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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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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충렬사와 거북선 남해도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해 나루터 근처에 있는 충무공 충렬사를 찾아갔다. 잘 지어진 안내소 근처에 차를 세우고 언덕길을 올라 충렬사에 도착했는데, 아뿔싸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충렬사는 보수 중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열린 정문의 쪽문으로 들어서니, 입구부터 공사 중이었다. 보수공사가 아니라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을 새로 짓는 것 같았다. 살며시 들여다볼 틈도 없어 하릴없이 되돌아 나오고 말았다. 그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 충렬사 안내소 앞바다에 떠있는 거북선 모형을 둘러보며, 500 원을 내고 거북선 안에 들어가 내부를 둘러보았다. 겉에서 보았을 때는 그럴듯해 보였으나, 내부는 엉망이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송판으로 대충 짜 맞추고, 싸구려 인형에 조악한 조선 수군의 옷을 입혀 전시하고 있어..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 유허지 그동안 몇 번이나 노량을 건너 남해도에 갔었지만, 충무공께서 전사하신 곳이 노량해협 쯤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관음포 앞바다가 격전지였고 전투 중 순국하신 충무공 유해가 이곳 관음포에 처음 내려졌었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내 무지함을 탓하며, 새로 건설된 노량대교를 건너서 관음포 충무공 유허지에 도착했다. 공원처럼 잘 꾸며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안내소 직원에게 길을 물었다. 관음포는 포구 한가운데 서쪽으로 길게 뻗은 반도가 있는데, 그곳에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추모하는 '이락사(李落祠)'라는 유허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충무공께서 순국하신 지 234년 후, 순조 32년(1832년)에 이순신 장군의 8대손으로 이항권이 삼도 수군통제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통제사로 부임한 후 왕명을 받들어 단을 쌓아 ..
김대건 신부 착지처 익산 나바위 성당 논산 국도 주행 도중 우연히 길가에 있는 안내 표지판을 보고 찾아간 성당이다. 김대건 신부님의 유적지라는 이정표를 따라 성당 주차장으로 들어섰는데, 난생처음 본 한옥 성당이어서 깜짝 놀랐다. 처음 보는 이층 누각의 한옥 성당으로, 성당 좌우에 긴 회랑까지 있어서 보기에 아름다웠다. 코로나 때문에 내부를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러웠으나, 겉으로 드러나는 자태만으로도 큰 감동이었다. 성당 서북쪽 화산 언저리는 1845년 10월 12일 밤 8시에 조선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페뢰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11명의 조선인 신자들과 조선에 첫발을 디딘 곳이다. 이를 기념하여 베르모렐 신부가 1906년 공사를 시작하여 1907년 완공하였다.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아넬 신부가 조선인의 정서에 맞도록 한..
공주 석장리 선사 유적지 연사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황사와 미세 먼지가 앞을 가리더니, 황사도 기력이 다했는지 모처럼 청명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봄빛이 너무 고와 연천군 전곡 선사 유적지와 함께 구석기 유적지로 유명한 석장리에 소위 원족을 나갔다. 도도한 역사처럼 흐르는 석장리 금강, 강변에 즐비한 버드나무에서 날리는 꽃가루가 푸른 하늘에 눈처럼 날렸다. 마스크 덕에 꽃가루 알러지 걱정을 덜 수 있어서 불행중 다행이란 웃픈 생각도 들었다. 1964년 연세대 박물관팀이 발굴한 이곳은 맨 밑 강바닥 지질층이 30~50 만년 전이었고, 발견된 나무숯은 방사선 연대로 5만 270년 이전 것이었으며, 비탈 쌓임층의 1호 집터에서 나온 화덕의 재는 2만 83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주로 어린이를 동반한 나들이객들이 대부분이..
