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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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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왕국 대가야 잊혀진 나라, 가야.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하면서 우리 역사에서 사라진 왕국이 되었다. '가야국' 는 수없이 우리나라사람들에게 회자되지만 백제 신라 고구려처럼, 우리는 상세한 그 역사를 알지 못한다. 신라에 망하면서 신라에 의해 기록들이 모두 지워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반도 남부에서 수백년간 융성했던 조상들의 나라였지만 후손들에게 잊혀진 나라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그 유적들을 보기 위해 나와 특별한 연고도 없는 불원천리 고령으로 향했다. 처음 방문한 곳이 대가야박물관, 그리고 대가야왕릉전시관이었는데, 미지의 가야 역사와 문화들을 경이롭게 접할 수 있었다. 때마침 박물관 로비에서 대가야왕릉유적지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는 서명운동을 하고 있어서 기꺼이 동참하였다. 대가야 수도였던 고령의..
전통과 근대가 어우러진 덕수궁 무심결에 지나치던 덕수궁이었다. 그 동안 시청광장을 지나면서도, 옛시절 그림전시회보러 몇 번 들어갔었던 기억 속에 머무르며, 지나쳤는데 그게 아니었다. 마치 도심 속 숨겨진 비밀 정원처럼 덕수궁 안은 담장밖 세계와 전혀다른 은밀한 공간이었다. 숲이 우거지고, 유리창에 반사되는 현대적 빌딩들과 달리 고즈넉한 궁궐들이 숲 속에서 위엄을 한껏 부리는 곳이었다. 옛날의 기억들을 되살려 가며 찬찬히 살피며 나갔다. 예전에 세종대왕 동상이있었던 것 같은데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고, 덕수궁 내부의 조경마저 과거와 전혀 다른 모습이어서 마치 내가 외국인이 된 느낌이었다. 우리나라 문화재에대해 너무나 무지했다는 자괴심마저 들었다. 일제에 훼손되지 않았으면 더 웅장한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을... 안타까움 속에 수년전부터..
현충사의 봄 오전내내 미세먼지가 안개처럼 자욱했다. 모처럼 나선 나들이였는데, 고속도로에 접어들자마자 콱 막혀버렸다. 밖에 나온 것을 후회하며 되돌리려 했지만 그럴 수도 없어 가다서다를 반복하며 현충사에 갔더니, 아뿔사 이곳도 상춘객으로 주차장부터 만원이었다. 날씨가 풀리고 봄기운이 완연하니 어린 아이들 손을 잡고 봄나들이 나선 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잘 가꿔진 사적지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하루를 즐기다 돌아가니 보기좋은 참정경이었다. 봄향기 가득한 현충사 경내를 돌아다니며, 구국을 위해 한 몸 불사르신 충무공 장군을 기리니 이 이상 어찌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오후 들어서야 미세먼지가 조금 가시고 파란 하늘이 나타났다. 경내엔 목련과 산수유 개나리 벚꽃, 진달래 들이 만개했다. 그리고 그 안에 끼리끼리 모여든 ..
도미부인 사당 춘향전 근원설화로 유명한 삼국사기의 도미설화. 근대에 이르러 박종화 단편소설 "아랑의 정조"로 재탄생되기도 했다. 박종화는 도미부인을 "아랑"이라 이름지었다. 이 설화는 백제시대 도미의 아내를 탐했던 개로왕과 그로부터 정조를 지켜낸 도미 아내의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의 전래지를 놓고 지자체간 싸움을 벌이고 있다. 경기도 하남시와 서울의 천호동, 보령의 오천면이 제각각 도미부인이 살았던 곳이라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고증하기 어려운 옛날 옛적 삼국시대 이야기를 현대에 이르러 자기 고장의 것이라 주장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내 소견으로는 왕으로부터 도미가 두 눈을 뽑힌 채로 뗏목에 내버려졌다는 곳이 한강유역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충청도 보령의 작은 어촌인 오천항 부근에 도미사당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었다...
