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斷想

영동군 노근리 평화공원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25일부터 7월 29일까지 5일 동안 참전미군에 의해 충북 영동군 영동읍 하가리 및 황간면 노근리의 경부선 철도 및 쌍굴 일대에서 발생했다. 사건 당시 미공군기에 의한 공중폭격과 미 제1 기병사단 소속 미군들의 무차별적인 기관총 및 소총사격에 의해 무고한 양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다. 한국정부는 2008년 12월 12일, 사망 150명, 후유장애 63 명 등 총 226명을 희생자로 결정했다. 그러나 사건 직후의 신문기사에 400명이 희생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귀중한 생명들이 많이 희생된 역사적인 사건이다.

 노근리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사건해결을 위한 첫 시도는 1960년 10월, 이 사건으로 어린 아들과 딸을 잃은 정은용이 앞장서서 정구헌 등 유가족 수 명의 연명을 받아 서울에 소재하는 주한미군 소청사무소에 공식사과와 손해배상을 소청하면서 시작되었다. 1960년 516 군사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노근리 사건에 대해 말조차 꺼내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정은용은 1975년 노근리 사건에 관한 중편소설을 발표하였고, 그 뒤에도 10여 년간 준비한 끝에 1994년 4월,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장편소설을 출간하였다.

  이 소설이 출간되자 정은용의 아들 정구도가 나서서 내외신 언론기관을 방문하여 취재요청을 함으로써 노근리사건의 전모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1994년 6월, 정은용이 앞장서고 서정구 양해찬, 정구도, 정구호 등 5 명이 참여한 노근리 사건 미군 양민학살대책위원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대책위는 1994년 7월 6일, 김영삼 대통령과 국회의장, 정당대표들에게 사건해결을 위해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본격적인 진상규명활동에 착수했다. 1994년 10월 5일 정은용 위원장을 비롯한 5명의 대책위원들이 주한 미국대사관을 직접 방문하여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내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이후에도 한미 양국 대통령, 미상하원의장 등에게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20여 차례나 보냈다. 또, 영동군의원이기도 했던 양해찬의 제안으로 1997년 12월 29일, 한미 양국 정부 측에 노근리학살사건에 대한 사가와 손해배상을 촉구하는 건의문이 영동군의회에서 의결되기도 했다. 그리고 1999년, 2000년도에는 대책위원들이 미 국방부를 방문하여 고위관료와 면담하였고, 세계 언론의 중심인 워싱턴 내셔널프레스 클럽에서 기자회견을 가졌으며, 미국의 노근리 사건 변호인단과 만나서 사건해결방안을 모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대책위 정구도 기획위원은 사건해결의 결정적 증거확보를 위해 문서자료를 찾아 나섰고, 학술논문을 발표하는 등 연구에도 매진했다. 마침내 1994년 8월, 노근리사건 발생 직후에 학살사건을 취재한 르포기사를 찾아냈고, 이후에도 사건의 이슈화를 위하여 관련문서들을 꾸준히 발굴하여 서울의 내외신 언론기관에 제공함으로써 취재가 이루어지곤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마련된 언론사의 취재요청에 정구호 양해찬 등은 피해증언을 수백 차례나 해야 했다. 이러한 놀력 끝에 1998년 4월, AP통신이 본격적으로 취재를 시작했고 1999년 9월 말 드디어 노근리 사건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때부터 노근리 사건은 국제적인 이슈로 급부상했고, 국내외에서 정확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해지자 한미양국은 199년 10월, 진상조사를 착수하게 되었다.

  AP보도 이후 대책위는 2차례의 조직개편이 이루어져서 정구헌, 배수용, 한금동, 김진웅 등이 임원으로 추가되는 등 조직이 대폭 확대되었다. 2000년 5월, 대책위는 스티븐 보스위스 주한 미대사를 면담하여 진상조사를 조속히 완료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기도 했다. 1년 3개월간의 진상조사를 마친 후 2001년 1월 10일 마침내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노근리 사간 피해자와 한국민에게 유감표명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일은 세계 인권사 측면에서 매우 의미 있고, 한미관계사 측면에서도 이례적인 성과이며, 한국의 국가적 자존심을 드높인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구도는 한미 양국정부의 진상조사 결과가 미흡하다고 판단하여 2001년 2월, 진상조사결과의 문제점들을 담은 논문을 발표하였고, 정은용 대책위원장도 2001년 4월, 한미 양국에 반론서를 각각 제출하였다. 또한 대책위는 미국정부가 제시한 사후조치가 매우 소극적인 방안이라서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2002년 10월, 노근리 사건특별법 제정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 후대책위원들은 2년여간 국회를 무수히 방문하는 등 헌신적으로 노력한 끝에 2004년 2월 9일, 노근리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는 값진 결과를 기필코 이루어냈다.

  이 특별법에 근거하여 사건 발생 60년 만에 본 노근리 사건 희생자 추모탑이 건립되었고, 현재 건립 중인 노근리 평화기념관 및 교육관 공사 등이 완료되면 노근리 평화공원이 태동하게 된다. 이는 한국전쟁 참전미군에 의해 발생한 어둡고 아픈 과거사를 정리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새로운 계기를 만든 역사의 전진이라 말할 수 있다. 노근리희생자 유족회는 억울하게 돌아가신 희생자들이 이제는 저 세상에서 안식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이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노근리 평화공원이 세계 인권의 메카, 평화확산의 전당으로 승화 발전하기를 충심으로 염원하는 바이다.

                                    2010년 11월 10일   노근리 사건 희생자 위령탑 - 평화 화합 추모의 비문에서 

 

 

평화 기념관으로 들어가는 길, 터널을 형상화한 듯하다. 지하로 들어가며 밖을 향해 한 컷 촬영했다.