평택 정도전 기념관 원균 묘에서 돌아오는 석양길에 정도전 기념관에 들렸다.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으로 조선의 기틀을 세웠지만, 태조의 계비 강씨 소생을 왕세자로 옹립하는 바람에 태종 방원의 손에 척살당한 비운의 인물이다. 정도전은 경북 봉화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참살당하였으나, 이곳 평택 진위면에 봉화정씨 집성촌이 있어서 삼봉을 기리고자, 2014년에 정도전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삼봉기념관 삼봉문학관 이곳의 관리실인 민본재 홍살문 삼봉의 장자인 정진의 사당 희절사 삼봉 정도전의 사당인 문헌사
평택 원균장군 묘와 기념관 그동안 한 번 가봐야 하겠다고 벼르던 원균의 묘와 기념관을 찾았다. 국도를 따라 내려가는데, 그곳 부근은 거대한 토목공사 중이었다. 황량한 들판에 산자락을 깎아내어 아파트를 지으려는지 아니면 공단을 조성하려는지 덩치 큰 덤프트럭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어 몹시 어수선했다. 좁은 마을 안길로 들어서자, 사당처럼 보였던 모선재와 주차장이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모선재를 둘러본 후, 저수지를 지나 원균 장군 묘로 이동했다.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한 원균장군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기에 장군의 말이 물고 돌아왔다는 유품들과 부인 파평 윤씨와 합장하여 묘를 만들었다. 외아들이 함께 전사했기에 원균의 손자로부터 대를 이은 후손들이 번성하여 묘역을 잘 가꾼 탓일까, 묘역은 깔끔하고 위엄 있어 보였다. 계단을 따라 봉..
용인 은이성지 낮 기온이 올라서인지 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렸다. 코로나에 미세먼지, 집 주변 가까운 거리 산책마저 힘든 날이었다. 그래서 찾은 은이 마을 은이 성지였다. 은이(숨을 隱, 마을 里) 마을은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살아서 마을 이름이 그렇다고 한다. 이곳에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1836년 프랑스 선교사로 최초 입국한 모방 신부님이 15세 소년 김대건에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와 첫 영성체를 주고, 신학생으로 선발한 곳이다. 1845년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신부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님이 10월에 귀국하여 이듬해 부활 대축일까지 은이 공소에서 기거하며 서울과 용인 교우들을 시목하였다. 김대건 신부님이 묻힌 안성 미리내까지는 살아생전 그가 시목 활동을 위해 걸어 다니던 행로였고, 순교 후에는 그의..
김옥균 유허 정안 IC에서 세종시 방향으로 가다가 우연하게 발견한 '김옥균 묘'란 표지판을 보고 궁금했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는 내비게이션에 아예 목적지로 설정하고 찾아갔다. 김옥균은 갑신정변 주역으로 그의 쿠데타는 3일 천하로 끝난 비극이었다. 일본군을 등에 업고 시도했다는 것이 가장 큰 실패의 원인이다. 큰 도로에서 옛길로 접어들어 커브길을 돌아가는 지점에 출생지가 있었다. 도로변 표지판에서 김옥균 묘라고 해서 찾았는데, 옛길 모퉁이에는 김옥균 유허라 크게 써 안내하였다. 좁은 밭길을 따라 조금 오르니 생가터가 나왔다. 넓은 부지에 낮은 철책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한가운데, 추모비만 하나 뎅그라니 서 있었다. 이곳은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북쪽에 위치한 창동(蒼洞) 시목골(감나무골)이다. 이곳은 공주시 정안면..