익산 왕궁리 백제 유적지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공주, 부여 익산의 ’백제역사유적지구(Baekje Historic Areas)’ 가 최종 등재되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1995년 석굴암,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 등 3건이 처음으로 등재된 이래 창덕궁과 수원화성(1997년),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 고인돌유적(2000년),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 조선왕릉(2009),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2010), 남한산성(2014), 백제역사유적지구(2015)에 이르기까지 모두 12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부여와 공주 익산에 산재해 있는 백제유적지는 한국·중국·일본 동아시아 삼국 고대왕국들 사이의 상호 교류 역사를 보여주며, 백제의 내세관·종교·건축기술·예술미 등 백제의 역사와..
해미순교성지 해미읍성 축제에 갔다가 사람들이 많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왔다. 읍성 안에는 다른 볼거리보다 먹거리 장터가 대부분이었다. 야외공연장엔 국악한마당축제가 준비 중이었는데, 빗방울이 흩뿌려 행사장이 어수선해졌다. 날씨가 궂고 어두워져 집으로 돌아오려고 해미IC로 가려는데 읍성밖 교통 통제 때문에 방향을 잃고 돌다가 들린 곳이 해미순교성지였다. 이곳은 1935년 서산성당 신부 범바로의 조사와 발굴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1985년 해미 순교지 성역화를 위하여 해미성당을 설립하고, 2001년 이후부터 해미성당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성역화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해미순교성지는 1866년(고종 3) 병인박해(丙寅迫害) 이후 1882년(고종 19) 사이에 진행된 천주교 박해 때 충청도 각 고을에서 붙잡혀온 천주교 신..
허균선생 묘 우리나라 사람치고 홍길동전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작가 허균에 대해서는 그닥 잘 알지 못한다. 허균은 광해군시절 뛰어난 글재주를 지닌 관리로서 방탕한 성정으로 밥먹듯이 관직에 나갔다 쫓겨나기를 일삼다, 역모에 휘말려 능지처참된 비운의 인물이란 정도만 알아도 대단한 일이겠다. 허균의 고향인 강릉 경포해변 아래 초당마을엔 허균 허난설헌의 생가가 복원되고, 그 곁에 기념관까지 건립되어 이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음에도, 용인에 있는 그의 묘는 안내판 하나 없이 시골 궁벽한 야산에 내던지듯 버림받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부종합청사보다도 더 큰 시청사를 호기롭게 세운 용인시 당국자들은 어린 시절 홍길동전도 읽지 않은 위인들인지 참으로 개탄스럽다. 더구나 허균의 묘가 있는 이곳 양천허씨 묘들은 경부..
몽촌토성 한성백제박물관 앞에서 토성으로 계단을 따라 토성으로 올라가 한바퀴 돌았다. 날씨도 선선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 산책하기엔 딱 좋은 날씨였다. 시계가 탁 트여 주변의 풍광들이 보기에 좋았다. 토성으로 오르는 나무계단 몽촌역사관 북한산 백운대와 인수봉이 시원하게 바라보였다.
경복궁 볕이 좋아 끌려 나갔던 경복궁 나들이었다. 따뜻한 햇살에 날씨마져 쾌청하여 시계가 맑고 고왔다. 오랜만에 들린 경복궁에는 한국인보다 외국사람들이 더 많은 듯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체험학습 나온 학생들은 인물도 고와서 고궁의 풍경과 잘 어울렸다. 경내를 한 바퀴 돌고 나올 무렵엔 땅거미가 찾아들었다. 짧은 겨울 오후는 그렇게 지나갔다. 향원정과 건천궁을 둘러보고 신무문을 보러 가다가 문을 지키던 경찰에게 가방 수색을 당했다. 어린 순경에게 협조차원에서 순순히 돌아서 카메라 배낭을 열어보도록 했지만, 하도 꼼꼼히 뒤지는 통에 은근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신무문 밖엔 중국인 일색이었다. 청와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었다. 선글래스를 끼고 주변을 경계하는 경찰관들의 경비도 삼엄했었고... 해방70..
운현궁 고종이 어린 시절 살았었고, 석파 이하응이 살았던 운현궁. 조선 말기 우리나라 정치권력의 중심부였다. 현재 서울시에서 매입하여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말로만 들었던 운현궁을 처음으로 방문했는데, 왕궁만큼 웅장하진 않았으나 보통의 사대부 저택보다 위엄 있고 웅대하였다. 조선시대 건축물의 백미인 듯, 전통 기와집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주변에 어지럽게 난립한 고층 건물이 아니었다면 압권이었을 텐데, 볼품없이 수직으로 세워진 주변 건물 때문에 시계가 어지러웠다. 열강들의 식민지 침탈이 맹위를 떨칠 때, 독선과 아집으로 대응을 하지 못해, 자신의 영화마저 지키지 못하고 망국의 치욕만을 남긴 대원군과 그의 일족들... 국가와 백성들의 안위보다는 멀리 보지 못하고 자신과 일족의 영달만을 꾀했기 때문에..
