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 김만중 문학비가 있었다. 서포 문학비는 광산 김씨 묘역 안 그의 아버지 묘 아래 있었다. 김만중의 아버지 김익겸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고 청나라 군사들로부터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포위되자, 다음 날 1636년 12월 29일 성균관 강독관을 사직한 그는 곧바로 1636년 12월 30일 강화도(江華島)로 가서 의병(義兵)을 거병하고, 1636년 12월 31일 그때부터 두 달 남짓 강화산성(江華山城)을 사수하다가, 결국 두 달 지나 1637년 2월 16일 강화산성이 청나라 군사들로부터 함락되기 직전에 남문(南門)으로 올라가 분신 자결 순국하였으니 그의 나이 23세였다. 아버지 김반의 재혼 정실부인이었던 익겸의 어머니 서씨(徐氏)는 아들의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1637년 2월 22일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말았다. 서포는 아버지 사망 한 달 후에 어머니 해평 윤씨(海平 尹氏 - 윤두수의 4대손, 선조의 서녀 정혜옹주의 손녀)로부터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움 속에서도 홀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에 힘입어 한 시대를 풍미하였고, 어머니를 위한 효심 또한 남다르게 깊었다. 서포의 유명한 '구운몽'은 그가 남해로 유배를 간 시절인 1689년에 어머니 윤씨 부인을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고 전한다.
대전시 유성구 전민동 서포 김만중 선생 문학비와 서포의 석상(石像)
보호각 안에 조성한 서포의 석상, 차라리 보호각 없이 노출하여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김반 김익겸 등 광산 김씨 선산 아래에 있는 재실
재실 뒤, 광산 김씨 묘역
김반과 김익겸 묘역
사계 김장생의 아들이자 김익겸의 아버지, 김만중의 할아버지인 김반의 묘, 그 뒤에 보이는 것은 아들 김익겸의 묘.
김반의 묘비
이곳의 묘들의 대부분은 봉분 둘레 사방에 남근석을 깎아 비스듬하게 박아 두었다. 처음 보는 형식이라 매우 신기했다.
김반의 묘 위에 있는 아들 김익겸(서포 김만중의 아버지)의 묘이다.
좌측으로 광산 김씨 묘들이 즐비했다.
김만중을 기리는 충효소설비, 그 뒤엔 김익겸과 김익겸 어머니 연안 서씨와 김장생의 현손(김만기의 아들)인 김진규의 처 연일 정씨를 기리는 정려각이 있다.
김익겸을 기리는 정려각
김익겸 정려각 옆에 있는 김익겸의 어머니 연안 서씨 정려와 그 뒤 손자인 김진규의 처 연일 정씨의 정려문. 연안 서씨는 김반의 재혼 계배 정실 부인으로 김반의 3남 익겸을 낳았다. 아들 익겸이 젊은 나이로 순절하자, 아들의 뒤를 따라 목을 매 자살하였다.
정려각 옆에 있는 김반 신도비
정려를 보호하는 두 개의 정려각
정려각 위의 재실의 정문인 충효문
김반(1580년~1640년)
사계 김장생의 셋째 아들(三男)로, 일찍이 아버지 김장생과 둘째 형 김집이 사사했던 구봉 송익필에게 글과 학문을 배우고, 그로부터 예학을 전수받았다. 그 뒤 아버지(김장생)와 두 형(김은·김집)에게서 글을 배우다가 1605년(선조 38)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이후 관직에 나갔다.
그 뒤 광해군의 정치에 반대하여 사퇴하였다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빙고 별제(氷庫 別提)라는 직책에 임명되었으나 불과 두 달도 채 아니 되어 또다시 관직 사퇴를 선언하였으며, 그 이후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흥안군 이제를 괴뢰 군주로 천립하여 내세우고자 이괄의 난을 일으켰는데, 결국 이것이 확산되자 아버지 김장생과 함께 충청도 공주로 달려가 인조 호종을 하였다. 바로 공주행재소에서 보인 특별 정시 문과에 급제,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이후 형조 좌랑, 사간원 정랑, 이조 정랑,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홍문관 교리, 홍문관 응교 등을 두루 지냈다.