안성 미리내 성지 화창한 토요일, 창밖으로 봄이 밀려든다. 집콕하며 창밖의 봄을 관상하던 차에 친구가 춘천에서 닭갈비 먹는 사진을 보내왔다. 코로나가 한창임에도 나다닐 사람들은 다 그렇게 돌아다니며 살고들 있나 보다. 방구석에서만 답답하게 사는 생활이 억울하단 생각에 차를 몰아 달려간 곳이 김대건 신부님이 영면하시는 곳, 미리내 성지였다. 햇빛은 따스한데 바깥바람이 찼다. 아직 겨울바람이 머물러 있었다. 찬 바람 속에 성지를 한 바퀴 돌아 나왔다. 미리내를 찾은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때 이른 상춘 나들이었지만 모처럼의 바깥나들이에 기분이 제법 상쾌해졌다. 몇 년 전, 방문했을 때보다 달라진 풍경이 많았다. 새로운 풍경을 찍으며 반나절을 보냈다. 성지를 방문한 나들이객들이 제법 많았다. 그 사람들도 이 지루한 코로나 바..
매죽헌 성삼문 선생의 묘 연무대에서 쌍계사를 찾아가던 중, 매죽헌로를 통과하게 되었다. 매죽헌이 누구인지 금방 생각나지 않았다. 매죽헌로 갈림길 작은 삼거리에 세워진 '성삼문의 묘'란 표지를 보고서야, 비로소 매죽헌이 성삼문 선생이었다는 기억이 스치듯 떠올랐다. 예전에 선생의 묘가 논산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감격해서 급히 차를 돌려 삼거리 우측에 있는 선생의 묘를 찾았다. 묘는 보이지 않고 사당 앞에 '충문공 매죽헌 성선생 신도비'가 서 있었다. 그 뒤로 무이문(無二門)이란 사당의 정문이 있고, 굳게 잠긴 문 뒤엔 선생의 사당인 성인각(成仁閣)이 있었다. 들어갈 수 없어 담 너머로 성인각을 바라보며 선생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추모하였다. 사당에서 뿜어 나오는 광채가 서산으로 기우는 햇살과 어우러져 정면으로 바라볼 ..
논산 견훤왕릉 호남 고속도로를 다닐 때, 도로변 안내판에서 견훤왕릉 표지를 보고 무척 궁금했었다. 논산 연무대에서 4km란 이정표를 보곤 그리로 향했다. 논산벌 한가한 시골 들판 구릉 위에 견훤릉이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견훤은 후삼국 시대 강력한 카리스마로 신라를 정벌하여, 경애왕을 퇴위시키고 경순왕을 옹립했었던 막강한 인물이었다. 궁예의 뒤를 이은 왕건과 후삼국 통일을 두고 각축을 벌릴 정도로 강력했던 그는 아들들의 불화로 금산사에 갇혔다가 왕건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견훤에게는 열 명이 넘는 아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견훤은 기골이 장대하고 지략이 뛰어난 넷째 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자 세 형 신검(神劒), 용검(龍劒), 양검(良劒)이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 마침내 군사권을 휘어잡은 세 아..
백제군사박물관과 계백장군 묘 가을비는 폭우로 변해 쏟아져 내렸다. 자동차에서 내릴 때, 쏟아지는 비 때문에 경황이 없어 마스크를 쓰지 않고 내렸다가 주차장 직원의 지적에 놀라 황급히 자동차로 돌아가 마스크를 쓰고 나왔다. 관람객은 없어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하는데, 잠시 정신줄 놓은 탓이었다. 우산을 썼으나 비때문에 옷이 젖어 들었다. 카메라에 비 맞을까 노심초사 걱정이 많았다. 실내관람이라 편하게 생각하고 가져온 카메라였는데, 우산을 썼음에도 주차장과 박물관의 거리가 멀어 운동화와 옷이 많이 젖었다. 박물관 입구에서 카톡을 이용해 QR 코드로 인증을 받고 발열 체크 후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무녕왕 능처럼 꾸민 복도를 지나 파노라마 영상관에서 백제 역사를 안내하는 영상물을 시청하고 전시실로 입장했다. 코로나 사태로 제한된 일부 구..
