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을철에 접어들었음에도 날씨가 흐리고 장마처럼 비가 자주 내린다. 무더위보다는 차라리 시원한 빗방울이 좋았다. 가뭄에 고통받는다는 강릉 사람들에게도 단비가 내린다니 고마운 일이다. 우산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모처럼 비 오는 날 경복궁 근정전에 가볼 참이다. 유홍준 님이 경복궁을 해설하며 박석 위에 떨어지는 빗물이 아름답다 하길래 그 운치를 맛볼 요량이었다. 경복궁 역에서 지하도를 따라 고궁 박물관에 도착했을 때, 지하도 밖은 억수로 쏟아지는 빗물이 계단을 따라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쏟아지는 빗줄기의 기세에 놀라 잠시 고궁 박물관 안에서 한숨 돌리며,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비가 멎을 기세가 없어 과감히 우산을 쓰고 경복궁 경내로 들어섰다. 비 오는 탓으로 관람객은 많지 않았으나, 원통 치마를 입은 한복 여성들이 대책 없이 빗물에 치마를 쓸리고 있었다. 아름답지 않은 풍경이었다. 허리 뒤로 묶은 치마 끈이며, 정강이 부분에 원통을 넣은 치마들을 퓨전 한복이라며 대여점에서 빌려주지만, 내 보기엔 전통성을 상실한 싸구려 금박 입힌 중국산 짝퉁일 뿐이다. 문화재청에서 격식에 맞는 한복 입은 사람들만 무료 입장시키면 짝퉁한복은 일거에 사라질 텐데 아쉬운 일이다. 근정문 안으로 들어가 회랑에서 비를 피하며 박석에 떨어지는 빗소리와 빗물들의 아름다움을 느껴보려 했으나, 주변의 소음과 꺼먼 흙먼지들이 쓸려 내려 고인 빗물의 모습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흩뿌리는 빗방울에 카메라를 감싸고 조심스레 근정전 풍경을 몇 컷 담아 보았다.
중국인들이 내국인보다 많았다. 비 오는 날 경복궁을 찾는 내국인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겠지만... 사진사를 대동하여 한복을 차려입고 사진을 찍는 커플들이 몇 보였다. 장대비를 맞으며 카메라까지 적셔가며 사진을 찍는 사람이나 빗속에서 모형 칼을 차고 여러 동작으로 사진을 찍는 젊은 중국인이 안쓰러워 보였다. 조선이 무를 숭상한 나라가 아닐진대, 드라마마다 갓을 쓴 선비들이 칼을 들고 다니는 폼이 중국 무협 영화나 일본 사무라이 영화의 아류는 아닌지 반성해 볼 일이다.
심미안을 가진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같은 눈으로 보아도 느끼는 감정이 다름으로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감동이 다르다. 보편적 인간의 감성과는 또 다른 것이니 엄청난 혜택이라 할 수 있겠다. 유홍준 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보면 그의 탁월한 식견과 심미안에 공감하는 바 크다. 그러나, 때로는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기우에 잠길 때도 있다. 아름다움을 느끼려 해도 아름다움에 크게 공감하지 못하면 식자의 탁견을 쫒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크다. 하지만 억지로 감동할 필요는 없겠다. 그럴 수 있으려니 인정하는 것으로도 작은 경험치가 쌓이게 되는 것처럼 그것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비 오는 날 근정전 박석에서 커다란 감동을 받진 못했어도 맑은 날 보기 어려운 고궁의 색다른 빛깔을 마음에 담은 것으로 오늘의 노고를 위로해 보았다.
매표소 앞, 흥례문 광장

영제교와 근정문

영제교 양편에 돌로 만든 천록(天鹿)이 빗물을 튕겨내는 물을 바라보고 있다. 임금이 선정을 펼치면 나타난다는 상징적 동물이란다.




비 내리는 근정전, 근정전 마당을 덮은 박석 위에 비가 내려 좌우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회랑에서 비를 피하며 박석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한참이나 보고 있었다. 유홍준 님이 느낄 수 있다는 아름다움은 느낄 수 없었다. 주변이 시끄러워 아름다움을 모른다는 것은 아마도 핑계일 것이고, 소양이 부족하고 모자란 눈썰미 때문이겠다. 회랑을 따라 근정전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근정전 밖 수정전, 예전에 훈민정음을 창제하던 집현전 건물이다. 인왕산에서 구름이 올라가는 걸 보니 비가 곧 그칠 것 같았다.


경복궁 경내를 걷는 동안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맑은 하늘이 보였다.




신무문

건춘문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동문, 근정전과 멀리 인왕산.

비 그친 뒤, 동쪽 수로 부근의 박석 위 빗물


광화문

경복궁 근정전의 마당인 조정(朝廷)에 놓인 박석은 거칠게 다듬어져 있다. 이렇게 깔린 박석은 햇빛이 반사되는 눈부심을 줄여준다. 그리고 박석의 표면이 거칠기 때문에 가죽신을 신은 대신들이 미끄러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박석의 표면이 울퉁불퉁하여 조심스럽게 걸어야만 했다. 또한 비가 오면 박석은 자연스러운 배수를 이끌었다. 근정전 앞마당, 종묘의 월대, 왕릉의 진입로인 참도 등에 깔린 박석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꾀하는 우리 문화의 특질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박석에는 조상들의 슬기와 지혜가 숨겨져 있다.
조선시대 궁궐 공사에 사용되는 석재는 그 돌의 중량을 고려하면 가까운 곳에서 채석했다. 1667년 종묘 영녕전을 수리할 때는 서울 외곽에 있는 조계산에서, 18세기 궁궐 공사를 할 때는 창의문 밖이나 남산 인근에서 채석했다고 한다. 궁궐 공사를 할 때 사용한 다양한 용도의 석재들은 서울 가까운 곳에서 구했다. 그러나 바닥에 까는 박석은 인천광역시 강화에 있는 석모도나 해주에서 채석한 것만 사용하였는데, 특히 석모도 박석을 많이 사용하였다. 1647년(인조 25) 창덕궁 공사를 할 때 사용된 박석은 모두 석모도에서 채석되었고, 1906년 경운궁 중건과 대한제국 시기에 진행된 공사에도 석모도 박석을 사용하였다.
석모도 박석들은 수운을 통해 한강 유역을 거쳐 도성으로 운반하였다. 석재는 용산강(龍山江, 지금의 용산)에 하역하고, 수레를 이용하여 남대문을 거쳐 도성의 공사장으로 옮겼다. 겨울철에는 얼음 위로 썰매를 이용하였고, 육지에서는 마차나 달구지로 운반하였다. 석재는 무게가 많이 나가기 때문에 바퀴가 낮은 수레를 사용했다. 도로의 상태는 육로 운송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때문에 육로 운송 전에 도로의 상태를 점검하고 도로면이 울퉁불퉁한 부분은 보수한 후 운송하였다. 박석은 궁궐 정전처럼 위상이 높은 건축공간에 한정한 부재였다. 석모도 박석은 이외에도 강화도 돈대축조에도 사용되었다. 또한 1960년대까지는 구들장에도 사용되었는데, 오늘날 문화재수리에 사용되는 박석도 석모도에서 채석된다. 2008년 광화문 복원공사나 2009년 숭례문 복구공사에도 석모도에서 채석된 돌이 사용되었다. 석모도 채석장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에 있는 해명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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