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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바르셀로나

  내가 알고 있던 스페인은 세르반데스가 있었고, 메시가 있으며, FIFA 랭킹 1위이고, 경제 사정이 나빠 시위가 많은 나라로 국민소득이 우리나라와 비슷하거나 낮을 거란 정도였다.  전에 가보았던 로마가 보고 싶어 이탈리아로 가려다가,  스페인으로 목적지를 바꾸었다. 별생각 없이 방문했던 스페인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은 상당히 컸다. 그곳에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었고, 지중해의 작렬하는 햇빛 속에 정열이 꿈틀거렸으며, 광활한 토지에 원색의 빛깔이 눈부신 곳이었다. 사는 형편은 어떨지 몰라도, 낭만이 느껴졌다. 우기라는 겨울철임에도 푸른 하늘과 빛나는 햇살이 따사로워, 사시사철 미세먼지에 시달리는 우리와 달리,  맑고 깨끗한 자연 속에 인생을 즐길 수 있어 여유가 넘치는 곳이었다.  

 

  스페인에 가기 위해 핀란드 헬싱키를 경유했다. 중동을 경유하는 항공노선보다 더 빠르기 때문이었다. 헬싱키까지 9시간 30분여, 헬싱키에서 바르셀로나까지 4시간여, 환승 대기 시간 3시간이어서 지치긴 했지만 새로운 세상을 여행한다는 기대감으로 피곤한 줄 몰랐었다. 중동으로 가는 것보다 헬싱키 경유 노선이 3-4시간 정도 빠르다.

 

  인천공항에 122 탑승구에서 11시 10분 헬싱키행 FINNAIR를 기다렸다.

 

 핀에어 항공기는 좌석간격이 넓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괜한 소리였다. 내부가 깨끗하긴 했지만, 오락 프로그램이 단조로웠다. 영화 프로그램이 다양하지 않아서, 우리나라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영화가 별로 없었다. 한국영화는 세 편 정도...

 

   중국과 러시아 상공을 지나기 때문에 창밖엔 눈으로 덮여있는 대지가 광활하게 펼쳐졌다.

 

   헬싱키 공항에 현지시간 오후 1시 50분에 도착했다.  시차가 7시간이니까 9시간 40분을 날아왔다. 도착하여 환승 수속을 하는데,  스페인 입국심사를 아예 이곳에서 하고 있었다.  같은 EU 국가라는 것인데, 짐 검사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아들 준다고 명란젓을 가지고 가던 아줌마는 문제가 되자 울상이었다. 결국 문제의 명란젓은 들고 가지 못하고 화물로 부쳐졌다. 액체류의 경우 100ml 이상은 반입이 안 된다.

 

  공항 내부는 인천공항처럼 편히 쉴 수 있는 좌석들이 적었다.  대부분이 카페나 상점들로,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듯 장삿속이 지나치다 싶었다.  입국 짐 검사가 까다로워 시간을 상당히 지체했기에 환승장에서 대기시간이 그만큼 줄어들었다.

 

대기 중인 바르셀로나행 비행기, 공항 주변에는 울창한 침엽수림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었다. 

 

  바르셀로나행 비행기는 통로 좌우로 3석이 붙어있는 작은 항공기였다. 기내식으로 간단한 샌드위치를 주었다. 이곳에는 한국인 승무원이 없었다.

 

  바르셀로나 상공, 옅은 구름 아래 불빛이 아름다웠다.

 

  바르셀로나 공항에 현지시간 오후 8시 20분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와 시차는 8시간이다. 비행기 창밖으로 본 공항 풍경

 

  우리를 태웠던 비행기에서 내려 긴 통로를 걸어 나갔다.  늦은 시간이어서 사람들은 붐비지 않았다.

 

 함께 간 일행 중, 노인 부부가 같이 나오지 못하고 할머니가 화장실 간 사이에 할아버지 혼자 나와, 졸지에 할머니만 홀로 떨어져 넓은 공항청사 안에서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나머지 여행객들이 한 시간 이상을 툴툴대며 기다렸다. 동행한 가이드가 몸이 달아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이 때문에 지체된 시간이 여행 내내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  스페인에서는 규정된 시간 이외엔 운행을 하지 못한단다. 우리나라로 치면 융통성 없는 것들(?)이었다. 공항청사 밖 풍경.