 

평화 기념관 외부

 

  조각 공원

 

  죽은 엄마의 젖을 물고 있는 아기

 

  노근리 사건 희생자 위령탑

 

 사건 현장인 노근리 경부선 철도 아래 쌍굴

 

  노근리 평화공원 안내도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老斤里 良民 虐殺 事件, 영어: No Gun Ri Case)은 6.25 전쟁 중 1950년 7월 25일 ~ 7월 29일 사이에, 미군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예하 부대가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로와 쌍굴다리에서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한군이 잠입했다고 주장하며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사건이다. 학살당한 이들은 대부분 여성과 어린이였다. 노근리 사건을 실제 경험했던 생존피해자와 유족들인 정은용, 정구도, 양해찬, 정구호, 서정구 씨 등으로 1994년에 구성된 노근리 사건 대책위원회(위원장 : 정은용)에서는 사망자 135명, 부상자 47명 모두 182명의 희생자를 확인했으며, 400여 명의 희생자가 대부분 무고한 양민들이었다. 현재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20여 명이다.


  군인 신분이라 진급실패를 우려한 가해자들의 은폐로 오랫동안 덮여 있었지만, 1960년도에 노근리사건 피해자인 정은용 씨가 미국정부가 서울에 운영하던 주한미군소청사무소에 손해배상과 공개사과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994년도에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 대책위원회를 설립했고, 20 여 차례 이상 미국 정부와 미국 상하의원, 그리고 한국정부와 국회에도 진정서를 제출했다. 1994년 4월에 노근리학살로 가족을 잃은 정은용 노근리사건 대책위원장이 노근리사건을 고발하는 책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출판하였다. 이 소설 출판을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대책위원회 대변인이자 기획위원인 정구도 씨가 내외신언론기관을 대상으로 노근리사건 홍보를 적극 전개했다. 연합뉴스, 한겨레, AFP, 시사저널 등에서도 취재보도하면서 노근리학살의 진상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울러 정구도 대변인은 진실규명을 피해자 증언채록, 노근리 학살이 있었던 기간의 조선인민보 신문기사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하고 있는 미군작전기록을 수집하여 노근리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1기병사단이 노근리학살을 일으켰던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들을 확보하고 노근리사건에 대한 역사학 논문과 국제법 논문도 발표하였다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사건 대책위원회의 정구도 대변인이 중심이 되어 노근리 사건 홍보를 4년간 끈질기게 펼친 결과 문화방송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미국 CNN방송 등에서 보도되고 사건이 점점 알려졌다. 그 결과 노근리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AP취재팀이 1998년 4월에 취재에 착수했고, AP통신의 최상훈 기자, 마샤 멘도사(Martha Mendoza) 기자 등이 "노근리 학살사건은 진상규명이 되지 않으면 진실이 알려질 수 없는 사건이므로 반드시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현장취재, 가해자들과의 인터뷰등의 탐사보도를 시행하여 1999년 9월, 미 제1기병사단이 "미군의 방어선을 넘어서는 자들은 적이므로 사살하라. 여성과 어린이는 재량에 맡긴다."라는 지시에 의해 노근리 피난민들을 살상한 전쟁범죄라고 여겨진다. 미국은 현지조사를 실시하였으나 노근리 학살이 고의적 살인임을 부정하고 있다.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은 끈질긴 노력으로 2004년에는 사건의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법안인 노근리 사건 특별법이 의회에 참여한 국회의원 169명 전원의 찬성으로 국회를 통과하였다. 


  이 사건이 일어났던 경부선 노근리 쌍굴다리는 2003년 6월 30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었으며, 충청북도에서도 노근리 학살 사건 희생자들의 신원을 위해 2008년 역사공원 건립을 시작하였다. 역사공원은 2010년 6월까지 191억 원을 들여 쌍굴다리 앞 옛 노송초등학교 터를 포함한 13만 2240m 2에 조성되어 미군 총격으로 숨진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탑, 사건 관련 기록·문서·사진·증언 등을 담을 역사 평화 박물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숙박 기능을 갖춘 문화의 집도 건립되어 청소년 인권·평화·역사 교육장으로 활용될 계획이다. 유가족들도 매년 미군의 폭력으로 죽은 민간인들의 한을 위로하는 제사를 노근리 학살이 일어난 쌍굴에서 지내고 있는데, 미군의 노근리에서의 민간인 학살로 다섯 살 난 아들과 세 살배기 딸을 잃고 부인마저 중상을 입은 노근리 사건 피해자 가운데 한 사람인 정은용 노근리 사건 대책위원장은 2000년 제사에서 다음과 같은 추모사를 발표하였다.

“ 저곳 철로 위에서 폭격과 기총소사와 지상군의 소총사격으로 님들은 마구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곳, 쌍굴 안에서 60시간을 갇힌 채 기관총 사격으로 님들은 처참하게 숨져 갔습니다.… 우리를 돕겠다고 전쟁의 소용돌이를 헤치고 이 땅에 올라온 미군들이 그처럼 무지막지하게 님들을 죽일 줄이야 누가 알기나 했습니까. ”

“ 소대장은 미친놈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총을 쏴라. 모두 쏴 죽여라."라고요. 저는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있었습니다. "목표물이 뭐든지 상관없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 — 제7기병연대 참전군인, 조지 얼리


 "미군의 폭격으로 눈을 잃었지. 거울을 본 적이 없어. ” 생존자 할머니(당시 11세)


 그 외에도 다른 생존자는 미군의 폭격으로 얼굴의 반을 잃어 바깥출입을 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위키백과에서 인용>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老斤里 良民 虐殺 事件, 영어: No Gun Ri Case)은 6.25 전쟁 중 1950년 7월 25일 ~ 7월 29일 사이에, 미군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예하 부대가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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