부여 백제문화단지 백제 이해에 가장 부족한 것이 사료의 부족이다. 신라 천 년 수도 경주에는 각종 유적이 즐비한데, 위례에서 웅진으로 천도했다가 다시 쫓겨 내려간 백제의 유적은 그리 흔치 않다. 예전 부여 부소산에 올랐을 때, 멀리 보이던 백제문화단지에 가보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다. 대전에 내려온 김에 그곳에 가 보기로 했다.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주변 건물이 리조트를 비롯한 현대식 건물이라 크게 실망했다. 주차장 앞 매표소에서 표를 사려했으나 그곳 매표소는 수륙양용버스투어 매표소였다. 주차 안내원에게 물어 역사문화관 앞 매표소에서 발권해서 문화단지 정문인 정양문으로 들어갔다. 정양문 안 넓은 광장에 여러가지 꽃으로 각종 조형물 장식을 세워 놓았다. 첫인상은 역사 유적지보다는 놀이동산같은 인상이 들었다. 백제 궁전과 ..
국립대전현충원 대전 국립 현충원으로 향하는 대로에서 멀리 계룡산 산봉우리가 보였다. 대로에서 대전 현충원으로 들어서자 산능선들이 분지를 이루어 순국지사들을 위로하듯 감싸 안고 있었다. 남향으로 앉은 이곳 자리가 서울 동작동 현충원 위치보다 오히려 더 좋아 보였다. 조국을 위해 순국하신 분들의 묘역이라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경건한 마음새로 그 안에 들어섰다. 서늘하면서도 화려한 가을 향기가 현충원 안에 가득했다. 백선엽 묘 문제로 한창 뜨거웠던 금년 7월의 여론이 있었던차라 궁금하긴 했지만 구태어 찾지는 않았다. 묘역을 한 바퀴 둘러보며,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께 감사했다. 현충원 입구 보훈장비 전시장, 옛날 중고등학교 다닐 때 수시로 방위성금을 냈었다. 그 시절 월남전에서 맹위를 떨쳤던 팬텀기가 이젠 이곳에 전시..
대전 숭현(崇賢)서원 날씨가 쌀쌀해졌다. 아침저녁으론 찬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아름답게 변해가는 나무 이파리들의 화려함에 밖으로 이끌려 나왔다. 차안에서 히터를 틀었더니 땀이 났다. 밖은 춥고 차안은 덥고... 겨울날씨도 아닌데 몸이 적응을 하지 못했다. 목적지인 숭현서원 이정표를 찾았지만 이정표 뒤에 진입로 표시가 없다. 결국 근처에 차를 세우고 홍살문을 찾아 걸어 올라갔다. 가을 풍광이 아름다웠다. 동향으로 배치한 홍살문 뒤 이층 다락이 운치 있어서, 영남지방의 유명 사원보다 보기가 좋았다. 이 서원은 건립시기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배향인물 중 가장 늦은 규암 송인수(1499~1547)가 서거한 1547(명종 2년)을 기준으로 16세기 후반으로 짐작한다. 처음 충암 김정, 수부 정광필, 규암 송..
경복궁 날씨가 좋아 찾은 경복궁이었다. 아마도 내국인보다 외국인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한복입은 사람들로 대만원이었던 듯... 한복의 물결은 보기 좋았으나 변형된 치마는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조금 거북해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입으면 그것이 새로운 모델로 정형화되지는 않을까 공연히 걱정이 되었다. 햇살이 따가웠지만, 이미 더위가 한풀 꺾인 탓으로 참을 만했다. 가끔씩 들려보는 경복궁이지만, 향원정 보수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아 아쉬웠다. 울타리를 두르고 보수막을 둘러친 향원정 보수 공사가 빨리 끝나길 고대해 보았다. 본디 연못 가운데 향원정으로 가는 다리는 북쪽에 놓인 것인데, 일제가 그 다리를 남쪽으로 돌려놓았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대로 복원하는 공사이다. 일제의 간악함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사정..
