 친일행적이 없는 것인 양 기념사업을 하는 것을 부적절하다"며 "보유편은 후속 회의를 통해 최대한 빨리 낼 것"이라고 덧붙였다.

  2005년 '제1회 임종국상'(사회운동부문)을 수상했던 김영만 Corea평화연대 상임대표는 "이번에 유치환이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되었다고 해서 그의 친일행적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면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추가 조사를 지켜봐야 하며, 벌써부터 기념사업을 주장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고, 역사 인물에 대한 기념사업은 논란거리가 있으면 하지 않는 게 맞다"라고 말했다.  <오마이 뉴스 09.11.11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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