 

  호텔에서 1박 후, 바르셀로나에서 첫아침을 맞았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적중할 듯, 날씨가 아침부터 꾸물거렸다. 어젯밤 버스로 호텔까지 오는데, 운전기사에게 2유로를 내고 생수 2병을 사 먹었다.  운전기사가 생수로 추가 수입을 올리는 건데 물값이 비싸다 싶다.  터키에선 1달러에 500ml 두 병을 줬는데 여기선 500ml 한 병에 1유로, 즉 1500원이라니 과하다. 어쩌는 수 없이 2유로를 주고 우리나라에서 300 원하는 생수를 두 병 샀다. 운전기사 생업전선에 피눈물 나는 생수였다. 국민 평균소득이 3만여 불이라니 우리보다 잘 사는 나라이다. 그런데 도처에 소매치기가 많으니 조심하란다. 유럽여행 때마다 듣는 소매치기 주의보에 짜증이 난다. 선진국이면 좀도둑들이 없어야 할 텐데, 오히려 소득이 낮은 동남아시아에 없는 소매치기가 유럽에 극성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사회보장제도도 우리보다 훨씬 더 잘 되어있다는데...

 

  터키에서도 잘 터지던 와파이가 이곳에선 대부분 돈과 연결되었다. 공항의 와이파이도 공짜가 아니었다. 대부분 호텔에서 시간당 4유로 정도로 와이파이 사용료를 받고 있었다. 잘 살수록 인색해지는 걸까. 그러고 보면 유럽은 모든 것이 돈과 연결되어 자본주의의 극단을 보여주는 경제적 대륙이었다. 바르셀로나 인구는 자체 인구 150만에 주변 도시 합친 도시권이 300~400만 명 정도란다.  눈 뜨고 창밖으로 바르셀로나의 풍경을 보니 날씨가 흐렸다.

 

호텔 전경, 운전기사. 

 

  차창밖 풍경, 도처에 섬세하고 예술성도 높을 듯한 조각들이 많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 성가족 성당으로 가우디(Antonio Gaudi y Cornet)가 설계하고, 직접 건축감독을 맡았던 성당으로, 그의 나이 서른 살 때인 1882년 3월에  공사를 시작했으나 1926년 6월 죽을 때까지 교회의 일부만 완성하였다. 나머지 부분은 현재까지도 계속 작업 중이다. 언제 완공이 될지 모른다.

 

 선인장같이 솟아올린 첨탑들은 지상에서 천상을 이어주는 사이프러스 나무를 형상화한 것이다. 자연을 닮아내려는 가우디의 건축 정신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날씨가 청명했으면 좋았을 것을, 흐린 날씨 덕에 포토죤에서 찍은 사진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진을 찍는 사이에도 거대한 기중기는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성가족 성당의 구조는 크게 3개의 파사드(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로 이루어져 있다.  각 출입문마다 각각 4개의 첨탑이 세워져 총 12개의 탑이 세워지는데, 각각의 탑은 12명의 사도(제자)를 상징한다. 모두 100m가 넘는다. 또 중앙 돔 외에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높이 140m의 첨탑도 세워진다. 가우디가 죽을 때까지 완성된 문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축하는 탄생의 문뿐이다. 이 문은 가우디가 직접 감독하여 완성한 것이다. 나머지 두 개의 문은 수난과 영광의 문인데, 수난의 문은 1976년에 완성되었고, 영광의 문은 아직 착공도 되지 않았다.

 

  건축양식은 입체 기하학에 바탕을 둔 네오고딕식이다. 원래는 가우디의 스승이 건축을 맡았으나, 1883년부터 가우디가 맡으면서 계획이 완전히 바뀌었다. 전체가 완성될 경우 교회의 규모는 가로 150m, 세로 60m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중앙 돔의 높이는 170m 정도이다.

 

  재료는 석재인데, 가우디가 죽은 뒤 1952년까지는 작업이 중단되었다. 1953년부터 건축을 재개하였으나, 돌이 부족하여 그 뒤에는 석재 대신 인조 석재와 콘크리트를 사용하고 있다. 탑의 모양은 옥수수처럼 생겼고, 내부의 둥근 천장은 나무처럼 생긴 기둥이 떠받치고 있다. 천장은 별을 닮은 기하학적 무늬로 가득 차 있다.

 

  후원자들의 기부금만으로 성당을 짓고 있기 때문에 언제 완성될지는 알 수 없다. 사그리다 파밀리아는 가우디 건축의 최고로 꼽히며,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이다.  

 

  주출입구인 입구쪽 파사드

 

  정면 탄생의 문 위의 조각

 

  탄생의 문, 중앙 출입문 위의 예수 탄생 조각.  왼쪽엔 동방박사 세 사람, 가운데가 요셉과 구유에서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 오른쪽엔 목동들...

