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의 향기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16주년, 늘어나는 자생적 친일파

 올해로 안중근 의사께서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 러시아령 하얼빈 역에서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고 초대 한국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사살한 116주년이다. 이제 우리나라가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 경제 선진국이 되었다. 어느덧 광복 이후 80여 년의 시간이 흐르자 일제의 잔혹한 국권침탈의 역사가 우리에게 너무 쉽게 잊히고 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수많은 조선인을 살상하고 경제를 수탈했던 일제를 대놓고 찬양하는 세력들이 자생적으로 우후죽순처럼 자라고 있다. 이명박 정권시절부터 머리를 내밀기 시작한 뉴라이트 친일세력들은 윤석열 정권에서 노골적으로 정관계에 진출하여 거침없는 망언을 쏟아내고 있어 분통을 자아내고 있다. 안의사를 비롯하여 독립운동에 목숨 바치신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지는 못할 망정 스스로 친일파가 되어 일본을 찬양하는 짓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실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로부터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인간의 근본 도리라 하지 않았던가. 

 광복 후 친일파를 처단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정치적 배후로 삼았던 이승만 독재 정권과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만주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관동군 장 출신인 박정권이 일제에 대한 향수와 일본식 경제를 모방하여 우리나라를 산업화한 것에 그 근본 원인이 있다. 박정권은 일제의 황국신민서사와 같은 국민교육헌장과 메이지 유신을 모방한 유신헌법, 정경유착 등으로 민족중흥으로 미화된 전제적 국가관을 국민들에게 강제로 주입했다. 이러한 독재교육은 일종의 권력숭배 방식이 되어 18년 독재정치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권력 숭배는 대통령에 대한 절대복종과 강한 자에 대한 복종을 축복으로 여기는 친일지상주의로 연결되어 일제를 미화하는 자생적 친일파가 나타나게 되었다. 거기에 일제강점기 친일파였던 그 후손들이 그 조상들의 과오를 덮기 위해, 3.1 정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나섰다. 1948년 8.15 정부 수립일을 건국절로 둔갑시키려는 이명박 정권의 불순한 의도가 저변에 깔려 이른바 뉴라이트 친일파들이 부끄럼 하나 없이 당당하게 나타나게 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일본을 찬양하는 종교세력까지 정치에 개입하여 친일을 노골화하며, 전 정권 탄생의 모사꾼 역할을 했던 건진은 집에 법당을 차리고 일본 신화 속의 태양신 아마테라스를 모시고 의식을 치렀다 하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꽃다운 나이에 일제에 희생된 위안부들을 추모하는 모임에서 반대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한민족의 자손이 아니란 말인가. 3.1절에 일장기를 날리거나, 자동차에 욱일기로 도배하여 일본을 찬양하는 자들은 관종도 아니고 도대체 그들의 정체와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법으로 다스리지도 못하고 수수방관하는 현실이 더 서글프다.   

 수많은 조선인을 학살하고, 국가 유산을 파괴하고 한민족의 정신마저 말살하려고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질렀던 일제를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의 분단된 한반도의 비극도 일제에게 국권을 침탈당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패전한 일본은 오히려 온전한 나라를 보존하여 경제 대국이 되었고, 피해받았던 한반도는 허리가 잘려 동족상잔의 비극까지 겪게 되었다. 치열하게 각축하는 국제정세 속에 현재의 일본과 원수로 지내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과거를 잊은 자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일본제국주의 가혹하고 악랄했던 식민통치의 혹독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지나며 자생적 친일파들이 득세하여 망언을 일삼는 오늘의 현실이 몹시 개탄스러웠다.        

 

서울 남산 일제 강점기 일본 신사터에 세운 안중근 의사 기념관 

 

지하 입구로 들어가는 통로 벽에 안중근 의사의 휘호를 새겼다. 

 

기념관 중앙 홀에 모신 안중근 의사 좌상

 

자료 전시실

 

안중근 의사의 활동 지역

 

1908년 초 안의사는 동지 11 명과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여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며 왼 손 약지를 잘라 '大韓獨立'이란 혈서를 썼다.

 

1909년 10월 28일 9시 30분 하얼빈 역에서 국권 침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살해하였다.

 

안의사가 밝힌 이토의 죄악상

 

거사 이후 뤼순 감옥에서 독서와 서도, 집필로 심신을 달래는 안 의사 영상, 안의사 유필은 국가보물로 지정되었다.

 

신실한 천주교도였던 안의사. 세례명 '도마'였던 안의사의 옥중 편지, 조선 천주교는 일제에 협력하고 친일하여 안의사를 살인자로 몰아 파적 시켰다. 해방 이후 1993년에 이르러 김수환 추기경이 안의사의 공적이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201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진석 추기경에 의해 가톨릭 신자로 공인되었다.  

 

재판받는 모습 재현, 안의사는 대한제국 의병부대의 참모중장이므로 만국공법에 따라 포로로 대접할 것을 요구했다. 이와 아울러 자신이 이토를 처단한 이유로 그의 죄악 14개 항을 조목조목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모두 묵살되었고 옥중에서 자서전과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던 중 1910년 3월 26일에 처형되었다. 순국할 당시 그의 나이 31세였다.

 

안의사의 의거는 이후, 강우규, 김상옥, 윤봉길, 이봉창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에 계승되었다.

 

안의사의 휘호

 

2010년 새로 건립한 안의사 동상,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저격한 후, 평온한 모습으로 품안에 태극기를 꺼내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