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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독립운동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 화성시 독립운동기념관

 제암리 3 1 운동 순국지에 화성시 독립운동기념관이 새로 들어섰다는 글을 우연히 접하고, 반가움에 부리나케 찾아갔다. 내비게이션 안내가 예전과 달라 마을이 크게 달라졌겠다고 생각했으나 마을은 변함이 없었다. 예전 기념관 아래 주차장과 독립운동기념관을 새로 건립하였다. 새로 지은 독립운동기념관은 지하에 건립하여 독특한 형태의 건축물이었다. 기념관 입구로 한참 내려가는 동안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듯 착각이 들 정도로 길고도 넓었다. 

 예전 기념관은 1919년 4월 15일 맇본 헌병들의 제암리 교회 마을 주민 23인 학살사건과 인근 고주리 마을 일가족 6명 살해 내용을 중심으로 다루었는데, 새로 지은 독립운동기념관은 범위를 화성시로 넓혀 기념하였다. 첨단 미디어 시설로 사실적이며 상징적인 영상들을 보여주었으나, 제암리 만세운동 순국의 기록들이 소홀하게 다뤄진 느낌이 없지 않았다. 80년대 전두한 정권이 건립한 독립기념관 관장에 친일파 인사가 관장이라 버티고 앉아 순국열사들과 독립운동가들을 모욕하고 낯 뜨거운 망언들을 배설하는 현실에 화성시에서 새로 만든 기념관은 하나의 경종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내 자신을 위로해 보았다. 

 제암리는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에 소재하는 마을로, 옛날에는 두렁바위라고 불렸던 작은 마을이다. 1919년 3월에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자, 제암리가 있는 화성시 향남읍 발안에서도 3월 30일 발안장날 시위 당시 군중들이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에 일본 헌병들은 이를 보복하고자 4월 15일 향남읍 제암리와 팔탄면 고주리에서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일제 헌병들은 발안에 살던 일본인 사사카와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을 내세워 제암리 주민 가운데 성인 남자(15세 이상)들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문에 못질을 한 뒤, 교회 안에 일제사격을 했다. 사격 후 교회 초가지붕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교회에 불이 붙자 '홍'(홍순진으로 추정)과 '면에 다니던 사람', 그리고 '노경태'(노불의 증언에는 '노')가 탈출을 시도하여 '홍'은 도망치다가 사살되었고, '면에 다니던 사람'(안상용으로 추정)은 집으로 피신했다가 발각되어 살해당했고, '노경태'는 산으로 피해 살아남았다. 탈출하다 사살된 시체 두세 구가 교회 밖에 있었고, 마을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온 '강'(강태성)의 아내(19세)를 일본 헌병들이 무릎을 꿇리고 칼로 목을 쳐서 살해하였다. '홍씨'(홍원식 권사) 부인도 군인들의 총을 맞고 죽었다. 이후 일제 헌병들은 이웃 마을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여섯 명을 총살했다. 이렇게 일제에게 무참히 학살당한 주민들은 모두 29 명이었다.  제암리에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이 사건 이튿날 신속하게 외부에 알려지게 된 것은 언더우드, 테일러 일행이 자동차로 수촌리현장을 확인하러 가던 도중 우연히 제암리의 참상을 목격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스코필드선교사는 4월 18일 단독으로 제암리와 수촌리를 방문한 이래 수차 왕래하며 사후 수습을 돕는 한편, 사건 보고서를 캐나다와 미국의 친지들에게 전달하였으며 "끌 수 없는 불꽃"이란 책을 펴서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크게 알렸다.

 

주차장 앞 기념관 입구

 

긴 시멘트 벽으로 된 통로를 한참 내려가면 지하의 독립운동기념관이 나타난다. 

 

출입문 안 로비

 

입구와 안내 데스크

 

기념관 전시실로 가는 지하 복도

 

복도 벽에 걸린 대형 무궁화 태극기

 

상설전시관 입구

 

화성 의병 항쟁 기록 전시실

 

기미독립선언문, 낡은 선언문 위로 꽃잎들의 영상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화성 마을들의 만세 운동

 

디지털 영상으로 보여주는 제암리 교회 학살 영상 - 꽃이 피고 지는 아름다운 농촌마을 제암리

 

제암리 교회 밖에 광풍과 비가 어지럽게 내린다.

 

일본 헌병들이 밖에서 문에 못질을 하고 교회 안으로 총을 난사한다. 

 

사격 후 교회에 불을 질러 제암리주민 23명을 학살한다.

 

폐허에서 꽃이 피고 순국한 선열들은 빛이 되어 하늘로 오른다.

