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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매죽헌 성삼문 선생의 묘

  연무대에서 쌍계사를 찾아가던 중, 매죽헌로를 통과하게 되었다. 매죽헌이 누구인지 금방 생각나지 않았다. 매죽헌로 갈림길 작은 삼거리에 세워진 '성삼문의 묘'란 표지를 보고서야, 비로소 매죽헌이 성삼문 선생이었다는 기억이 스치듯 떠올랐다. 예전에 선생의 묘가 논산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감격해서 급히 차를 돌려 삼거리 우측에 있는 선생의 묘를 찾았다. 묘는 보이지 않고 사당 앞에 '충문공 매죽헌 성선생 신도비'가 서 있었다. 그 뒤로 무이문(無二門)이란 사당의 정문이 있고, 굳게 잠긴 문 뒤엔 선생의 사당인 성인각(成仁閣)이 있었다. 들어갈 수 없어 담 너머로 성인각을 바라보며 선생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추모하였다. 사당에서 뿜어 나오는 광채가 서산으로 기우는 햇살과 어우러져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셨다. 

 

 사당 왼쪽 좁고 평평한 골을 따라 올라가니, 골짜기 그윽한 곳에 선생의 묘소가 있었다. 늦가을 기우는 햇살에 동북 편을 지향하는 선생의 묘가 눈이 시도록 빛났다. 선생의 묘는 단종이 영면한 영월 장능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멸문지화를 당하면서까지 절개를 굽히지 않은 선생을 배려한 지역 유림들의 마음씨가 고마웠다. 백 년도 채우지 못하는 우리네 인생, 우리의 역사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는 목숨을 바쳐 지조를 지킴으로써 불사이군을 승화시킨 충신의 거울이 되었고, 동료들을 배신하고 부귀영화를 좇은 그의 집현전 친구 신숙주는 변절자의 낙인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단종 복위를 꿈꾸다 실패하여 거열형으로 사지가 찢어져 죽은 매죽헌 성삼문. 그는 특히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13차례나 왕래하며 정확한 음운(音韻)을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학을 연구해오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큰 공헌을 했다.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주군으로 인정하지 않고, 수양대군 세조를 죽이고 영월로 귀양 간 단종을 복위하려다 김질의 배신으로 실패하였다. 세조는 온갖 방법으로 회유했으나 성삼문이 단호하게 뿌리치자 분노하여 멸문(滅門)의 벌을 내렸다. 아버지 승을 비롯하여 동생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과 아들 맹첨(孟瞻)·맹년(孟年)·맹종(孟終) 등 남자는 젖먹이까지 죽여 혈손을 끊고 아내와 딸은 관비(官婢)로 삼고, 가산을 몰수하였다.  

 

   456년(세조 2) 성삼문이 극형을 당하여 찢긴 육신이 팔도(八道)에 조리돌려질 때 그의 한쪽 다리(一肢)를 지고 가던 지게꾼이 고개를 넘으며 힘들고 귀찮은 생각에, 독설을 내뱉자 “아무 데나 묻어라.”라는 소리가 들렸단다. 지게꾼은 크게 놀라 지게를 내버린 채 그 길로 달아났단다. 근처 선비들이 나서서 버려진 성삼문의 한쪽 다리를 수습하여 현재의 자리인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에 묘소를 마련하였다. 매년 음력 10월 그믐에 이곳에서 선생의 위덕을 기리는 묘제 행사를 거행한다고 한다. 선생은 장릉(莊陵 : 단종의 능)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으며, 강원도 영월 창절사(彰節祠), 서울 노량진 의절사(義節祠), 충청남도 공주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고 있다. 저서로 '매죽헌집'이 있다.

 

  성삼문은 대역죄인으로 처형을 당했으나 그의 충절을 기리는 사람들은 사림(士林)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秋江集)'에서 그를 비롯하여 단종 복위 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6명의 행적을 소상히 적어 '육신전'을 남겼다. 이후 이들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왔으며, 그들의 신원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다.

 

  마침내 1691년(숙종 17)에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문(忠文)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791년(정조 15)에는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성삼문 등 사육신 처형 후, 그들의 의기와 순절에 깊이 감복한 의인(義人)이 시신을 거두어 한강 기슭 노량진에 묻어, 오늘날 노량진 언덕에 사육신 묘역으로 전한다.

 

충문공 매죽헌 성선생 신도비와 사당, 왼쪽은 묘소로 올라가는 잣나무 골

 

  사당의 정문인 무이문, 선생에겐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왕통을 승계한 단종만이 그의 주군이었다. 그는 국문을 당하며 죽으면서도 세조를 '전하'라 부르지 않고 '나리'로 불렀다고 한다.

 

정문 뒤의 사당인 성인각

 

서쪽을 등지고 동향으로 앉은 선생의 묘

 

매죽당 성선생지묘라 새긴 묘비석

 

 단종능을 향해 무덤 아래 계단 끝에서 동북 쪽 영월을 향한 잣나무 골

 

선생이 죽기 전에 지은 절명시

 

擊鼓催人命 (격고최인명)   두드리는 북소리가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네 

回頭日欲斜 (회두일욕사)   머리 들어 돌아보니 해조차 기울어 넘어가려 하네 

黃泉無一店 (황천무일점)   황천 길엔 주막도 하나 없는데

今夜宿誰家 (금야숙수가)   오늘 밤은 누구 집에서 자고 갈 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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