서울 창의문 지인 따라 청운동에 갔다가 풍악소리에 취해 쫓아간 곳이 바로 창의문이었다. 본디 자하문으로 불리다가 중종반정을 이룬 공신들이 자신들의 반정을 의로운 거사라 합리화하여 창의문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창의문 안쪽에 작은 무대를 마련하고 국악과 양악을 어우르는 작은 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음악에 조예가 없어 잠시 관람하다가 문루로 올라가 숙정문까지 등산허가를 받으려 하니 오후 4시가 마감이라 불가하다고 한다. 인근 산속에 위치한 크고 작은 군부대와 초소들, 그리고 철조망... 청와대 부근 효자동에 깔린 무수한 경찰들이 안쓰럽다. 그 많은 인력들이 청와대 경호를 위해 그 고생을 해야 하니, 첨단 디지털 경비기기들이 즐비한 오늘의 현실에도 정복 입은 경찰들의 노고와 지출경비가 아깝다는 생각이고, 이승만시대부터 공..
다산유적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소재 다산 유적지, 그동안 양평에서 서울 가는 두물머리 부근 국도변의 안내 팻말만 보고 지나쳤었었다. 다산 생가가 남양주에 있다고 해서 다른 곳인 줄만 알고 있었다. 정약용이 태어나고 사후에 몸을 의탁한 이곳은 본디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였는데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가 되었다. 팔당댐 건설로 넓은 호수가 된 두물머리의 한강 쪽 꼭짓점이었다. 서재와 독서, 침잠하기에 적당히 알맞고 좋다 하여 여유당(與猶堂)이라 불렀다는 본래 생가는 홍수에 떠내려 간 것을 1975년에 그 자리에 복원하였다. 생가의 뒷동산엔 묘소가 있고, 오른쪽에 사당, 왼쪽에 생전의 유품을 수집·정리한 유물전시관이 있다. 유적지 앞 한강변에 공원이 조성하여 그 일대가 아름다운 생태공원이 되었다. 다산 정약..
여주 명성왕후 생가 대한제국 고종황제비 명성왕후. 우리 근대사의 비극을 한 몸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몰락한 양반 자식으로 태어나 나라의 최고 지위에 올라 권력을 제멋대로 탐하며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격변하는 외세의 격랑 속에 일본 자객들에게 경복궁 옥호루 침소에서 시해되어 시신까지 불태워졌다. 한 나라의 왕비로 당한 굴욕과 수치는 그대로 우리 역사에 남는다. 결국 대한제국은 왕비 시해 후 10년 만에 힘도 한 번 못써보고 왜적들에게 국권을 송두리째 내주고 말았다. 제 힘을 기르지도 못하고 눈앞의 권력을 탐하던 시아비 흥선대원군과 며느리 민왕후의 다툼과 이들을 둘러싼 권력세도가들의 제집 안 배 불리기가 망국의 원인이었음은 분명하다. 나라를 통치할 능력도 없던 고종, 역시 그를 왕으로 낙점했던 궁중 여인들의 제 집안 챙기기..
여수 충민사 햇볕이 쨍한 날씨에 바람도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겨울날씨답지 않은 2월의 날씨였다. 진남관에서 충민사로 출발하기전 오른쪽 앞 타이어에 바람이 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놀란 마음에 충민사로 가면서 차량정비소를 찾았으나 남의 동네라 쉽게 찾지 못해 골목길을 돌아야만 했다. 정비소에서 바퀴를 돌려보니, 아주 큰 못이 박혀 있었다. 출발전 집앞 주유소에서 공기압을 체크할 때 앞바퀴에 바람이 빠져 있어 이상하게 생각만하고 공기보충만 했었는데, 큰일 날 뻔 했었다. 행여 고속도로 주행 중 바람이 빠져버렸다면 큰일날 뻔 했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안고 충민사 앞에 다달았는데, 충민사는 양지바른 산자락 아래 단정하게 모셔져 있었다. 주차장까지 예쁘게 준비되어 있어서 상쾌한 기분으로 경내로 들어갔..