 

  왼쪽 문위의 조각.  아기 예수를 죽이려는 헤롯의 군인들을 피해 피난 가는 요셉과 마리아, 군인들이 아기들을 잔인하게 짓밟아 죽이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했다.

 

  상당 내부, 미사를 올리는 제단 방향. 나무를 형상화한 거대한 기둥들이 성당을 떠받치고 있다.

 

  천정

 

  내부 옆면의 스테인드 글라스

 

 제단의 뒤편

 

  성당의 뒷문 격인 수난의 문 밖, 십자가에 처형되는 예수의 모습을 조각해 붙였다. 직각으로 조형된 조각들이 사실적인 앞문과 달랐다.

 

  아래 가운데는 새벽닭이 울기전 예수를 세 번 부인하고 괴로워하는 베드로 모습, 오른쪽 끝에는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에 대한 판결문제로 고뇌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성당의 후측면

 

  성당의 옆부분, 영광의 문 공사현장. 이곳에도 4개의 첨탑이 올라갈 예정이다. 지중해인 바다 쪽을 향해 공사 준비 중인데 향후 15년 후에 완공되리라 한다. 이 문이 제단을 마주 보며 들어가는 방향이기 때문에 성당의 정문이 될 예정이다.

 

  완공 후의 성가족 성당.  영광의 문 길 건너 기념품 상점에 전시된 패널을 찍은 사진

 

  구엘공원으로 가는 길에 쌍용차 렉스턴을 만났다. 그 모습이 위풍당당하다. 현대차와 기아차들이 제법 많이 보였다.

 

  가우디가 설계하고 만들었다는 구엘 공원, 공원 설계는 가우디 건축 스타일의 독특함을 유감없이 보여주는데, 모든 것이 자연친화적이라고 한다.  애초엔 부자들을 위한 전원주택지로 구상되었는데 언덕 위의 상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공원으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다리의 난간 너머로 멀리 지중해가 보인다. 다리의 난간은 앉아서 쉴 수 있도록 독립된 좌석들로 만들었다.

 

입장하는 곳

 

  바다의 파도를 형상화했다는 인공 동굴

 

  멀리 공사 중인 가우디 성당이 보였다. 그 너머엔 지중해...

 

  잔뜩 흐렸던 하늘에서 드디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구엘 공원 전도

 

  공원을 한 바퀴 돌아 처음 들어갔던 곳으로 되돌아 나왔다.

 

  가우디 공원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부두로 나왔다.  우리나라 명동 격인 번화가에 내렸는데, 겨울비가 내려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분위기도 을씨년스러워 콜럼버스 동상이 있는 항만 쪽으로 걸어 나왔다. 콜럼버스 동상에서 바라본 몬주익 언덕

 

  바르셀로나 항만의 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콜럼버스 상.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이다. 여태까지 스페인 사람으로만 알았었다.

 

  바르셀로나 요트항, 국민소득 3만 불이 넘으면 요트가 유행이란다. 

 

바르셀로나 항만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몬주익 언덕으로 이동했다.

 

  몬주익 언덕에 있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주 경기장. 본디 1936년에 이곳에서 올림픽을 하려 했으나 히틀러에게 유치권을 빼앗겼다. 그리고, 1992년 스페인 유치 때는 이곳 출신인 사마란치가 수도인 마드리드를 누르고 여기에서 올림픽을 치르도록 했다고 한다. 경기장 앞 바위돌에 마라톤 우승자였던 황영조를 새겨 놓았다. 경기도지사를 지낸 임창렬이 바르셀로나와 경기도가 자매결연 맺으면서 황영조상을 마련했다고 한다.  황영조의 마라톤 우승은 영예스러운 것이지만,  우승 뒤 그의 거취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분명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몬주익 언덕 아래 까탈로니아 광장, 버스를 타고 스쳐 지나가지만 조각들이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비 내리는 바르셀로나를 뒤에 두고 아쉽게 버스는 달렸다. 그 아쉬움이 빗물 되어 길 위에 뿌려지는 듯 마음이 애절했다.  좀 더 머무르고 싶어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차창에 번지는 빗방울의 얼룩에 지나는 풍경들이 추억처럼 일그러졌다 펴지곤 했다.

 

 지중해를 끼고 발렌시아로 가는 도중 휴게소에 정차했다. 빗방울은 소강상태였다. 바람이 조금 쌀쌀하기는 했지만 우리나라 겨울 날씨에 비하면 초가을 선선한 날씨 정도였다. 멀리 지중해가 터진 하늘 사이로 빛나고 있었다.

 

 가끔씩 보이던 산 위의 성채

 

  버스는 이제 발렌시아로 접어들고 있었다. 창밖으로 조금씩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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