그 뒤 1635년 병조참지, 사간원 대사간, 형조참의, 홍문관 부제학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하고, 이 과정에서 강화산성을 보위하고 있던 셋째아들(익겸)을 분신자살 순국으로 잃는 슬픔을 겪었으며, 정축하성 이후 예조 참판, 사헌부 대사헌, 한성부 우윤, 이조 참판 등의 요직을 지냈다. 성격은 이렇다 할 유별남이 없이도 원만하여 1639년에 스스로 관직을 그만둘 때까지 공신들과 별 갈등을 겪지 않고 그저 순탄하게 관직을 역임했다. 사후 대광보국숭록대부(증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B0%98_(1580%EB%85%84)
김익겸
여남 김익겸(汝南 金益兼)은 1614년 12월 21일(음력 11월 21일)에, 전직 강원도 철원부사를 지냈던 친할아버지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년 7월 8일~1631년 8월 3일)의 친척손자(親嫡孫子)이자, 형조좌랑을 지낸 아버지 김반(金槃, 1580년~1640년)의 셋째 아들(三男)로 충청도 연산현에서 출생하였고, 성균관 유생 출신으로, 박선(朴璿)과 유평(柳玶)을 사사하였으며, 1635년 생원시에 장원 급제로써 입격하였고, 이어 같은 해 1635년 진사시에 3등 합격하였다. 이후 학행 문음(음서)으로써 천거되면서 1635년 11월 15일에서부터 1636년 12월 29일까지 성균관(成均館)에서 강독관(講讀官)을 지냈다.
1636년 후금 태종 숭덕제(後金 太宗 崇德帝)가 국호를 후금(後金)에서 청(淸)으로 개칭하자 이를 경하하기 위해 청나라에 특파된 사신 이확(李廓)이 양국 교화(조선과 청나라의 정식 외교적인 화의)를 위하여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와 함께 귀국하자, 장차 조선이 명(明)과 청(淸)을 모두 견제하려면 차라리 먼저 조직적으로 명나라와의 비판적 의리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그토록 명과의 비판적 동맹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라도 조선이 청나라를 인정해 준 것은 너무도 명명백백(明明白白)한 잘못이며 오랑캐들의 조정에 가서 축하를 함으로써 조선의 국위와 국격을 훼손한 이확과 청나라 사신 용골대를 모두 죄인으로서 그리고 국제 정치 외교 품격의 훼손으로써 주살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제자들인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공동으로 올렸으나 결국 용골대에게는 끝내 처벌이 내려지지 않았고 이확은 유배형에 처해짐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어 그 해 겨울(1636년 12월 28일)에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고 청나라 군사들로부터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포위되자, 그 다음날인 1636년 12월 29일 성균관 강독관을 사직한 그는 강독관 사퇴를 한 다음날이 되는 1636년 12월 30일 강화도(江華島)로 가서 의병(義兵)을 거병하고, 1636년 12월 31일 그때부터 두 달 남짓 강화산성(江華山城)을 사수하다가, 결국 두 달 지나니 결국 1637년 2월 16일 끝끝내 강화산성이 청나라 군사들로부터 함락되기 직전에 남문(南門)으로 올라가 분신 자결 순국하였으니 그의 나이 24세였다. 그의 어머니 서씨(徐氏) 또한 1637년 2월 22일 목을 매어 자결(自決)하여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그가 자결 순국(분신 자살)한 당일(1637년 2월 16일)에는 또한 강화도에 같이 함께 남아 있던, 77세 노구(老軀)의 강화유도대장(江華留都大將)이었던, 왕고모부뻘 김상용(金尙容, 김익겸의 대고모(친조부 사계 김장생의 누이동생)를 측실로 삼은 대고모부뻘.)과, 31세 청년이자 동료였던 별좌 권순장(權順長), 사강원 예하 필선 등을 지낸 62세 진갑을 두어 달 남짓 앞둔 관료 출신의 윤전(尹烇) 등 또한 강화산성에서 청나라 군사에 결사 항거하다가 화약고를 갖다 놓고 동석에서 같이 불을 질러 함께 동반하여 분신 자결했으니 당시 분신 순국 사망자는 30여 명이었다.
그가 절박하기 짝없는 우국충정으로써 순절하자 충청도 회덕군 구즉면 전민리(지금의 대전광역시 유성구 전민동)에 매장되고 이후 그의 일가 묘역이 일대에 조성된다. 바로 증(贈)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에 증직(추증)되고, 1662년(현종 3) 묘비가 세워졌으며, 묘비문은 친구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썼다. 1661년(현종 2년) 4월 27일 강화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후일 그의 묘 아래에 아버지 사일 김반의 묘가 조성되었다.
후일 다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가증(추가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부인은 해평 윤씨(海平 尹氏, 1617년 9월 25일~1689년 12월 22일) - 오음 윤두수(梧陰 尹斗壽)의 4대손, 선조의 서녀 정혜옹주의 손녀이다. 그가 1633년 1월 23일 20세 때에 출생한, 그의 첫째 아들 서석 김만기(瑞石 金萬基)는 숙종(肅宗)의 정비(正妃)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아버지이고, 그가 1637년 2월 16일에 강화도(江華島)에서 만23세로 분신 자결 순국한 그 다음달인 1637년 3월 6일 당시에 유복자로 출생한, 그의 막내 아들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은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라는 작품으로도 유명한 소설가(小說家)이자 문신(文臣)이다.
출처: <위키 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D%B5%EA%B2%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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