부여 부소산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122년간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을 감싸 안았던 부여 부소산, 이곳에 가면 색다른 감회에 빠져든다. 이곳은 백제패망당시 나당 연합군에 쫓겨 부소산 뒷벼랑에서 수십 길 벼랑 아래로 몸을 날려 절명했다는 백제 궁녀들의 한과 함께, 졸지에 나라를 잃고 땅을 쳤을 당시 수많은 백제 유민들의 통분이 서린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곳에서 우리 근대사의 비극이었던 일제강점기, 망국의 백성으로서의 한을 절절히 느꼈을 것이기에 '꿈꾸는 백마강'같은 노래가 우리의 심금을 울렸을 것이었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아래 울어나 보자.~ /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는데, 구곡간장 올올이 찢어지는데, 누구라 알리요..
공주 무령왕릉과 박물관, 한옥마을 오랜만의 공주 나들이, 공주에 특별한 인연이 없으니 그저 들린 곳이 왕릉 주변의 유적지였다. 송산리 고분군 경내에 있는 무령왕릉을 찾았다. 7년 전 방문했을 때보다 많이 달라져 있었다. 주차장 바로 옆에 까맣게 생긴 특이한 건물이 있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더니 그곳이 관광 안내소였다. 잘 꾸민 전시실엔 백제 수도로서 공주 64년을 그림과 도표로 잘 보여주었다. 영상실에 들려 무령왕릉에 관한 영상을 보았는데, 자료가 부실하다는 느낌이었다. 안내소에서 나와 무령왕릉입구에서 매표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왕릉 모형 전시관은 내부 구조와 전시물들이 종전과 다르게 많이 바뀌어 있었다. 1971년 7월, 해방 이후 최대 문화재 발굴이라는 무령왕릉 발굴이 최고의 졸속으로 진행되어 기쁨과 원망을 동시에 받기도 했..
김좌진 장군 생가 홍성 IC 부근에 있는 백야 김좌진 장군(1889년 12월 16일 ~ 1930년 1월 24일) 생가를 알리는 이정표를 지나칠 때마다 마음에 걸렸기에 이번엔 큰맘 먹고 찾았다. 의외로 장군의 생가는 이정표에서 가가운 곳에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에 방문했어야 하는데... 그런데 이번 방문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나 보았다. 폐장 시간에 늦지 않는다고 부랴부랴 서둘러 다섯 시 이전에 도착했는데 네시반이 폐장 시간이란다. 마침 입구에서 문을 닫고 나오는 관리인을 만났는데, 우리더러 생가만 얼른 보고 나오란다. 그것도 고마워 얼른 안으로 들어가 장군의 생가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생가라야 옛터에 복원한 게 전부이겠지만, 존경하는 장군이 생전에 태어나신 곳이라 그야말로 감개무량했다. 뒤따라온 관리인에게 이것저..
아산 공세리 성당 경관이 뛰어나고 건물이 아름다워 영화촬영지로 유명한 아산 공세리 성당. 본디 이곳은, 한양으로가는 뱃길의 길목이었던 작은 동산 위, 조세창고가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1890년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드비즈 신부는 이미 매입한 10칸 정도의 기와집을 개조하여 성당으로 꾸몄고, 1897년 6월 공세창이 있던 일대를 매입하여, 1899년 그 자리에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였다. 또 1905년에는 조성학당(1927년 폐쇄)을 세워 교육 사업에도 앞장서 공세리 발전에 기여하였다. 1920년대 들어 신자수가 증가하자, 드비즈 신부는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지휘 감독하여 1922년 9월에 현재의 고딕 양식의 서양식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였다. 이 후 9대 주임 이인하(李寅夏) 신부는 1958년 초에 강..
