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韓國의 城

화성시 당성

  잘 알려진 이야기로, 신라시대 원효와 의상스님이 불교를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가는 도중 산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다. 갈증 때문에 한밤중에 일어난 원효스님은 근처의 우물을 찾아 바가지로 물을 떠마셨는데, 아침에 깨어보니 물을 떠마신 바가지는 사람의 두개골이었다. 이에 깨달음을 얻은 원효스님은 중국 유학을 포기하고 국내에서 스스로 정진하며 민중중심의 해동종을 열였다. 당나라 유학을 마친 의상대사는 귀국하여 귀족중심의 불교를 널리 전파하였고... 그래서인지 현재까지 전하는 많은 사찰은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효스님에게 깨달음을 준 곳이 바로 이곳 당성 근처다. 신라인들은 내륙의 충주로 올라와 죽주산성을 거치고 용인의 처인성을 지나서, 오산의 독산성(세마대)으로,  옛수원읍성을 통과하여 화성시 서신면 소재인 이곳 당성에서 중국을 향해 떠났었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당성아래가 모두 육지가 되었지만, 이전에는 모두 바다였다. 

 

  진작부터 당성을 가보려 했으나, 정확한 소재지를 몰라 망설이던 차에 용기를 내어 작심하고, 내비게이션에 의지하여 길을 나섰다. 내비게이션 안내로 근처에 갔더니 한참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목적지 근처에 내려놓은 곳이 인적하나 없는 산중이었다. 차를 세우고 주변을 살펴보니 산성의 축대가 보였다. 성으로 통하는 길이 보이지 않아 당성의 축대를 향해 잡목들과 이슬 젖은 풀들을 헤치며 성벽을 기어올라갔다. 사전지식이 없어서 성을 따라 서북쪽으로 올라가니 서쪽 건너편 산비탈에 여러 가지 시설물들이 보였다. 그곳까지 성곽이 연결된 줄 알고 성위로 올라갔다. 석축의 서북쪽 끝단에 성곽이 무너져 있었는데 아마도 통로쯤으로 여겨졌다. 아래로 내려가는 길도 있어서... 산능선을 타고 오솔길을 걸어 그리로 갔다. 그곳은 당성 인근의 신흥사로, 산비탈에 조성한 석상과 구조물들은 절에서 설치한 불교교화공원이었다. 석가께서 부귀영화를 버리고 열반에 드신 과정들을 화강암에 조각하여 불화처럼 단계별로 조성해 놓았다. 때마침 신흥사로 탐사 오신 조계사 불자님들을 만나 조각된 상징물들의 의미를 새겨들을 수 있었다.

 

  생각도 없이 들렸던 신흥사에서 점심공양까지 받고, 귀가하려다가 당성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신흥사에서 다시 큰 길 옆의 당성 입구표지 쪽으로 되돌아갔다.  그곳에서 차 한 대 겨우 지날 수 있는 산자락길로 쭈욱 돌아가자 마침내 당성 안내소가 나타났다.  때마침 입구안내소에서 관리하시는 분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안내소 건너편엔 캠핑장이 있어서 캠핑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안내소 관리인과 한참을 얘기하다가 방명록에 서명한 후, 안내도를 보고 다시 당성 안으로 들어갔다. 성 안에는 봄나물 캐는 사람들이  여럿 있어서,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떠올랐다.  아까 축대로 기어올랐던 길을 다시 돌아 1. 2km 정도의 당성을 한 바퀴 돌아 나왔다. 성의 남쪽과 서쪽, 동쪽의 석축은 1993년 보수해서 쌓아 올렸다고 한다. 이젠 그 성벽에도 세월이 흘러 담쟁이넝쿨이 얽혀 있었다. 옛날 해안 쪽이었던 성의 북쪽은 석축 흔적 없이 둔덕 같은 토성의 형태만 남아 있었다.      