창경궁의 가을 낙선재를 돌아보고 성정각 앞 언덕에서 입장권을 사서 창경궁으로 넘어갔다. 입장권은 창덕궁은 3000원 창경궁은 1000원인데(여행주간은 50% 할인), 아마도 전각의 규모에 따라 가격이 다를 것으로 유추해 보았다. 일제가 동물원으로 훼손시켰던 궁을 복구한 탓으로 고궁의 떨어진 탓도 있겠으나, 내 개인적 취향으론 창경궁이 창덕궁보다 친숙하다. 비원이라 불리기도 했던 창덕궁 후원과 창경궁 뒤뜰은 담장 하나 차이다. 아마도 일제가 창경궁을 훼손하면서 인위적으로 담장을 쌓아 구분해 놓지 않았을까 짐작해 보았다. 창경궁 후원은 좁기는 하지만 내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공간으로 복원된 춘당지 주변은 가을단풍이 매우 아름답다. 가을 단풍을 교외나 산에서 즐기는 것이 아니라 도심 속 한가운데 고궁에서 즐기는 오묘한 맛..
가을 창덕궁 오랜만에 방문해 보는 창덕궁, 토요일이라 관람객들이 많았다. 매표소까지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서 후미에 섰다가 차례를 기다려 입장권을 구입했다. 여행주간이라며 50% 할인해 주었다. 창덕궁 후원 관람은 이미 매진되어 구중궁궐 그윽한 비경은 감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창덕궁 후원만큼 아름다운 창경궁 후원이 있으니 낭패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많아 사진찍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휴일에 고궁을 찾은 내 탓인 걸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동선을 따라 정문인 돈화문에서 진선문 인정문 선정문 대조전 성정각을 지나서 낙선재까지 걸으며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만끽했다. 구름 많은 날이라 햇볕은 들쭉날쭉하고, 바람이 강해서 날씨가 쌀쌀했다. 바람이 휘몰아쳐 낙엽이 떨어져 휘날릴 때마다 관람객들의 탄성이 터지곤 했다. ..
경복궁 비 온 뒤 날씨가 맑아 가시거리가 좋았다. 날씨 탓에 모처럼 카메라를 꺼내 들고 경복궁으로 나들이 나갔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여름 한낮임에도 그리 덥지 않았다. 토요일이라 경복궁에는 한복 입은 관광객들이 많아서, 곤룡포를 비롯해서 다양한 한옥입은 사람들이 차고 넘쳤다. 그런데, 대부분 여자들 치마저고리는 개량한복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치마 안에 둥근 철사 링을 넣은 것이 대부분이라 눈에 거슬렸다. 외국인들의 고궁 나들이에 어울리지 않는 한복들이라 변질되어서 이상하게 번지는 세태를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근정문에 들어서서 상냥하고 자상한 문화해설사를 만나, 어린아이처럼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알지 못했던 고궁에 얽힌 이야기들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임금님의 산책 공원인 향원정..
남이장군의 묘 조선초 풍운아 남이는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의 손자였고 할아버지는 의산군 남휘였다. 아버지 남빈은 벼슬이 군수에 그쳤으나 장인이 세조의 총신 권람이었다. 남이는 왕가의 인척으로 권문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궁궐에 출입할 때면 세종대왕으로부터 귀여움을 듬뿍 받으며 성장했다고 전한다. 남이는 총명하고 기개가 뛰어나 17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25세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28세에 일약 병조판서가 되어 왕가를 지키는 든든한 종친세력이 되었다. 예종이 19세로 즉위하자 남이를 시기한 유자광일파가 모함하여, 28세에 역신으로 몰려 졸지에 능지처참되고, 집안은 풍비박산 거들나고 말았다. 1818년(순조 18년) 관작이 복원되고 충무 시호를 하사 받았다. 창녕의 구봉서원(龜峯書院), 서울용산의 용문사..