익산 미륵사지 교과서에서만 보던 반쯤 부서진 모습의 백제미륵사지 석탑을 보러 익산에 갔다. 미륵사지 주차장으로 들어서며, 거대한 철골집과 새로 세운 석탑을 지나쳤는데 전래되던 석탑은 해체되어 보수 중이었다. 넓은 주차장을 지나 미륵사지 경내에 들어서자, 그 넓은 부지에 놀랐다. 박물관을 왼쪽으로 지나니 여기저기 해체해 놓은 커다란 돌덩어리들이 놓여있었다. 어떤 것은 길가에, 또 어떤 것은 철골막사 옆 노천 선반에 있었다. 모두가 석탑에서 나온 석재들은 아니다 싶었다. 석탑을 해체한 곳에 임시로 지은 철골 건물에 들어가니 옛 석탑의 자리에 주춧돌 하나만 덩그러니 놓였다. 건물 뒷문으로 나서자 옛날 미륵사가 앉았을 자리 뒤에 우람한 용화산이 떠억 버티고 서있었다. 미륵산 앞에 미륵사는 9층 목탑을 가운데 두고 좌우 양쪽에..
용인 심곡서원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소재 심곡서원. 조선 중종 때 도학정치 실현에 힘쓰다 반대파에 의해 역모로 몰려 사사된 조광조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이다. 80년대만 해도 한적한 시골이었던 시골마을이 도시로 개발되어 아파트촌이 되었다. 고층 아파트로 둘러싸인 서원은 빛바랜 한옥들이 숲 속에 한적하게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인근 광교산 자락 등산로 입구에 조광조 선생의 묘가 있어 가까운 이곳에 서원을 세워 선생의 뜻을 추모하며 기리고 있었다. 심곡서원은 1650년(효종원년)에 지방유림들의 건의로 정암 조광조(趙光祖)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우고 위패를 모셨다. 정암의 묘가 근처에 있어서 일찍부터 서원을 세우기 위한 논의가 있었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모현면에 있는 정몽주(鄭夢周) 제향의 충렬서원(忠烈書..
광릉 남양주시 진전읍 부평리 산 100-1 소재 광릉은 나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 세조의 묘이다. 권력욕에 눈이 먼 수양대군은 모략가인 한명회와 손잡고 계유정란을 일으켜 김종서를 비롯한 단종의 측근들을 무참히 살육하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왕위를 빼앗은 후, 단종복위 운동이 일어나자 성삼문을 비롯한 충신들을 참살하고, 영월로 귀양 보냈던 단종의 목숨마저 빼앗는 등, 패륜을 서슴지 않았다. 칠삭동이에다 능참봉에 불과했던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지략가가 되어 계유정란의 일등공신이으로 권력을 장악하였고, 자신의 딸들을 세조의 아들과 손자에 시집보내는 등 자신의 권력기반을 더욱 탄탄히 하였다. 세조의 둘째 아들이었던 예종의 왕비였던 딸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일찍 요절하였고, 예종 역시 즉위 14개월 만..
구리시 동구릉 오다가다 생각 없이 들렸던 동구릉. 세 번째 방문이라 그저 바람 쐬듯 한 바퀴 휘 둘러보고 나왔다. 5월의 푸르름 속에 벌써 물로 뛰어들어 물장구치는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함을 볼 수 있었다. 좁은 주차장이 만차여서 차댈 곳이 없어 주변을 헤매다 빈 공터에 차를 대고 들어 갔다. 주차장에 들어가려는 차들이 입구를 막고 있어서 교통체증도 심했다. 차 한 대가 나오면 한 대가 들어가는 식이라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근처 음식점들도 주차지를 제공하고 음식을 팔고 있었으나 규모가 작아 몰려드는 차량을 수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넓은 동구릉 영역에 비하면 주차장이 너무 협소하여 대책이 필요할 듯하다. 1. 수릉 추존 문조와 신정왕후의 능, 문조는 23대 순조의 아들로 효명세자 시절 대리청정을 시작하여 백..
남양주 광릉 초파일 연휴, 모두들 연휴의 들뜬 기분에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는데, 꼭 짚어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먼 거리를 달리자니 체력적으로 부담도 되고 해서 가까운 곳으로 정한 곳이 크낙새가 살았다는 광릉 수목원이었다. 내 어릴 때, 학교에서 무수히 들었던 것이 천연기념물인 광릉 크낙새와 춘천장수하늘소였다. 아직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단골시험문제로 출제되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중학교 1학년 시절 봄인지 가을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버스를 대절해서 광릉으로 소풍을 갔었다. 그곳에는 두 명이 맞잡아도 닿지 않는 우람한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한국전쟁의 참화로 벗겨진 동네의 민둥산만 바라보다 울창한 숲에 들어서니 그곳이 별천지처럼 생각되었었다. 그 후 우리 애들이 어렸을 때 한 번 갔었는데, 그..
