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斷想

그 때 그 사람, 궁정동 안가 나동

  <전략>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에서 만찬중 살해되었다.  사건 발생 후 신군부는 그 역사적 현장인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안전가옥) ‘나동’을 헐어버렸다. 2층 양옥으로 잘 지어진 이 건물은 워낙 비밀스런 존재였기 때문에 사진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청와대 영빈관 옆에 있는 궁정동 안가는 모두 철거되고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그나마 유일하게 남은 것이 바로 앞 청와대 경호실장 관저이다.


  1993년 2월 25일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청와대는 안가를 모두 헐어내고 공원(무궁화동산)으로 만들었다. 비록 10·26의 현장은 이미 지웠지만, 나머지 안가마저 기억하기 싫었기 때문이리라. 공원 앞 표석에는 “안가(안전가옥)를 헐어내고 조성한 것”이라는 설명만 돼 있다. 안전가옥이 무엇이며, 이 안가에서 과연 무슨 사건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공원에는 이곳에 우물이 있어 궁정동이라는 유래를 따 한자 우물정자의 조형물이 있다. 이 조형물이 있는 곳이 안가 나동의 연회장이 있던, 바로 그 역사적 현장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물정자 모양의 화강암을 두르고 안의 검은색 돌에는 태극문양을 새겨넣은 것이 그런 추측을 더한다. 하지만 이 조형물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이곳 궁정동 일대에는 중앙정보부장 집무실을 포함해 안가 5채가 있었다. 부장 집무실 바로 동쪽 옆에 ‘구관’, 골목 건너 북쪽으로 ‘신관’이 있었다. 그 신관 남쪽의 2층 양옥집이 ‘나동’, 나동 남쪽에 한옥으로 새로 지은 ‘다동’이 있었다. 이 모두는 중정부장 집무실을 통해 연결돼 있었고, 1979년 10월 26일 문제의 사건은 바로 ‘나동’에서 일어났다.

  박정희 시대 중정 안전가옥은 모두 12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궁정동에 6채. 청운동에 3채. 삼청동에 3채. 구기동과 한남동에도 있었다. 이 건물들은 모두 철거되거나 일부는 기관장 공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후략>

<주간 경향 1132호 2015.06.30 기사 일부 발췌>  http://weekly.khan.co.kr/khnm.html?ode=view&code=115&art_id=201506231035081


 

  <전략>이런 후궁의 슬픈 삶을 생각하며 몇 발자국 아래로 더 옮기면 바로 이 육상궁(칠궁) 아래 또 다른 현대판 후궁들이 거처가 있었던 곳으로 이어진다. 현재 <무궁화공원>이 꾸며져 있지만 이곳은 바로 1979년 10월 26일 18년 박정희 독재정권의 마지막 조종을 울린 <궁정동 안가>가 있던 자리이다. 김영삼 정부 때 이곳을 폐쇄하고 일반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원으로 꾸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현대사의 커다란 획이 되었던 1979년 10월로 되돌아 가보자. 당시 1970년대 밤의 정치로 알려진 ‘요정정치’가 극성을 부렸다. 이에 박정희는 부정부패척결을 강조하며 요정정치 엄단을 강력히 주문했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은 관제 비밀요정인 바로 이곳 <궁정동 안가>이다. 당시 박정희는 인기 여가수와 여대생 모델을 불러 놓고 ‘씨바스리갈(Chivas Regal)’을 마시다, 자신의 최측근이었던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피살된 것이다.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의 말에 의하면 ‘궁정동을 거쳐간 박정희의 여자가 200명이 넘는다’. 당시 대통령 의전과장은 말이 의전이지 그가 하는 일은 황음에 빠진 연산군이 전국의 미녀를 모아오게 한 채홍사(採紅使)의 역할이었다. 당시 “대행사(대통령 혼자 즐기는 행사)는 월 2회, 소행사(측근 3~4명과 함께 즐기는 행사)는 월 8회 정도 치러졌다”고 하니 그야말로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결국 김재규의 변호인에 따르면 그가 대통령을 암살하게 된 “간접적인 동기가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과 가족, 즉 자식들 문제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김재규는 법정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에 총을 쐈다”고 말한 것이다.

  조선의 후궁들을 보며 죽어서조차 홀로 남아 있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는데, 이곳을 지나간 제3공화국의 후궁들은 어느 날 갑자기 현대판 채홍사인 청와대 의전과장에 의해 끌려와 안가에 도착해서야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권력의 위협아래 어쩔 수 없이 술을 따르고, 때에 따라 자신의 순결조차 바쳐야 했으니 그 애통함은 또 어땠으랴? 이곳을 지나간 여인들은 연예인들 뿐이 아니다. 그야말로 괜찮다는 여자는 그 누구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군 병원의 간호장교도 끌려 왔었다고 하니 진시황의 아방궁이 따로 없었던 것이다. <후략>

<통일 뉴스 2014.11.04 부분 발췌>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618

 

  칠궁 바로 아래 생뚱맞은 무궁화 동산 북쪽 입구 안내문

 

안내문이 있는 곳에서 남서쪽으로 가는 모퉁이. 비스듬히 기울어 있는 소나무와 그 아래 놓인 몇 개의 돌덩이

 

18년 동안 무소불위의 독재권력을 누리다 만찬중 사망한 자리로 추정되는 곳

 

그 옆에 김상헌 집터 표지석. 병자호란 때 주전파였던 김상헌의 집터가 궁정동 안가 나동이 있던 곳이다. 