유관순 기념관 미세 먼지 때문에 망설이다 햇살이 퍼진 뒤에야 집을 나섰다. 봄날씨가 완연해서 차창을 열어도 전혀 춥지 않았다. 아우내에 도착했더니 때마침 장날이어서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한참을 뺑뺑이 돌았다. 유명하다는 병천 순대장터에서 순댓국으로 점심을 먹고, 장마당을 한 바퀴 돌았는데, 장터의 인심들이 넉넉해 보였다. 시골답게 농기구를 비롯해서 죽제품, 과일, 간식거리, 작업복 등등... 도시 재래장터보다 물건도 많고 사람들도 흥청거리는 느낌이었다. 울긋불긋한 천막들이 도열한 좁은 샛길 사이로 세월을 주름잡아 과거로 돌아선 분위기였다. 다만, 시골 5일장도 예전과 다른 공산품들과 수입 농산물들이 자리들을 차지하고 있어서 국제화된 시류를 외면할 수는 없나 보았다. 유관순 열사 기념관은 예전..
진도 벽파진 전첩비 벽파진은 고려 후기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진도로 본거지를 옮긴 후, 대몽항쟁의 근거지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순신 장군이 16일 동안 머물면서 전략을 세우고 수군을 정비해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전략적 요새였다. 벽파진 나루 바위 언덕에 1207년(고려 희종 3년) 벽파정이 세워진 뒤, 1465년(조선 세조 11년) 중건됐지만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허물어져 흔적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이에 진도군은 2016년 사업비 5억 원을 들여 정면 가로 11.1m(5칸) 측면 세로 6.3m(3칸) 크기로 고려시대 양식의 팔작지붕 기와집 형태로 복원했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벽파정이어서 정자 위에 올라 주변을 둘러 보았다. 정자 위, 반 칸짜리 방이 있었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이순신 장군이 글씨를..
아산 이 충무공 묘소 온양 갔다 오다 들렸던 충무공 묘소. 아산시 음봉면 4거리 가까운 곳에 있다. 현충사 현판 문제가 회자되는 가운데 현충사보다 더 뜻깊은 충무공 묘소에 들렸는데,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때마침 관리소 직원분을 만나 묘소에 얽힌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곳은 덕수 이씨 문중의 산으로 충무공을 비롯한 덕수 이씨들의 선산으로 쓰였는데, 충무공 묘소 영역은 국가에서 관리한다고 한다. 묘소 앞 상석 아래 조화로 만든 화분이 두 개 있었는데, 천안에 사시는 어느 할머니가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하여 헌화하신단다. 국가적 공경도 중요하지만 이름 모를 민초의 가슴에서 우러나온 헌화가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참배객 중 한 노인은 상석아래 엎드려 조용히 큰 절을 올렸다. 스쳐 지나가는 참배객들도 ..
종묘(宗廟) TV에서 유홍준 님의 5대 궁궐을 이야기를 시청하곤, 그 느낌을 맛보려고 종묘를 또 찾았다. 날씨도 맑고 하늘도 푸르러서 멀리 떠나기 딱 좋은 날이었는데, 멀리는 가지 못하고, 이웃동네 놀러 기듯 가벼운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토요일이라 사람들이 많았다. 조석으로 바람이 찬데, 종묘 앞 가을볕은 몹시도 따가웠다. 몇 년 사이 종묘 앞뜰이 몰라보게 단장되어 보기가 좋았다. 북적이는 사람들에 휩쓸려 종묘 안에 들어섰는데, 입구 안쪽 첫 번째 건물인 공민왕 신당은 공사 중이라 다가가지 못했다. 토요일 자유관람일이어서, 마음대로 다니면서 사진 찍기는 좋았는데, 사람들이 많다 보니, 시야가 많이 가려져서 애로가 있었다. 유홍준 님의 설명을 떠올리며, 찬찬히 관람하며 종묘의 미학들을 생각했지만, TV에서 듣던 느낌..
