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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백제군사박물관과 계백장군 묘

  가을비는 폭우로 변해 쏟아져 내렸다. 자동차에서 내릴 때, 쏟아지는 비 때문에 경황이 없어 마스크를 쓰지 않고 내렸다가 주차장 직원의 지적에 놀라 황급히 자동차로 돌아가 마스크를 쓰고 나왔다. 관람객은 없어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하는데, 잠시 정신줄 놓은 탓이었다. 우산을 썼으나 비때문에 옷이 젖어 들었다. 카메라에 비 맞을까 노심초사 걱정이 많았다. 실내관람이라 편하게 생각하고 가져온 카메라였는데, 우산을 썼음에도 주차장과 박물관의 거리가 멀어 운동화와 옷이 많이 젖었다. 

 

  박물관 입구에서 카톡을 이용해 QR 코드로 인증을 받고 발열 체크 후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무녕왕 능처럼 꾸민 복도를 지나 파노라마 영상관에서 백제 역사를 안내하는 영상물을 시청하고 전시실로 입장했다. 코로나 사태로 제한된 일부 구역만 개방하기 때문에, 3 전시실까지 간단한 관람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관람객이 없어 코로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1 전시실은 백제군 무기 전시실로 장검과 활, 장창과 살상용 긴 낫, 도끼 등이 있었다. 옛날 전쟁은 참으로 잔혹하다. 서로 맞주 보며 베거나 찌르고, 때려서 죽이는 싸움이니까 그 참상은 처참했을 법하다. 그런 전투 씬을 영화로 보면서 흥분하며 열광하는 현대인들의 본능 속에도 잔인한 살상의 본능이 잠재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현장에 자신이 서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모니터를 들여다 보며 쏘고 찌르고 베는 컴퓨터 게임 역시 인간의 잔인한 본능을 충동질하는 상업적 수단이다. 

  농사지으며 가족들과 평화롭게 살았을 지아비나 성장하는 청소년들을 절대 왕권이 징발하여 전장터에 끌고 가 권력쟁취나 영토정벌의 도구로 삼았으니, 전쟁의 나락 속에 빠진 백성들은 얼마나 비참했을까. 개중에는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으나, 대부분은 그저 선량한 사람들이었을 텐데...  전쟁은 인간 만의 잔혹사이다. 동물 중 가장 악랄하고 독한 것이 사람이다. 그 전쟁은 이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교묘하게 숨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인명을 대량 살상하는 최첨단 전쟁으로 발전했다. 

 

  신라나 고구려, 백제, 이 강토 한반도에 살던 이웃같은 사람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고 싸웠다. 외세를 끌어들인 신라의 승리로 삼국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지금 우리는 남북국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무력증강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외세의 개입은 과거보다 훨씬 더 복잡해서 간단한 셈법으로는 계산할 수도 없다. 오호, 통재라....

 

  황산벌에서 백제 결사대 오천 명은 신라 오만 대군에 이곳 황산벌 싸움에서 결국 패하고 말았다. 660년(의자왕 20)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과 백강으로 진격해 오자, 계백 장군은 황산벌에서 5천여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신라 김유신의 5만 대군에 맞서 싸웠다. 전장에 나가기 전에는 가족들이 적의 노비가 되는 부끄러움을 면하기 위해 스스로 부인과 자식을 죽이고 떠났다고 한다. 계백 장군은 죽음을 각오한 결사대의 용맹스러운 활약으로 4번의 싸움에서 이겼으나, 수적인 열세로 말미암아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김유신이 계백 장군의 시체를 찾도록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했는데, 이는 부근의 백제 유민들이 몰래 시신을 거두어 가장곡에 급히 가매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뒤 오랫동안 무덤을 찾지 못하다가 1966년 비로소 찾게 되었지만 발견 당시에는 봉분이 반 이상 무너져 석곽이 노출된 상태였다. 이에 부적면 사람들이 보수하여 지석을 안치하고 내광회벽을 완봉한 후 봉분 둘레 47.6m, 직경 15.15m, 봉분 높이 6.5m로 복묘하였다. 1976년 5월 19일에는 봉토를 만들고 비석을 세워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660년 7월 13일 의자왕이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공격을 피해 사비성(泗沘城)에서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하였다. 이때 웅진성주 예식진은 7월 18일에 오히려 피난 온 의자왕을 사로잡아, 이미 함락되어 나당연합군이 주둔하고 있던 사비성으로 끌고 가서, 당나라군 원수 소정방(蘇定方)에게 바쳤다. 웅진성주의 배신으로 의자왕은 당군의 포로가 되었고 백제는 저항의 구심점을 잃고 멸망하고 말았다. 

 

  8월 2일 의자왕은 나당연합군 측에 굴욕적 항복을 하였다. 이후 9월 3일에 의자왕은 태자 부여효, 왕자 부여태·부여융·부여연(扶餘演) 및 대신·장사(將士) 88명, 백성 12,807명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다. 당시 의자왕은 60대 중반이 넘은 연로한 상태였다. 그해 11월 1일 낙양(洛陽)에 도착하여 당 고종(高宗)을 만나 사면을 받았지만 지친 여정과 나라를 빼앗긴 허망감에 며칠 뒤 병사하였다. 이후 웅진 성주였던 예식진은 당나라에 들어가 당 고종으로부터 궁정의 경비와 호위를 담당하는 정3품의 좌위위대장군(左威衛大將軍)에 제수되었다. 그는 672년 5월 오늘날 중국 산동성 용구시인 내주(萊州) 황현(黃縣)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 고종의 조서(詔書)로 같은 해 11월 21일장안성 남쪽의 고양원(高陽原)에 묻혔다. 사망후 예식진은 당나라에서 내원현개국자주국(來遠縣開國子柱國)의 훈관(勳官)을 받았다. 자신이 섬기던 군주를 포로로 잡아 적국에 팔아 넘기고, 그 적국에서 10여 년을 개인적 영화를 누렸겠지만, 그 더러운 이름과 행적은 우리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옛날 황산벌 격전지에 세운 백제군사박물관

 

백제 역사 영상관

 

고구려 시대 고분벽화 안악3호에서 발견된 그림을 바탕으로 재현한 고구려군 군대 행렬 미니츄어

 

칠지도와 백제군의 무장

 

백제군의 무기

 

황산벌 전투 체험관

 

2층의 2전시관, 무기제조과정을 인형으로 전시하고, 맞은편 벽에는 계백장군의 일대기를 벽화로 보여주고 있었다. 

 

계백 장군의 일대기

 

제 3 전시관, 황산벌 전투현장의 오늘과 주변의 유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밖에 나오니 비가 그치고 일부 햇살이 나기도 했다. 박물관 옆의 어린이 승마 체험장

 

박물관 측면

 

국궁 체험장, 성 위에서 성 마래 과녁을 향해 활을 쏜다.

 

국궁체험장 옆에 전시한 현대전 무기 전시장, 퇴역한 150mm 자주포와 탱크가 전시되었다.

 

멀리 맞은 편 산 위에 계백장군의 동상이 보였다.

 

박물관 좌측에 있는 충장사, 황산전투에서 전몰한 계백장군과 오천여 백제군을 추모하는 사당

 

충장사 옆으로 계백장군 묘로 오르는 길

 

계백 장군의 묘

 

충장사

 

충장사 왼편 산 위에 있는 계백장군 동상, 멀리 탑정호수가 보였다.

 

멀리 탑정호수에 석양빛이 구름을 뚫고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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