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의 향기

김옥균 유허

  정안 IC에서 세종시 방향으로 가다가 우연하게 발견한 '김옥균 묘'란 표지판을 보고 궁금했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는 내비게이션에 아예 목적지로 설정하고 찾아갔다. 김옥균은 갑신정변 주역으로 그의 쿠데타는 3일 천하로 끝난 비극이었다. 일본군을 등에 업고 시도했다는 것이 가장 큰 실패의 원인이다. 

 

  큰 도로에서 옛길로 접어들어 커브길을 돌아가는 지점에 출생지가 있었다. 도로변 표지판에서 김옥균 묘라고 해서 찾았는데, 옛길 모퉁이에는 김옥균 유허라 크게 써 안내하였다. 좁은 밭길을 따라 조금 오르니 생가터가 나왔다. 넓은 부지에 낮은 철책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한가운데, 추모비만 하나 뎅그라니 서 있었다. 이곳은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북쪽에 위치한 창동(蒼洞) 시목골(감나무골)이다. 이곳은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38번지로 충청남도에 의해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집터가 보존되어 있는데 방이 3개 정도의 작은 기역자 집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출처 금강뉴스, 2021.3.8; 공주시에서 조금만 신경 쓰면 엉성하나마 복원해서 기념할 수도 있을 터인데, 김옥균의 공과를 따지기에 앞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생가터 안에 들어서서 추모비를 한 참 읽다가 휑한 공터를 한 바퀴 돌아 허전한 마음으로 되돌아 나왔다. 이들이 이루려고 했던 조선의 독립이란 청나라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일본은 그들의 후원자였고... 이들의 1884년 12월 갑신혁명은 무참하게 실패하고,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망명도생을 꾀했지만, 김옥균은 정변 실패 10년 후, 1894년 3월 중국 상해에서 민 왕후가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김옥균이 살해당한 그 해, 1894년에는 동학혁명이 일어나, 수많은 동학 양민들이 일제에 학살당하고, 우리 땅에서 청일전쟁이 전쟁이 일어나 드디어 청나라가 패망하여 조선을 떠나게 된다. 청나라를 등에 업고 위세를 떨던 민 왕후는 청나라 대신 러시아로 대체하려다, 이를 염려한 일본 정치가들이 보낸 낭인들에게 1895년 경복궁 건청궁 자신의 침소에서 무참히 살해되어 불태워지고 말았다.   

 

 그리고 10 년 뒤 1905년 조선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일본에게 뺏기고, 1910년에는 국권마저 잃고 말았다.  지금도 남북이 분단된 채, 경제적으로 거대해진 중국 공산당과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려 애쓰는 모양새가 어째 옛시절 그때와 유사한 것 같아 안타깝다.  

 

생가터 입구

 

  김옥균 생가 안내 표지석

 

추모비

 

단기 4322년, 1989년 공주시에서 오석으로 추모비를 세웠다.

 

유허지 맨 위에 있는 작은 바위

 

 유허지 오른 편에 있는 감나무 

 

유허지 뒤에서 바라본 전경, 탁 트인 전경에 정안에서 세종으로 가는 고가도로가 가로막고 있었다.

충남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38번지

 

갑신정변의 동기와 결과

 

  1882년 임오군란으로 민씨 세력이 축출되자, 민 왕후는 청나라를 끌어 들어 군란을 진압하고자 했다. 조선을 속방화(屬邦化)하고자 했던 청나라는 3000명의 군대를 보내 군란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하여 유폐하였다. 그 덕으로 민 왕후는 재집권에 성공했으나, 조선은 청나라에 종속되어 외교권까지 간섭하는 등 조선의 독립성을 크게 훼손하였다.  민 왕후 일파는 청나라의 속방화 정책에 순응하며 조선의 근대화보다는 사리사욕을 위한 가렴주구에 열중했다.

 

  이에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은 청군을 몰아내고 우리나라의 완전 독립을 이루기 위해 먼저 정권을 장악하여 대개혁을 단행하기로 하고, 1883년부터 무장 정변을 모색하며 준비를 진행시켜 나갔다. 1884년 봄부터 베트남에서 프랑스와 청나라가 갈등을 일으키자, 청국은 5월에 조선에 주둔하던 3000명 중 1500명을 베트남 전선으로 이동시키게 되었다. 그 해 여름 청불 전쟁이 일어나고 청국의 푸첸 함대가 격파되자, 청군의 세력이 약해졌다고 생각하고 결정적 기회로 삼아 개화당 일파는 9월에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처음 독자적으로 정변을 계획했으나 청군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본군의 협조와 경제적 지원을 얻어, 1884년 12월 4일 홍영식(洪英植)이 총판으로 있던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켰다.

  개화당은 우선 국왕과 왕후를 창덕궁으로부터 방어하기 좋은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기고 군사 지휘권을 가진 수구파 거물 한규직(韓圭稷)·윤태준·이조연(李祖淵) 등과 민씨 수구파 거물인 민태호(閔台鎬)·민영목(閔泳穆) 등을 국왕의 이름으로 불러들여 처단하였다. 