진도 남도진성과 배중손 사당 진도는 고려시대 삼별초의 대몽항전 최후격전지로 유명한 곳이다. 남도진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어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시간에 쫓겨 급한 마음으로 석성 안으로 들어가니 수년 전, 성안에 있던 민가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관가로 짐작되는 건물만 돌로 쌓은 성안에 덩그러니 앉아있어 썰렁해 보였다. 석성 남문으로 들어가 관가 건축물을 두루 보고 서문으로 나와 성 위에 올라서 한 바퀴를 돌며 보았다. 돌로 쌓은 성벽이라 단단하고 성벽에 담쟁이들이 자라고 있어 고풍스럽고 기품 있어 보였다. 이 성은 고려시대 몽고가 침략했을 때,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가 진도를 떠나 제주도로 향하기 직전까지 마지막 항전을 벌였던 곳이다.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의 석성은 조선시대에 재축성한 것이다. 남도..
해남 우수영과 명량대첩비 전라좌수영이 여수에 있는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나 전라우수영의 존재는 그리 널리 알려진 것 같지 않다. 해남에서 진도를 건널 때 왼편에 있는 우수영 국민관광단지가 우수영터로 알고 있었는데, 버스여행을 하면서 우수영관광단지 오른편에 전라좌수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친구와 함께 해남 우수영을 찾았는데, 워낙 작은 마을에 우수영 흔적이 쉽게 보이지 않았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마을 입구 손짜장면집이 있어서 수타짜장면을 먹으려고 그곳에 들어갔다. 노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너무 힘들어 작년부터 수타짜장을 접었단다. 아쉬움에 간짜장을 시켰는데, 그것마저 힘들어 안된단다. 대신 그냥 짜장면도 맛있다고 권해서 시장하던 차에 짜장면 하나를 후딱 비우고 나왔다. 주인내외에게 수영성 내력을 물었는데, 바쁜 일..
시련의 땅, 강화 전적지 고려궁지에서 가까운 갑곶돈대로 향했다. 강화대교와 이어지는 갑곶돈대에 전쟁기념관도 있었다. 때마침 기념관 2층에 625 당시 참전한 프랑스군 사진전이 열리고 있어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는 것 같았다. 1866년 병인년에는 강화도를 침략하여 성안을 불사르고 문화재를 약탈했던 프랑스군이 80여 년 후엔 지원군을 파병하여 이 땅에서 피를 흘렸었다. 역사의 쳇바퀴는 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북한의 미사일과 핵무기 개발로 나날이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는 오늘, 앞으로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지, 강화도 전적지에 들어서는 심회가 사뭇 달랐다. 고려 때부터 외세의 침략 때마다 시련을 겪었던 강화도였다. 오늘도 북한과 강 하나를 맞대고 대치하고 있기도 하다. 강화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사람들은 무심하리 만큼 평화..
금관가야의 발상지 김해 십여 년 전 겨울에 김수로왕릉에 들렸었다. 그땐 김해김씨 시조로서 수로왕릉이 보고싶어서였는데, 가야역사나 문화엔 관심이 별로 없었다. 구지봉이나 수로왕비 허왕후 능이 이웃에 있다는 것도 몰라서 달랑 왕릉만 보고선 자리를 떴었다, 그 후, 수로왕릉에서 구지봉과 허왕후능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내 무지를 몹시 탓했다. 벌써 이곳엔 이팝꽃과 아카시아꽃이 만발했다. 송화가루도 먼지처럼 바람에 날려 차창에 내려 앉았다. 그리고, 햇살이 퍼지면서 한여름 더위가 찾아들었다. 위성지도에서 탐색한대로 허왕후능, 구지봉 공원, 김해가야박물관, 대성동 고분군, 김수로왕릉을 차례대로 찾았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월요일이었다. 김해박물관과 대성동 고분 박물관은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왜 월요일엔 박물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