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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논산 견훤왕릉

  호남 고속도로를 다닐 때, 도로변 안내판에서 견훤왕릉 표지를 보고 무척 궁금했었다. 논산 연무대에서 4km란 이정표를 보곤 그리로 향했다. 논산벌 한가한 시골 들판 구릉 위에 견훤릉이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견훤은 후삼국 시대 강력한 카리스마로 신라를 정벌하여, 경애왕을 퇴위시키고 경순왕을 옹립했었던 막강한 인물이었다. 궁예의 뒤를 이은 왕건과 후삼국 통일을 두고 각축을 벌릴 정도로 강력했던 그는 아들들의 불화로 금산사에 갇혔다가 왕건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견훤에게는 열 명이 넘는 아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견훤은 기골이 장대하고 지략이 뛰어난 넷째 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자 세 형 신검(神劒), 용검(龍劒), 양검(良劒)이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 마침내 군사권을 휘어잡은 세 아들은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가두고 동생 금강을 죽인 후 권력을 차지했다.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사위 박영규(朴英規)의 도움으로 고려로 도망쳐 왕건에게 투항했다. 지방 호족들의 신검에 대한 반발도 컷다.  936년에 왕건이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공격했을 때 후백제의 장군들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신검은 고려군의 공격에 맞서 끝까지 버텼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신검은 두 아우와 함께 항복하였다. 신검·양검·용검 등은 한때 목숨을 부지했으나, 얼마 뒤 모두 살해되었다. 견훤 또한 격한 성정으로 전전긍긍하다가 창질이 나서 연산(連山)에 있는 한 절에서 죽었다. 결국 44년 동안 지속되었던 후백제의 역사는 끝이 났다.

 

'삼국사기'에는 “걱정이 심하여 등창이 나 수일 후 황산의 한 불사(佛寺)에서 죽었다.”라고 적혀 있다. 죽을 때 후백제를 일으킨 산이 그립다고 하여 전주의 완산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완산의 칠봉이 보이는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견훤의 묘라 하지만 확실한 고증이 없어 전할 전(傳)자가 붙었다. 또한 1454년(단종 2)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 <은진현조〉에 “견훤의 묘는 은진현의 남쪽 12리 떨어진 풍계촌에 있는데 속칭 왕묘라고 한다.” 라고 하였으며, 1757년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현남 12리에 견훤묘, 현남 13리 금곡사우”라고 밝혔으나 확실치 않다. 1970년 이곳에 견씨 문중에서 ‘後百濟王甄萱陵’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황산벌 동산 같은 구릉 위에 전설 속의 견훤릉은 가을 햇살 아래 조금은 쓸쓸히 누워 있었다. 능 주변으로 행세깨나 하던 조선 사람들의 묘들이 흩어져 후손들의 추앙을 받고 있었다. 그 위에 견훤왕릉은 우람하게 우뚝 솟아 후백제왕의 기품을 뽐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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