동묘 황학동 벼룩시장 구경에 나섰다가 들린 곳이 벼룩시장 중심에 있는 관우의 묘당인 동묘였다. 대만에 갔을 때, 절 안에 관우를 모셔놓고 향을 피우며 음식을 차려놓고 공양을 올리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관우님은 돈을 벌게 해주는 분이기에 재물복을 바라는 사람들의 소망이 가득 담긴 것들이었다. 1800여 년 전 중국 후삼국시대 촉나라 장수 관우를 재물과 관련시켜 비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에 관우사당을 지어놓고 제를 올렸다는 것이 흥미로왔다. 대만에서는 재물복을 위하여 빌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태민안을 위해 관우님께 빌고 또 빌었겠다. 동묘 주변엔 고층빌딩들이 즐비하고, 주변 골목마다 구제시장과 벼룩시장으로 인파들이 넘쳐났다. 구경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여서 길거리에 진열해 놓..
이충무공 묘소 이순신 장군의 묘소는 아산 현충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충남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산 2-1, 어라산 아래 있다. 장군은 1598년(선조 31) 정유재란 때 노량(露梁)에서 전사하여 이듬해 2월 고향인 아산군에 장사 지내졌고 그 뒤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으나, 광해 6년에 덕수이씨 선산인 현재의 묘역으로 옮겨졌다. 아산현충사에서 차로 10분 거리이다. 정조대왕 어제 신도비에는 영의정 김육의 글이 새겨져 있다. 주차장에 있는 묘역 안내도 관리 사무소
충주 탄금대 충주를 지나는 길에 탄금대를 찾았다. 20년도 더 지난 시절의 기억을 더듬었으나, 기억이 가물거려 처음 온 곳처럼 모든 것이 생소해 보였다. 탄금대 공원 위로 올라가자, 탄금대 가는 길은 포장 공사중이었다. 편하지 않은 길을 타박거리며 걸어서 직진하다가 좌로 굽어진 구비에 현충탑과 위령탑을 보았다. 현충탑은 6.25 전몰장병들을 기리는 것이고, 위령비는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 순국한 신립장군과 그 휘하 8000 명의 고혼을 추모하는 것이었다. 경치가 아름다워 신라에 귀화한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며 궁중악을 창작했었다는 이곳 탄금대가 포악한 왜적들의 침략으로 처절한 핏빛으로 물들어 그 흔적을 좇아 오늘에 그 만행을 반추하고 있었다. 탄금대 주변, 곳곳에 신립장군을 기리는 비석들이 널려 있..
오산 독산성 가을볕 따라 나간 독산성(세마대)이었다. 휴일이라서인지 어린아이들을 데려온 가족들이 부쩍 많았다. 인근에 오산 세교지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동탄 신도시가 생기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진 것 같았다. 5 공화국 시절 대통령의 장인이 이곳에 농장을 만들고 살아서 성아래 중턱에 헬기장까지 닦였는데, 5 공화국 이후에 주차장이 되었다. 사람들로부터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세마대를 찾는 시민들에게 엄청난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그 옆 약수터에서는 산행 후 시원한 물맛도 볼 수도 있고... 옛날부터 군사적 요충지였지만 널리 알려진 것은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이 쌀로 말을 씻어 왜적들을 물리쳤다는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휴일 한 때, 맑은 공기를 벗하며 수원과 화성 일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담양 식영정 예전에 식영정에서 내다보는 아름다운 경치가 머릿속에 박혀 있어 소쇄원 지근거리의 식영정을 찾았는데, 아뿔싸 날씨가 받쳐주지 않았다.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면서 어두워졌다. 더운 것은 여전했고... 게다가 언덕 위의 식영정은 수리 중이어서 보기에 아름답지 않았다. 아까운 발품 같아서 못내 아쉽기만 했다. 식영정 정자에 걸터앉아 잠시나마 고인들의 정취를 느껴보고자 했는데,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 식영정 오르는 길 서하당 부용당 서하당 김성원과 석천 임억령의 사당인 성산사 부용당의 후측면 식영정 근처에서 내려다본 부용당과 서하당 성산사 식영정 내부 보수 중인 식영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