 

스코필드 박사의 방문과 현장 사진 전시관

 

3 1 운동 이후 화성 지역의 독립운동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강제동원의 현실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들의 증언과 영상

 

출구에서 빛나는 화성의 독립운동가

 

특별전시관 - 1945년 7월 24일, 일본 패망 직전에 거행된 부민관을 폭파하여 친일파를 제거하려던 조문기 선생 기념 전시 

 

 경성 부민관(현 서울시의회)에서 7월 24일 저녁 주최자인 박춘금을 비롯해 조선총독·조선군사령관 등 일제 총독부 고관과 중국측 대표 정원간(丁元幹)·정유간(鄭維幹), 만주국 대표 강춘전(康春田), 일본측 대표 다카야마(高山虎雄) 및 국내 친일파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전쟁수행 찬성을 위해 아시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했다. 주최자인 친일파 박춘금이 등단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위한 매국매족의 궤변을 토하고 있던 순간, 요란한 폭음소리와 함께 장내가 수라장으로 변하였다. 대의당원 한 사람이 폭탄 선을 잘못 건드려 예정보다 빨리 폭발하였다.

 비록, 침략자와 그들의 주구인 친일파들을 제거하지 못했지만 회의 자체를 좌절시키고 독립을 열망하던 대한인의 기개를 다시 한 번 과시한 사건이었다. 이 폭음에 놀란 일본 경찰은 황급히 모든 문을 잠그고 범인을 검거하려 했으나, 조문기 등 애국청년당원들은 이미 그 자리를 피해 잡히지 않았다.

 

조문기 선생 (1927.05.19~2008.02.05)의 어록

 

조문기 선생의 휘호

 

어린이 체험관

 

전시관 복도 옆의 휴식 공간인 카페

 

전시관 유리창 밖 풍경

 

지상에서 내려다본 독립운동기념관

 

주차장 너머로 제암교회 첨탑이 보였다.

 

제암리 마을

 

순국열사를 기리는 상징적 조형물

 

예전 제암리 순국 기념관이 이제 제암 교회 부속 건물이 되었다. 

 

순국열사들을 모신 합장묘로 올라가는 계단

 

3 1 운동 순국열사 23인 합장묘, 일제는 교회 안에 가두어 총칼과 방화로 학살된 23 명의 시신은 스코필드 박사가 수습하여 인근 도이리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 1982년 정부에서 유해를 발굴하여 제암리 교회 뒤편 언덕에 모셨다.

 

일본인들의 성금으로 제암리 교회터에 지었던 제암교회는 퇴락한 모습으로 3 1 정신 교육관이란 현판을 달고 역사의 뒷켠으로 밀려나 있었다.

 

3 1운동 순국기념탑 -1959년 불탄 제암교회 현장에 제암리 고주리 순국선열 29인(제암리 23인, 고주리 6인)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제암리 순국 기념관 앞으로 옮겼다가 이 자리로 다시 이전했다. 탑 전면의 글씨는 이승만의 친필이다.

 

3 1 독립운동기념비 - 1946년 제암리 고주리 순국선열들을 기리기 위해 제암리 입구에 세운 최초의 기념비이다.

 

1919년 4월 15일에 자행된 일제의 제암리 학살 사건을 사진으로 찍어 해외로 알린 스코필드 박사의 동상

 

1983년 새로 세운 3 1 운동 순국 기념탑, 탑보다는 비석이라 불러야 할 듯하다. 1959년 세운 기념탑의 글씨를 그대로 옮겼다.

 

주차장

 

 제암리 역사기념공원을 두루 돌아 주차장으로 원점회귀하였다. 그동안 제암리는 수차례 방문했던 곳이었으나, 작년에 건립했다는 독립운동기념관은 첫 방문이었다. 순국열사들을 위해 새로 단장한 기념관이 반갑긴 하지만, 예전 기념관에 비하여 제암리 학살 사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어 아쉬웠다. 구체적 내용보다 디지털 화면으로 추상적 상징화를 통한 울림은 진일보했으나, 그것도 실체를 모른다면 쉽게 이해하지 못할 일이겠다. 기념관 주변의 황량한 풍경이 아쉽다.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친 전선들과 고압선, 높은 철탑들이 아직도 계획없이 난개발되는 화성시의 민낯 같아 보였다. 추분이 지났지만 가을햇볕은 몹시 따가웠다. 햇살에 익어서인지 일제에 그렇게 당하고도 노골적으로 일본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실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인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2018년 9월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 https://fallsfog.tistory.com/628

2011년 3월 제암리를 아시나요? : https://fallsfogs.tistory.com/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