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의 향기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성지, 서울 효창원

 윤건희 정권이 몰락했으니까 뉴라이트 친일 세력들의 극성도 한물갔으면 좋으련만, 도처에서 일부 종교세력과 결탁하여 미친놈 널뛰듯 설쳐대니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파 후손들이 득세한 것도 서러운데,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을 욕보이기까지 하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어이가 없다. 뉴라이트 세력들이 고개를 든 것이 아마도 이명박 정부 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주가조작 사건을 일으킨 BBK의 창립자이자 자동차 시트를 만드는 다스의 실제 소유주임에도 시종일관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며 당선되었던 이명박이었다. 그런 대통령이 권력을 앞세워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꿔 부르며, 수면 위로 그 존재를 들어내기 시작했다. 일제에 끌려가 성적 학대를 받은 위안부들을 모독하고, 안중근 장군을 테러리스트라 지칭하니, 그리 주장하는 자들의 종자가 의심스럽다. 일설에 의하면, 패전 후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우리나라에 눌러 붙어사는 일본인들의 수가 오륙만을 넘는다고 한다. 그들을 욕하고 꾸짖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일제 강점기 시절 무도한 일제에 당한 우리 민족의 고초를 생각한다면 부끄러워 입도 떨어지지 않을 텐데, 염치도 없는 그들의 주장이 불쌍하고 가련하다. 

 문득 백범 선생이 생각나서 효창공원으로 걸음을 뗐다. 더위도 한풀 꺾인 모양새라 활동에 부담이 적었다. 옛날에 효창운동장 축구 중계를 곧잘 봐온 터라 머릿속에 각인된 곳이기도 하다. 효창 공원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이 나라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시거나 신명을 다하신 선열들을 모신 곳을 공원이라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한때 효창공원 내의 애국선열들의 묘소가 이장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2013년 효창공원을 국립묘지로 지정함으로써 관리주체를 지자체가 아닌 국가로 바꾸고자 하는 법안이 발의되었다. 그런데 효창공원 내의 묘소가 국립묘지가 되면 공원 이용 시간에 제한을 받게 되고, 묘지라는 명칭 때문에 주변 집값이 떨어지는 등 주민 불편을 초래할 수 있다며 용산구의회에서 이 법안 제정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다 한 술 더 떠 국립묘지화 반대를 주장하는 주민들 사이에서 '차라리 묘지를 이장해 가라'는 요구까지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여론의 뭇매를 맞고 흐지부지 되었다. 
 다만 효창공원 성역화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애국선열들의 묘소가 있는 효창공원이 유원지화되는 것을 볼 수 없으니 그에 맞는 예우를 하여야 하고, 원래 조선 시대부터 정조의 아들인 문효세자의 묘소가 있던 곳으로 효창원(孝昌園)으로 불리던 곳이었으므로 원래의 명칭인 효창원으로 되돌려야 한다며 효창공원이라는 명칭을 거부하고 있다. <나무위키 인용>

 광복 80주년을 맞아 국가적 차원에서 '효창공원'이란 이름은 걸맞지 않다. 독립지사들을 모신 민족의 성지인 이곳을 국가적 차원에서 재정립해야 한다. 과거를 잊은 자는 미래가 없다.  

 

 

정문인 창렬문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돌아가면 임시정부 시절 요인들의 묘가 있다.

 

왼쪽부터 조성환, 이동녕, 차리석 선생의 묘.

 

정문 뒤로 되돌아오면, 초입 중앙에 세운 상징 조형물.

 

정문에서 왼편으로 조금 걸으면 삼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를 모신 묘가 있다.

 

왼쪽부터 안중근 의사(가묘),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의 묘이다. 제단 뒤 석축에 '遺芳百世'라 새겼다. 글구절 그대로 이들의 꽃다운 이름은 후대에 길이 남겨질 것이다.

 

삼의사의 묘 오른쪽 산책로에 조성한 광복 70주년 기념광장.

 

한 맺힌 사연들을 간직한 태극기들이 조형물 유리막 안에 전시되었다.

 

기념광장 왼편에 있는 의열사, 이동녕, 김구, 조성환, 차리석,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7인의 영정과 위패를 모셨다. 

 

의열문

 

오늘(9월 2일)은 안중근 의사 생신일이란다.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는 행사가 막 끝났다. 