  신 정부 각료의 구성은 개화당 요인과 국왕 종친의 연립내각으로 되어 있었다. 개화당으로서는 신 정부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임시적이라도 종친을 중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화당의 소임 분담은 개화당 대표(좌의정)에 홍영식이 추대되고, 재정은 김옥균, 군사는 박영효와 서재필, 외교는 서광범, 국왕의 비서실장 책임은 박영교가 담당하도록 하였다.
  개화당의 신 정부는 12월 5일 새로운 개혁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내외에 공포하였다. 개화당은 동시에 국왕의 이름으로 미국공사·영국총영사·독일영사 등 각국 외교관들을 초치하여 신 정부의 수립과 개혁정치의 실시를 알렸다.

  개화당의 정변에 놀란 청군 측은 12월 5일 왕후 민씨와 연락을 취하여 경우궁이 좁아 불편하다는 핑계를 대며 창덕궁으로 환궁하도록 하였다. 김옥균은 창덕궁은 너무 넓어 개화당의 소수 병력으로 방어에 극히 불리한 점을 들어 반대했지만, 고종의 명에 거역할 수 없어 경우궁 옆의 이재원의 집인 계동궁(桂洞宮)으로 국왕과 왕후의 거처를 옮겼으나, 개화당의 소수 병력으로도 창덕궁보다는 방어가 유리한 곳이었다.  그런데 왕후는 계속해서 창덕궁 환궁을 요구하였고 국왕은 또한 왕후를 적극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옥균은 끝까지 방어에 불리하다는 이유를 들어 단호히 이를 거절했으나,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일본군 병력이면 청군의 공격도 물리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이를 받아들였다. 결국 12월 5일 오후 5시 국왕과 왕후의 거처는 창덕궁으로 옮기었다.

  고종이 혁신 정강을 재결하고 개혁 정치 실시 조서를 내린 12월 6일 오후 3시에 청군은 마침내 1,500명의 병력을 두 부대로 나누어 창덕궁의 돈화문과 선인문으로 각각 공격하여 들어왔다.  이에 대항하여 외위를 담당한 친군영 전후영의 조선 군이 용감히 응전하였으나, 수십 명의 전사자를 내고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여 흩어져 버렸다. 다음은 중위를 담당한 일본군의 차례였으나, 그들은 제대로 전투도 하지 않고 철수해 버렸다. 


  창덕궁의 넓은 지역에서 개화당의 50명의 장사와 사관생도로 편성된 내위만으로는 정면에 부딪힌 1,500명의 청군을 도저히 대항할 수 없어, 갑신정변은 청군의 무력공격에 패배함으로써 개화당의 집권은 ‘3일 천하(三日天下)’로 끝나게 되고 말았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변수(邊樹)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홍영식·박영교와 사관생도 7명은 고종을 호위하여 청군에 넘겨준 후 피살되었다. 그 뒤 국내에 남은 개화당들은 민씨 수구파에 의하여 철저히 색출되어 수십 명이 피살되고 개화당은 몰락하였다.

 

 일본에 망명하여 10여년간 유랑하던 1894년 3월, 김옥균은 이홍장을 만나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당시 일본은 조선침략의 음모를 진행하고 청나라는 조선에서 일본보다 우월한 지위를 누리며 상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또 국내에는 민씨들이 더욱 세도를 부리는 속에 동학농민전쟁의 전초인 고부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민씨들이 보낸 자객 홍종우는 일본에서부터 김옥균의 환심을 산 후, 김옥균과 함께 상하이로 갔다. 상하이 미국 조계에 있는 여관 동화양행에 도착하자 객실에서 그를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김옥균 나이 마흔네 살의 짧은 생애였다.

 

  김옥균의 시신은 조선에 인계되어 4월13일 향화진에 도착, 14일 시신은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3일간 양화진에 효수되었고 17일 몸통 부분은 한강에 던져졌고 사지(四肢)는 경주, 함흥, 충주, 전주, 황주, 강릉, 공주 등지에 보내져 효시(梟示)되었으며 이 시신은 다시 경기도 죽산의 역적을 버리는 죽산 기장(竹山棄場)에 내버렸다. 이때, 사진사였던 일본인 甲斐軍治가 그의 아내를 시켜 김옥균의 유발과 의복 일부를 수합하여 1894년 5월 20일 도쿄의 아사쿠사혼지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도쿄의 아오야마 레이 렌에 매장하였다.  그런 연유로 김옥균의 묘는 일본 됴쿄의 아오야마 레이 렌(靑山靈園)과 신조지(眞淨寺), 그리고 충남의 아산 등 세 곳에 있다. 아산의 묘는 1914년 아산군수였던 그의 양자 김영진이 일본에서 김옥균의 유발과 의류를 수습하여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로 옮겨와 부인 유씨와 합장하여 조성하였다. 

'역사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평택 원균장군 묘와 기념관  (53) 2021.03.17
용인 은이성지  (3) 2021.03.11
안성 미리내 성지  (3) 2021.02.27
매죽헌 성삼문 선생의 묘  (2) 2020.11.23
논산 견훤왕릉  (0) 2020.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