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흐리겠다는 어제 예보와 달리 청명한 가을 하늘이었다. 상공을 나는 여객기들의 비행운 띠들이 넓게 퍼져 구름처럼 번지고 있었다. 청와대를 비우고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긴 이후부터 광교산 북쪽을 날던 여객기들이 남쪽으로 밀려 내려 왔다. 청와대가 제 기능을 되찾은 만큼 항로도 제 자리로 되돌아갔으면 좋겠다. 하늘에서 수시로 웅웅 거리는 여객기 기계음들과 맑은 하늘을 비행운으로 어지럽히는 현실이 너무 싫다. 항공기 공해는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듯 오늘도 두 줄로 찢어지는 파란 하늘에 머리가 어지럽다.
파란 하늘 탓에 오랜만에 화성으로 나갔다. 동쪽 성벽이 아름다우나, 아직 보수 중일 터여서 팔달산을 올라 남서쪽 성벽을 찍어볼 요량이었다. 제법 서늘하게 떨어진 기온이 따가운 햇살에 상승하고 있어서 주로 그늘을 찾아 이동했다. 남문인 팔달문에서 팔달산으로 오르는 가파른 성벽 계단이 등 위로 떨어지는 햇빛에 버거웠다. 팔달산 능선에 오르자 공사막을 두른 서남암문의 행색이 초라하다. 작년부터 보수 공사한다며 일을 벌이더니 더 흉측한 모습의 비계와 가림막을 두른 공사판이 되어 있었는데, 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변에 널어놓은 건축자재들이 방치되어 흉물스럽다. 왜 이러는 걸까. 세계문화유산이라며 수원 화성 방문의 해니 어쩌니 홍보는 요란하게 하면서 정작 화성은 곳곳마다 공사판이니, 뭘 보러 오란 말인지 시정을 책임진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오히려 성 아래 화서문과 장안공원 일대는 화성 미디어 아트 축제를 한다며 곳곳에 무대를 설치하는 등 야단단법석이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보여주기식 행정이 정말 싫다. 등나무엔 철 늦은 등꽃이 활짝 피었길래 이상해서 가까이 살펴보니 조화들을 매달아 놓았다. 9월에 만발한 등꽃이라니...
각설하고 화성에 오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 동안의 세월과 일제의 자격지심으로 훼손했던 성곽들이 부족하긴 하지만 오늘의 모습으로 복원된 것에 감사하다. 서남암문에서 치성을 따라 화양루에 이르어 화양루 안 마루에 나홀로 누워 한참을 보냈다. 시원한 그늘에 산바람까지 불어 모든 걸 잊고 정조대왕의 발걸음을 떠올리며 한 때 망중한의 여유를 즐겨 보았다. 사람들이 별로 없어 호젓한 산행을 이어갔는데, 이따금 성벽 아래길로 달리는 사람들이 간혹 보였다. 걷기도 힘든 길을 달리는 모습에 갑자기 불어닥친 달리기 열풍이 무섭게 느껴졌다. 유행도 유행이지만 거친 산길을 달리는 건 아무래도 과유불급이다. 서쪽 성 안 길을 걸어 팔달산 정상의 화성장대에 올라 그 그늘 아래에서 먼저 오신 나그네들을 친구삼아 또 한참을 누워 있었다. 장대 마루에 누워 있으니 세상만사를 모두 잊고 떠난 느낌이었다. 인생의 행복이 별 개 아니라는 짧은 생각이 길게 흘렀다. 높이 걸은 정조대왕의 친필을 바라보며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기는 이 기분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길지 않은 인생에 무엇이 더 필요하랴 싶다.
정상에서 성벽 안 거친 돌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서북각루 앞에 억새 꽃이 흰 머리칼들을 날리기 시작했다. 다음 달이면 푸른 억새잎들도 누렇게 익어 한 해를 결산하며 뜨거웠던 한 해를 또 넘길 것이다. 반복되는 계절의 변화에 잠시 무상감도 느껴보며 화서문으로 내려왔다. 앞서 언급한 대로 미디어 아트 축제 준비에 바쁘다, 아직 본 적은 없지만 화려한 조명으로 서북공심돈과 화서문 성벽을 장식할 것이다. 그러나, 딱히 관심은 없다. 차라리 밤중에 화려한 조명으로 사람들을 현혹할 것이 아니라 그런 예산으로 화성을 더 예쁘고 아름답게 보존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더 크다.
장안 공원을 지나 장안문을 통과해서 장안문 앞 한옥으로 조성된 종로거리에서 잠시 멈췄다. 즐겨 찾는 수원전통문화관에 들려 멋지게 지은 한옥들의 고풍스러운 멋에 빠져 보았다. 이 일대처럼 성안의 건물들이 모두 한옥으로 바뀐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조금씩 천천히 한옥들이 늘어가는 추세이긴 하지만 내 생전에는 보지 못할 아쉬움이 크다. 한옥 거리를 지나 복잡한 인파 속 팔달문 시장터까지 걸어 출발했던 원점으로 돌아왔다. 노점상까지 뒤엉킨 인파 속에 팔달문 동쪽 끊어진 성벽 사이 건물들이 헐리는 모습을 보았다. 사라진 팔달문 곁의 남동공심돈과 성벽이 제 모습으로 복원되면 화성은 또 얼마나 예뻐질까.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


팔달산으로 오르는 남쪽 성벽

중간에서 내려다보는 팔달문

팔달산 중턱 순환도로

서남용도 치성 끝 화양루






서남암문에서 능선 따라 화성장대 방향으로 가는 성안길. 흉물스러운 비행운이 파란 하늘을 망치고 있었다.


서포루

효원의 종

화성의 지휘소인 화성장대.






누워서 감상하는 정조 어필


장대 앞에서 보는 동문인 창룡문 일대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부근

북문인 장안문 일대, 멀리 광교산 비로봉과 수리봉, 형제봉이 보인다.


서노대와 화성장대 뒷모습


장대에서 내려가는 돌계단길


서포루


억새 속의 서북각루







서북공심돈과 화서문




장안공원



화성축성기적비


9월의 등꽃

북문인 장안문





장안문안 한옥거리

수원전통문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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