 

좌로부터 삼의사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의 영정과 위패

 

좌로부터 임시정부 요인인 차리석 선생, 조성환 선생, 김구 선생, 이동녕 선생 영정과 위패

 

동편 벽에 모신 오늘의 주인공인 안중근 의사의 영정과 위패

 

의열사 왼편에 모신 김구 선생의 묘역

 

의열사 왼편 백범 기념관 아래에 있는 이봉창 의사 동상. 이봉창 의사가 태어난 생가가 이곳에서 500m 부근이라 한다. 

 

이봉창 의사 동상 뒤편에 있는 백범기념관

 

기념관 안 백범 김구 선생 좌상 

 

동상 앞 왼편 전시관 입구에 있는 백범어록, 선생의 말씀대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문화가 세계의 중심이 되고 있다. 

 

전시관 

 

김구 선생 가족사진

 

앞줄에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동상, 그 뒤로 며느리 안미생(안중근 의사의 조카) 장남 김인, 김구 선생, 아들 김신

 

1876년생으로 본명은 김창암이었다. 1893년 18세에 동학 입교하여 김창수로 개명하고, 1894년 19세에 황해도 팔봉접주가 되어 그해 9월 포수 700명을 모아 해주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1912년 37세 때 김구로 이름을 바꿨다.

 

동학혁명 실패 후, 이듬해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을미사변의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주막에서 변장한 일본군을 국모시해범으로 추정하고 살해하였다. 이 사건으로 선생은 사형 판결을 받고 인천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하였다.  죄수 생활을 하며 감옥 안에서 문맹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탈옥 후, 공주 마곡사에 은거하다가 상해로 망명하여 1919년 임시정부에서 경무국장이 되었다. 1921년 1월 1일 임시정부요원 신년 기념사진 

 

김구선생 추모의 공간

 

추모의 공간 창밖으로 보이는 선생의 묘

 

광복군 활동 사진

 

장개석 총통과 회담하는 김구 주석

 

남북분단을 반대하며 북한 김일성을 만나기 위해 38선을 넘는 김구 선생

 

1949년 6월 26일 대통령 이승만에게 절대 신임을 받던 특무대장 김창룡의 사주를 받은 육군 소위 안두희의 권총 저격으로 74세로 경고장 자택 2층에서 서거하셨다.

 

김구 선생의 어록

 

기념품 판매점

 

기념관 바깥 풍경

 

 원래는 효창원으로, 정조의 큰아들인 문효세자·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숙의 박씨의 자녀인 영온옹주의 무덤이 있었다. 특히 의빈 성씨는 정조가 가장 사랑했던 궁인 성덕임으로 아들을 낳고, 후궁이 되었다. 그 아들이 생후 22개월에 세자로 책봉된 문효세자이다. 세자는 정조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46개월 만에 돌림병인 홍역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슬픔에 빠진 정조대왕은 궁에서 보이는 울창한  소나무 언덕 숲에 아들을 묻고, 아들을 바라보듯 지척에 두고 싶은 애틋한 마음으로 효창원을 만들었다. 세자가 죽고 5개월 뒤에 생모 의빈 성씨마저 세상을 떠나자 정조는 의빈 성씨를 문효세자 옆에 묻어주었다. 정조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묘에 몇 번이나 거둥(왕의 행차)하였고, 이 때문에 오늘날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의 이름이 거둥 고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정조와 의빈 성씨의 사랑 이야기는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으로 제작되어 MBC에서 2021년 말 17부작으로 방영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일인들이 왕실의 능원을 훼손하여 문효세자의 묘를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기고 이곳을 골프장으로 만들어 효창원은 효창공원이 되었다. 서삼릉에 옮겨간 문효세자의 묘는 효창원이라 부르고, 곁에 묻힌 어머니 의빈 성씨의 무덤은 조금 떨어진 곳에 조선 시대 후궁들의 묘를 모은 영역에 분리 이장하였으니, 일제의 간악함은 죽어서 함께 하고자 하는 모자의 연까지도 끊어 놓았다.

 

서삼릉 안의 효창원과 의빈성씨 묘

 

 광복 후 김구·이동녕·이봉창·윤봉길·안중근을 비롯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무덤을 모시게 되었으며, 매년 이 분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