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의 향기

평택 원균장군 묘와 기념관

  그동안 한 번 가봐야 하겠다고 벼르던 원균의 묘와 기념관을 찾았다.  국도를 따라 내려가는데, 그곳 부근은 거대한 토목공사 중이었다.  황량한 들판에 산자락을 깎아내어 아파트를 지으려는지 아니면 공단을 조성하려는지 덩치 큰 덤프트럭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어 몹시 어수선했다.  좁은 마을 안길로 들어서자, 사당처럼 보였던 모선재와 주차장이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모선재를 둘러본 후, 저수지를 지나 원균 장군 묘로 이동했다.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한 원균장군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기에 장군의 말이 물고 돌아왔다는 유품들과 부인 파평 윤씨와 합장하여 묘를 만들었다.  외아들이 함께 전사했기에 원균의 손자로부터 대를 이은 후손들이 번성하여 묘역을 잘 가꾼 탓일까, 묘역은 깔끔하고 위엄 있어 보였다. 계단을 따라 봉분 가까이 둘러본 후, 묘역 이래에 세워진 신도비와 전장터에서 장군의 생가까지 유품을 물고 돌아와 죽었다는 애마의 무덤이 있었다.

 

  임진 정유왜란 중 이순신장군과 원균 장군만큼 대척점에 서서 극단적 평가를 받는 인물은 없다. 백전백승의 이순신 장군은 성웅으로 추앙받고, 경상우수사로 부산포로 몰려드는 왜적과 맞서 싸우지도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함대를 불 지르고 도피했고, 정유재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한양으로 압송되어  억울하게 취조를 받는 동안, 칠천량에서 조선 함대를 전멸시킨 패장이 또한 원균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원균 장군은 전사한 것 아니라 도망쳐 숨어버렸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 이순신 장군과 동급으로 선무일등공신에 원균이 발탁된 것이 놀랍다.  조선조 최악의 임금으로 꼽히는 선조가 자신의 부끄러운 몽진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패장 원균을 1등 공신으로 발탁했을 것이란 추측성 평가도 있다.       

 

  어쨌든, 그의 생가 가까이 묘와 사당, 그리고 최근에 기념관까지 세워져, 말도 많은 그의 생애와 전공을 후세인들로 하여금 돌아보게 한다. 기념관에 상주하는 두 분 해설사가 원균 장군에 대한 일화들을 자세하게 일러 주었다.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외아들도 그와 함께 전사했고, 생가까지 돌아와 원균의 죽음을 알린 말도 선조 임금이 하사한 것이라는 것만 봐도 간신 원균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흔히 이순신 장군을 부각시키기 위해 반동 인물로서 간신 원균으로 부각해, 드라마마나 소설 속에 등장시킨다는 것인데, 원균의 반동적 행동이 없었어도,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업적은 길이 빛날 것이다.  원균 장군을 객관화시켜 왜란 당시 그의 행적을 돌이켜 보면, 그 역시 무도한 왜적의 침략에 희생된 불쌍한 조선의 장수 중 한 명이란 생각이 들었다.        

 

주차장 옆에 있는 모선재

 

원주원씨 문중 제사를 준비하는 곳

 

내리 저수지 위에 조성된 원균 장군의 묘역

 

묘 아래 비석엔 사후 추증된 관직과 선무 1등 공신이란 글이 새겨져 있었다.

 

선조 임금이 원균 장군의 묘를 만들며 지어 보낸 제사문(치제문)

 

아쉽게도 묘비석의 명문은 너무 흐릿해서 읽을 수 없었다.

 

선조 임금이 하사한 말로 칠천량에서 이곳 생가까지 원균의 유품을 물고 와 죽었다는 말의 무덤

 

1981년에 세운 선무1등공신 원릉군 원균 장군의 신도비

 

묘역 가까이 건립된 원릉군 원균 기념관

 

기념관 내부 전시물

 

치제문 : "유만력 33년 세차 을사 정월 18일 계사에 신 예조정랑 유성을 보내어 증 의정부 좌찬성 원균의 영전에 고하여 제사 지내노니 오직 영은 굳센 장군으로 이 나라의 영걸이요, 기품이 만부 중에 특출한 인물이라. 일찍이 호방에 뽑혀서  의장의 창을 잡고 여러 차례 변방에 시험 보아 늠름한 성망이 있었더라. 이에 정전의 전권을 위탁하여 남쪽 바다를 지키게 하니 수로요충이 의연하여 금성탕지와도 같더라. 먼 나라 땅이 순하지 못하여 살기가 충천하니 여러 고을이 바람에 쓸려 더욱 창궐하여 극에 달하였는데, 오직 경만이 용기를 내고 나라를 위하여 죽기를 맹서하고 우리의 군사들을 격려하여 쳐들어오는 적을 방비하고 바다에 나아가 싸우니 날마다 승전 첩보를 올렸도다. 우리의 바다를 보장함은 경이 아니고 누구를 의지하리오. 내가 그 빛나는 공훈을 가상히 생각하여 특별히 승급을 시켰는데, 적이 재차 침범하매 힘을 다하여 맞아 싸워서 승승장구하다가 매복한 적이 밤에 엄습하여와서 불우의 변을 당하니 이는 하늘이 순리를 돕지 아니함이로다.  한 번 패하여 지탱하지 못하니 장군의 죽음은 나의 박덕함에 인함이로다. 장군의 웅도가 영영 사라지고 장엄한 계략을 펴지 못하니 자나 깨나 가슴을 치는 탄식이 그치지 아니하고 피로써 충성을 맹서함이 여기에 이르니 더욱 슬픔이 간절하도다. 이에 종축에 명하여 약간의 제의를 갖추노니, 영이여 알음이 있거든 흠향할지어다." 원균 순국 8년 후, 선조대왕이 예관을 보내어 가묘에 예장하도록 하며 하사한 제문이다.      

 

기념관 이웃에 있는 원균장군의 사당

 

사당 안 원균 장군 영정

'역사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주 석장리 선사 유적지  (2) 2021.05.10
평택 정도전 기념관  (0) 2021.03.22
용인 은이성지  (3) 2021.03.11
김옥균 유허  (8) 2021.03.08
안성 미리내 성지  (3) 2021.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