 

  신라인들에게 당성이 없었다면 나당연합군 구성은 상상 속의 일이었겠다. 고구려가 당나라와 혈전을 벌이는 사이, 신라는 이곳을 점령하여 당나라로 가는 교두보로 삼았다. 따라서 당성은 신라의 당나라 외교 출발점이기도 했다. 문명과 문화들 수입하는 관문이기도 했고...  때마침 금년 3월에 경북도지사 일행이 이곳을 방문하여 실크로드 탐방로를 기념하면서 당성입구에 나무를 심었다.

 

  바로 당성 너머 송산면 고포리의 마산포(馬山浦)는 뒷산이 말처럼 생겨서 마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남양반도 맨 서쪽 끝에 있으며, 제물포가 개항하기 이전에 가장 번성했던 포구였다.  마산포는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장수 위안스카이(원세개-袁世凱) 가 청군을 이끌고 상륙한 곳이다. 청군은 마산포에 상륙한 뒤 흥선대원군을 붙잡아 청나라로 데려갔었다. 그때 청국의 군함은 대부도 남쪽, 즉 불도 바깥 해변에 정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시화방조제가 조성되면서 마산포는 육지가 되어 포구의 흔적조차 사라져 버렸고, 이 지역에 포도가 새로운 경제작물로 부각되어 송산포도로 그 명성을 알리고 있다.  한편, 대부도 옆의 풍도는 1984년 6월에 청군과 일본군의 결전장이었다. 이곳에서 밀린 청군이 아산만으로 달아났다가 성환에서 크게 패했는데, 그 전쟁이 바로 청일전쟁이다.

 

 

 

입구의 안내소

 

입구의 당성 안내도

 

금년 3월에 경북도지사가 방문하여 기념식수했단다.

 

입구의 당성 사적비- 당나라에서 무역을 하고 살다가 귀화한 남양(당성) 홍씨들이 당성사적비를 세워서 자기들의 조상이 당성진을 통해서 한반도에 왔음을 밝히고 있다.

 

당성 입구, 아마도 남문터인 듯하다. 서쪽으로 돌을 쌓아 성을 이루었는데, 1993년에 보수하여 축성한 것이라 한다.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성안 우물터

 

서쪽으로 오르는 길

 

성의 남서쪽, 처음에 석축 아래에서 이 성벽을 타고 기어 올랐었다.

 

성의 서북쪽, 가운데 석축이 무너져 내려 비닐을 덮어 놓았다.

 

당성 북단에서 바라본 해안, 멀리 대부도와 시화 방조제가 보인다. 

 

당성의 북단, 해안이 잘 보이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망해루터

 

무너져 내린 북문터 밖에서 바라보는 서북 방면 해안  

 

성의 북쪽 토성 둔덕-오른쪽으로 경사가 급해서 자연적으로 방어선을 이루고 있다.

 

성의 북동쪽에서 동쪽으로 꺾이는 부분의 토성 흔적. 왼쪽의 경사진 개나리 꽃비탈이 성밖이다. 

 

북문터부터 동남쪽으로 다시 쌓아 올린 석축. 1993년에 복원했다는데 담쟁이넝쿨들이 얽혀 있었다.  

 

무너져 내린 북문터와 북쪽으로 뻗은 토성 

 

동쪽 성벽 끝에서 남쪽으로 휘어지는 부분 

 

성의 동쪽의 아래에서 뒤돌아 본 북쪽 방향 

 

남쪽의 석축, 멀리 남문 입구에서 서쪽으로 뻗은 성곽석축이 보인다. 

 

당성 아래 오토 캠핑장 

 

지도와 내비게이션의 당성 위치 오류. 당성으로 표시된 부분에는 아무것도 없다. 내차의 내비게이션은 표시된 곳보다 좌측으로 더 들어가 도로가 꺾어진 부분이 바로 도착지점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韓國의 城'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령 충청 수영성  (4) 2014.01.03
서산 해미읍성  (10) 2013.12.31
고창 읍성  (2) 2013.05.10
가을 찬가, 죽주산성  (4) 2012.11.12
창녕 화왕산과 화왕산성  (4) 2012.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