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斷想

용산 전쟁 기념관

  우리 애들이 어렸을 때, 용산 전쟁기념관은 몇 번 갔었지만, 아이들이 장성한 지금은 관심밖이었다. 그런데, 듣자하니 군복무하던 시절 소속 부대에서 운용했던 자주포가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불현듯 그 자주포가 보고 싶어졌다. 현역시절에 낡아서 잔고장이 많았었지만,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사거리를 가진 대한민국 유일한 자주 평사포였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세월도 많이 흘렀다. 지금도 어쩌다 군시절의 악몽을 꾸기도 하는 나로서,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 당시 군대는 사람 아닌 짐승 같은 집단으로, 욕설과 구타가 일상이었다. 전우애는 말로만 존재하는 허상이었고, 부대원 대부분이 내 한 몸 편하고자 별별 짓거리를 다하는 그야말로 인간시장이었다. 넓은 내무반에 20~30 명이 오밀조밀 붙어살면서 기간병 고참들은 툭하면 졸병들을 구타하고 괴롭혔다. 별 것도 아닌 입대일자 빠른 놈이 깡패고 권력자였다. 부사관들은 제 나이보다도 폭삭 늙었는데, 사병들을 갈취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초중급 장교들도 마찬가지로 사병들을 동네 머슴 정도로 취급하며 그 잘난 계급장의 권위로 호사를 부렸다. 인간성을 잃은 군상 속에서 나는 졸병 시절부터 대부분 말과 웃음을 끊고 내 직무만 처리하며 하루들을 지워가는 하루살이 병사였다. 간혹 인간적으로 괜찮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건 가뭄에 콩 나는 격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겐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며, 나보다 나이가 어렸어도 존경하는 마음이 남아있다. 자주포를 직접 다루던 포대의 포병도 아니었으면서, 그 자주포가 보고 싶었다니, 시간이 지나면 지옥 같은 생활도 추억이 되는 것일까. 

 

 인간이라면 수오지심(羞惡之心) 정도는 알아야 한다. 대부분 군복을 핑계로 벌거벗은 원숭이가 되는데,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군인이기 전에 인간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영향인지, 왜 그리 욕질하고 때리고 기합을 주는지 모르겠다. 직업 군인도 아니고 징집되어 간 군대인데, 욕질과 구타의 악순환이 개선되지 않고 지속된다. 군대 갔던 대부분의 대한민국 남성들은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지금은 군대 안에 인권이 많이 개선되었다는데, 바람직한 일이다. 사람으로 대우받고 자율성도 정도껏 보장받는 군대라면 비록 징집병이라도 자긍심을 갖고 맡은 바 제 임무에 충실하여 최고의 강군이 될 것이다. 

 

 대통령 집무실이 용산으로 옮기고 나서 처음 그 근처로 갔는데, 옛날 험상궂던 삼청동과 효자동 분위기가 용산으로 함께 이사했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쌀쌀한 날씨에 애꿎은 경찰들만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때마침 기념관 앞에서 대통령 집무실을 향해 집단 시위를 하는 탓에, 사방에 경찰들이 깔려 있었다. 무슨 시위인지는 모르겠으나, 북과 꽹가리를 동원하여 알 수 없는 구호들을 외치고 있었다.

 

 

 전쟁 기념관

 

 한국전쟁 당시 형인 국군과 인민군 동생이 만나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비극의 상징인 형제의 상

 

 입구 중앙에 있는 625를 상징하는 동상 

 

 학도병과 피난민 등을 형상화한 동상

 

 광개토대왕비 모형

 

 기념관 동쪽 야외 장비 전시장으로 가서 제일 먼저 찾은 175mm 자주 평사포,  위장색이 달라졌지만 반가웠다. 1971년 미군으로부터 이양받아 운용했었는데 2004년에 퇴역했단다. 최대 사거리 40km여서, 내가 있던 부대 별칭이 장타(長打)였다. 알파, 브라보, 챠리 포대별로 각각 4문씩 12문으로 우리나라 유일한 장거리 사격 포병 부대였다. 지금은 세계를 휩쓴다는 국산 K9 155mm 자주포 포탄이 40km를 날아 가지만, 그 당시엔 미군으로부터 물려받은 175mm 자주 평사포가 유일한 장거리 대포였다.

 ATT때 12문을 1열로 방열하고 TOT 사격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사격 직후, 긴 포신이 부르르 떠는 모습을 보면 그 장쾌함에 오금이 저렸다. 자주포도 별로 없던 시절이어서 처음 보는 사람은 엄청 큰 탱크쯤으로 여겼다. 그 덕에 국군의 날 행사 때는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존귀한 존재이기도 했다.  

 

 현역으로 운용중이었던 175mm 자주평사포

 

ATT 측정 때 내가 찍었던 실사격 상황 

 

 1980년대 초, 북한 이웅평 소령이 몰고 수원비행장으로 귀순한 미그 17 전투기

 

팬텀 F4-C

 

 자유의 투사 F-5, 노후 기종으로 전두환 시절 우리나라에서 제공호로 라이센스 생산했다. 지금도 우리 동네 상공을 하루에 몇 차례씩 시끄러운 굉음을 내며 날아다닌다.  너무 낡아 이따금 추락하여 안타깝게도 젊은 조종사들의 목숨을 앗아 간다.

 

 전차잡는 코브라 헬기

 

 우리나라에서 라이센스 생산한 제비호

 

 서해에서 북한군에게 피격된 참수리호, 피탄 흔적이 많았다. 조타실까지 올라가 처참한 모습을 보았다.

 

 본관에 실내 입체 전시장,  625 한국 동란 때 사용했던 항공기와 전차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소련제 T-34 탱크, 625 남침의 주역으로, 국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소련제 T-34 탱크와 미국의 셔먼 탱크

 

625 때까지 김일성이 타고 다니던 소련제 승용차. 김일성이 패주할 때, 국군이 청천강 부근에서 노획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타고 다녔던 미제 캐딜락 승용차

 

 개인화기 전시장, 과거 M1, 카빈 소총, 내가 들고 다녔던 M16, 전역 후 배포된 K2, 현재 개발하여 사용하는 각종 소총들.

 

 기념관 중앙 홀에 전시된 거북선 모형

 

 이외 여러 전시장이 있었지만, 별로 관심이 없어 기념관을 나왔다.  바깥 날씨가 찼다.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구호를 외치던 사람들도 농성을 풀고 경찰들의 보호 아래 해산하여 떼 지어 몰려 갔다. 그들과 섞이기 싫어 걸음을 재촉하여 집단 속에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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