 

인터넷에서 찾은 궁정동 안가 나동

 

  무궁화동산 서쪽 울타리 앞, 김상헌 집터 왼쪽. 성곽의 일부처럼 돌을 쌓아 짧은 담장처럼 만들었다.

 

  뜬금 없는 송강정, 관동별곡의 앞부분 한 구절이 정자 안에 걸렸다. 선조 때 대표적인 정치가로 서인의 영수로 가사문학의 대가로 꼽힌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관동별곡>이나 <사미인곡> <속미인곡> 들은 모두 선조에게 대놓고 아부하는 노래들이다. 청운동에서 태어난 송강은 정계에서 부침(浮沈)을 거듭하다 관직을 사임한 후, 58세로 강화도에서 사망했다.

 

  무궁화 동산 남쪽 입구 표지석

 

  무궁화 동산에서 큰길 건너 청와대 영빈관 앞에 있는 봉황 분수대. 한 때 이곳이 1026이 일어난 곳인 줄 알았었다. 

 

  "나그네쥐와 같은 한국인" - 존 아담스 위컴(한미연합군사령관, 1979-1982)

  위컴은 한국의 민주화가 실패하고 독재자가 나타나자 금세 기세가 꺾인 것을 두고 실망하여, 전두환이 육군 대장으로 진급한 다음날인 1980년 8월 8일에 <LA 타임즈>의 샘 제임스 기자와 AP통신의 테리 앤더슨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위컴은 전두환이 한국의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며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마치 레밍 떼처럼 그의 뒤에 줄을 서고 그를 추종하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만약 전두환이 합법적 방법으로 정권을 장악해 국민적 지지기반이 있음을 증명하고 한반도의 안보 상황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정치 자유화보다는 국가안보와 내부안정이 최우선이다. 나는 한국인들이 내가 아는 민주주의를 실시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다."라고 했다.

  참고로 저 발언에 나오는 '나그네쥐'란, 정확히는 북미 지역과 노르웨이를 중심으로 한 북유럽에 서식하고 있는 나그네쥐, 즉 '레밍'을 말한다. 즉 위컴은 한국인들이 단순히 쥐새끼 같다고 말한 게 아니라, 앞의 레밍들을 무조건 추종하여 물에 빠지는 레밍처럼 전두환을 추종하는 한국인들을 레밍의 행태에 빗댄 것이다.

  원래 해당 기사는 위컴의 신분을 '고위급 미군장성'이라고만 소개해 익명으로 보도했지만, 그 인터뷰를 보고 화난 전두환에 의해 '그 장성'이 위컴이라는 게 밝혀져서 일이 커졌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전 주한 미국 대사의 말에 따르면, 이 문제를 한층 복잡하게 만든 것은 전두환이 8월 8일 뉴욕 타임즈의 헨리 스코트 스톡스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미군 고위 관계자'를 위컴이라고 밝혀 익명성을 제거한 것 때문이었다. 서울발 기사는 미국 언론에 크게 보도되어 이 기사가 한국 언론에 다시 보도되면서 기사 내용이 검열 후 왜곡되어 미국 정부가 전두환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으로 둔갑해 물의를 더하면서 전두환은 환호했다. 이에 위컴은 자신의 견해가 잘못 전해졌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 워싱턴과 서울에서 일고 있는 파장에 가장 당황했다.

  이에 미 국무부는 위컴의 발언을 공식적으로 부인했지만, 이는 미국 정부의 뜻이기도 하다. 위컴의 해당 발언에 대해 당시 미국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한 존 앤더슨은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한 지미 카터 대통령이 위컴의 발언을 시정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었다. 그러나 카터 역시 "한국인들은 그들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라도 (중략)민주주의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발언해 미국이 전두환을 사실상 지지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그런데 위컴은 1996년에 대한민국 육군 제20보병사단의 광주 투입을 승인했다고 시인하여 논란을 초래했다.

  1983년에는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했으며, 1984년 12월 19일에는 주한 미군 시찰차 방문 중에 대통령이 된 전두환을 청와대에서 공식적으로 만나기도 했다. 1987년에 퇴역한 후에는 애리조나 주 선시티의 시의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여럿 방산 기업들의 이사장 자리와 미 국방부 장관 정책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출처: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A1%B4%20%EC%9C%84%EC%BB%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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