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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의 城

서산 해미읍성

 어려서부터 城에 관심이 많았었다. 우리나라의 城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돌을 적당히 쪼아서 쌓아 올린 石城이 대부분이라 더더욱 익숙하고 정감이 간다. 마치 어려서 살던 옛집의 돌담처럼 정겹기만 하다. 그리 높지도 않아 중국의 벽돌성처럼 거대하지도 않고, 일본의 오사카성처럼 큰 돌로 위엄을 부리지도 않는 그저 아담한 성들이 대부분이다. 돌담에 멋을 내어 성문 위에 누각을 올려놓은 것이 우리 성들의 호사라면 호사겠다.

  요즘들어 지자체마다 공들여 퇴락한 마을의 성들을 복구해 세우는 일은 참으로 잘하는 일이다.  언제 누가 해도 해야 하는 일로 우리의 뿌리를 찾는 일이다. 성들은 우리 마을들을 지키고, 백성들의 생명을 보호하며 행정의 중심이기도 했기에 우리 민족과 흥망성쇠를 함께해 온 민족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서산의 해미읍성을 생각하면 다른 곳과는 달리 슬픈 감정에 목이메어 눈물이 앞선다. 백성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공간에서 오히려 백성들을 고문하고 타살한 곳으로 조선의 못난 왕들의 무지와 탐욕을 상징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려진다. 이 읍성은 고창읍성, 낙안읍성과 함께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해미는 서해안 방어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조선 태종 14년에 왜구를 막기 위해 성을 쌓기 시작해 세종 3년(1421년)에 완성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해인 35세 때 젊은 나이에 훈련원교관으로 부임해 전라도로 전임될 때까지 10 개월간 근무(1579년 선조 12년) 한 곳이기도 하다.  사적 116호로써 조선시대 축성된 읍성 중 원형 보존이 전국에 있는 성중에서 가장 잘 된 5백 년 풍파를 이겨온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높이 5m, 둘레 약 1.8㎞로, 동·남·서 세 방향에 문루가 있으며 원래는 두 개의 옹성과 동헌, 객사 두 동, 총안, 수상각 등이 있는 매우 큰 규모였으나 현재는 동헌과 객사만 복원해 놓았다.

  1866년 고종(高宗) 3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天主敎)를 탄압하면서 이곳에서 천여 명을 처형했다.  당시 백성들이 고문당했던 회화나무에는 지금도 그 흔적으로 철사줄이 박혀 있고 태형으로 죽인 자리에는 자리개돌이 있어 한국 천주교의 유명순례지가 되었다.

 

 

해미읍성의 정문인 진남문

 

 

성문안 풍경

 

관아로 가는 길가에 옛날 무기류인 총포들을 전시해 놓았다.

 

관아 겸 본영인 호서좌영

 

수령의 집무실인 동헌

 

 

객사

 

호서좌영 뒷동산 위의 정자 청허정, 정자 앞으로 내포평야와 천수만이 일망무제로 탁 트여 있었다.

 

정자 위에서 전망. 오른쪽에 이승만부터 이명박까지 역대대통령들을 장승으로 세웠다. 근데 존경할 만한 대통령은 거의 없어서... 

 

뒷동산에서 내려본 호서좌영

 

 

관아 앞에 있는 감옥, 감옥 앞에 있는 회화나무에서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고문당하고 처형되었다. 돌 조형물은 천주교에서 세운 순례공원 표지석이다.

 

감옥

 

 

감옥 안 내부. 민생을 도륙내는 흉악범이 아니라, 선하고 여린 부녀자가 구금되어 있다. 이곳에서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이유 하나로 천여 명의 양민들을 학살하였다.

 

 

진남문으로 나가는 길

 

진동문, 동문으로 나와 주차장으로 가려고 했는데, 문을 걸어 잠가놓아 하는 수없이 성벽 위를 걸어서 남문까지 돌아왔다. 

 

 

 

 

 

  병인박해

 

  조선에 천주교 박해가 치열해지자 피신해 있던 신부 리델(Ridel, 李福明)은 7월 조선을 탈출, 청나라의 톈진으로 가서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Roze,P.G.)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에 로즈는 10월에 7척의 군함을 이끌고 프랑스 선교사들의 학살 책임을 묻는 무력시위를 벌이게 되어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였다.

  이 병인양요로 말미암아 박해는 제2단계에 들어가게 되는데, 대원군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천주교도를 통외초구(通外招寇)의 무리로 내세워 수많은 천주교인을 처형하였다. 이때 대원군은 양이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진 땅은 그들과 통하는 무리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여 처형지는 주로 서울과 해안지방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박해는 1868년 4월에 일어난 오페르트(Oppert)의 충청남도 덕산 남연군묘(南延君墓) 도굴사건을 계기로 다시 불이 붙어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 오페르트는 수차에 걸친 통상요구가 거듭 거부되자 대원군 아버지의 분묘를 도굴할 계획을 세우고 작업을 펴나갔으나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이에 대원군은 크게 분노하여 내포 지방의 교인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였다. 내포지방은 천주교회 창설기부터 천주교가 유포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 부근의 지방까지 피해를 입었다. 그 뒤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로 다시 박해가 가중되었다.

  신미양요는 1866년 평양시민의 공격으로 침몰된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의 사건을 미국이 정치적으로 이용, 조선에 포함외교(砲艦外交)를 펴고자 하면서 시작되었다. 1871년 5월에 미국함대의 강화도 공격을 시발로 하여 6일간의 전투 끝에 결국 미국은 물러가게 되었고, 격퇴에 성공한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국민에게 철저한 쇄국양이의 국시를 선명히 하는 한편 잔존해 있는 천주교인을 색출하여 처형시켰다. 그 뒤에도 탄압이 계속되다가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병인박해가 마무리되었다.

 우리 나라 최대의 박해이고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병인박해는 천주교의 박멸이라는 국내 정치적 측면만이 아니라 급격하게 밀어닥치는 서구 식민세력에 대한 대항이었다는 점에서 1801년의 신유박해나 1839년의 기해박해와는 다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6431&cid=1618&categoryId=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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