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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아산 이 충무공 묘소

  온양 갔다 오다 들렸던 충무공 묘소. 아산시 음봉면 4거리 가까운 곳에 있다. 현충사 현판 문제가 회자되는 가운데 현충사보다 더 뜻깊은 충무공 묘소에 들렸는데,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때마침 관리소 직원분을 만나 묘소에 얽힌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곳은 덕수 이씨 문중의 산으로 충무공을 비롯한 덕수 이씨들의 선산으로 쓰였는데, 충무공 묘소 영역은 국가에서 관리한다고 한다. 묘소 앞 상석 아래 조화로 만든 화분이 두 개 있었는데, 천안에 사시는 어느 할머니가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하여 헌화하신단다. 국가적 공경도 중요하지만 이름 모를 민초의 가슴에서 우러나온 헌화가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참배객 중 한 노인은 상석아래 엎드려 조용히 큰 절을 올렸다. 스쳐 지나가는 참배객들도 큰 절은 아니지만,  충무공 봉분 앞에서 가벼운 목례로 경배드리고 떠나갔다. 난세에 임금으로부터 핍박받으면서도 국가와 백성들을 위해 목숨 바치신 충무공. 장군이 아니었더라면 일찍이 조선은 왜적의 말발굽 아래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 것이었다.  

  북한의 핵개발로 어지러운 요즘에 나라의 안위보다 자신과 제정당의 목숨부지에만 광분하는 정치세력들의 황당한 궤변에, 자신의 희생으로 나라를 구하신 충무공의 애국애민의 정신이 가슴을 친다.    

 

  1598년(선조 31) 정유년(丁酉年) 12월16일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승리를 거두고 전사하신 충무공의 유구는 최초로 관음포에 올려졌고 남해 충렬사에 안치되었다가 고금도를 거쳐 충청남도 아산으로 옮기었다. 처음 아산군 금성산에 만들었다가 16년 후인 광해 6년(1614)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묘는 둥그런 공 모양의 원형분(圓形墳)으로 되어 있다. 봉분 밑부분에는 둥그렇게 돌을 두르고 전서(篆書)로 이순신과 부인이 묻혔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무덤 주위에는 제사 지낼 때 음식을 차려놓는 상석과 혼이 놀다간다는 혼유석과 향로석이 있으며, 동자상 1쌍, 망주석 1쌍, 양석상 1쌍, 문인석 1쌍, 광명 등, 묘비석이 있다.

 묘비는 1707년(숙종 31)에 현충사(顯忠祠)가 사액 받을 당시에 비석을 세우기 위해 5대손 이봉상(李鳳祥)이 당시 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에게 글을 부탁한 것을 음기(陰記)로 새겨 넣은 것이다. 묘 입구에 정조 18년(1794)에 세워진 어제비(御製碑)와 비각이 있다. 

 

  주차장에 있는 안내도

 

  관리 사무소

 

 시멘트로 만든 홍살문

 

 묘 앞에 있는 안내문

 

정조대왕이 세운 어제비가 있는 비각

 

어제비 해석문

 

묘소로 오르는 우측 오솔길

 

충무공 묘소

 

봉분 앞에서 바라본 남쪽 전망, 정조 어제비와 왼쪽 아래에 있는 연못

 

내려가는 길

 

묘소 아래에서 되돌아 본 전경

 

  도로 오른편 연못 아래 논, 충무공 묘를 관리하기 위한 위토(位土)이다. 이충무공 묘소 위토는 일제강점기 민족말살정책으로 종손(13대 이종옥)의 가산이 쇠진되어 충무공묘소와 위토(충무공의 제사와 묘지관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토지)가 일본인 손에 넘어가게 될 위기에 빠지게 된 사실이, 1931년 5월 동아일보에 “민족의 수치”라는 사설로 보도되었다. 이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2만여 명이 모금운동에 참여 총 16,021원 30전의 성금을 모아 채무를 청산하여, 종손에게 되찾아 주고 남은 성금으로 1932년 6월 현충사를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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