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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베를린

  이젠 평화의 도시가 된 베를린. 히틀러의 선동에 놀아난 독일 국민들의 맹목적인 추종이 결국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종내는 인류에게 엄청난 재앙을 불러왔다. 독일 백성들의 멍청한 선택이 불러온 엄청난 파멸이었다. 좋은 정치인을 두는 것은 국민들이 똑똑하기 때문이다. 극우로 치닫는 자민당을 추종해서 동아시아에 갈등을 부추기는 아베가 설치는 것도 일본인들의 선택의 결과이다. 정치가 혼탁한 것은 국민들이 어리석어서이다.

 

  패전으로 분단된 독일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통일되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하루아침에 통일된 독일은 한국인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포르투갈 파티마 성모 발현 성지에 전시된 베를린 장벽 조각을 보며, 우리에게 돌아올 통일이 독일에서 일어난 것 같아 가슴 아팠었는데...  통일된 지 25년이나 지났지만 무너진 베를린 장벽을 내 눈으로 본 것은 감격이었다. 통일 후 서독인들이 부담한 엄청난 세금 때문에 남북통일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1989년 통일된 독일은  이제 과거의 상처를 씻고 EU를 이끄는 유럽의 중심국가가 되었다.

 

  전쟁을 일으킨 패전국도 아니면서 소련과 미국의 팽장주의로 남북이 분단된 한반도, 3년 동안 동족상잔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까지 치렀다. 전쟁 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형제를 겨눈 총부리에는 변화가 없다. 툭하면 매스컴에서 떠올리는 '서울 불바다'란 표현도 일상처럼 들려 감히 놀라지 않는다. 분단된 현실은 정략적으로 정치에 이용되어 국민들의 판단을 어지럽히고 있다. 어느 누구는 남북 분단까지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시련이라고 말했던데, 시련치곤 너무나 처절한 형벌이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런 형벌을 받아야 하는지 국민들은 납득할 수 없다. 조선의 왕과 정치가들이 자신보다 백성들을 위해 똑똑하고 현명하게 국정에 임했더라면 오늘의 고통은 없었을 것을... 오늘의 정치현실도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가들의 행태를 보면 그저 답답할 뿐이다. 2000년 전 중국 후한 말 한나라를 망하게 했던 십상시가 21세기 대한민국에 출현하는 것은 도대체 웬 말이던가.

 

 해마다 젊은이들은 군대로 징집되어 아까운 청춘을 수용당한다. 청춘들은 군에 복무하면서 징집 목적에 회의를 느끼며 수없이 많은 갈등들을 일으킨다. 국방을 위한 군인인가. 간부를 위한 군인인가. 노예나 머슴처럼 혹사당하며, 이유 없는 욕설과 구타, 기합의 관습에 몸과 마음이 오염되고 만다. 그 과정에서 타의 또는 자의로 동물적이고 이기적인 타성을 몸에 익히고 사회로 복귀한다.

 

  남북이 하나 된 통일된 한국이라면 우리가 치러야 할 희생이 줄어들 것이다. 헛된 국력의 낭비가 없어질 것이며, 어려서 교과서에서 배웠던 삼천리 금수강산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대륙에 연결된 반도이면서 섬처럼 고립된 현실에서 벗어나 대륙을 통해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 25년의 독일을 바라보며, 부러운 마음으로 베를린을 둘러보았다.

 

출국하는 날, 비가 몹시 내렸다. 청승맞은 겨울비를 맞으며 공항에 갔다. 때마침, 출국장 너머 면세점 복도에서 조선시대 왕의 행차를 보여주고 있었다.

 

  암스테르담 향발 KE 925편, 촉촉하게 비를 맞으며 비행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후 2시에 탑승해서 3시 이륙. 암스테르담까지는 13시간 날아간다. 시차는 8시간.

 

  날개 위 창문가 자리. 티켓을 발급받을 때 창가 자리를 부탁했더니, 시계(時界)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날개 위 자리였다. 다음엔 날개 앞뒤 창가라고 토를 달아 부탁해야겠다.

 

 두 번의 기내식, 소고기 비빔밥, 고추장에 참기름까지 넣어 비벼 먹었는데, 맛이 좋았다. 그릇은 고급스러웠고 수저는 일회용 플라스틱이 아닌 스테인리스 제품이었다. 13시간여 비행이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승무원들의 서비스가 좋았다. 이런 맛에 국적기를 타나 보다.

 

12시간 30분을 날아서, 오후 6시 30분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한국시간으로 새벽 2시 30분. 암스테르담엔 이미 어둠이 내려 깜깜한 한밤중이었다.

 

   암스텔담 공항 청사 밖, 밤공기가 차가웠다. 약속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버스를 추위 속에서 떨면서 기다렸다. 네덜란드는 출발 전 우리나라보다 추웠다. 

 

  늦게 도착한 버스를 타고 암스테르담에서 독일 하노버까지 4시간 정도 이동해서 호텔에 묵었다. 하노버 호텔 아침, 밖에는 안개비가 내렸다.

 

  안개비가 내리는 뿌연 하늘, 사방이 어둡고 칙칙하다. 여행의 기분이 꾸물거리는 날씨 때문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호텔 주변, 치솟은 송신탑이 안갯속에 젖어 있었다.

 

  베를린으로 가는 고속도로. 도로는 우리나라처럼 콘크리트 포장이었는데, 간혹, 구간에 따라 노후된 노면에서는 버스가 털털거렸다. 이른바 아우토반, 속도 무제한 속도로 달릴 수 있다는 자동차 전용 도로, 그러나, 전 구간이 무제한 속도는 아니다. 구간에 따라 속도 제한 표시가 있다. 도로 주변에 나무들이 울창해서 아름다웠다. 아우토반은 우리말로 자동차 전용도로라는 의미. 독일에서는 고속도로 주행요금은 없다고 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건설한 도로니까 그 혜택을 국민들에게 돌려준다는 의미란다. 걸핏하면, 통행세를 올려야 한다는 우리나라 현실과 많이도 다르다. 유감스럽게도 아우토반은 콘크리트 포장도로였다. 우리나라 고속도로 콘크리트 포장도 독일을 모방했는지 모르겠다. 시멘트 고속도로는 좋지 않다. 승차감도 좋지 않고, 타이어 수명에 영향을 준다. 타이어 마찰에 따르는 미세먼지도 당연히 많이 날린다. 보수유지가 중요한 관건인데, 우리나라 경우 겨울나면서 깨지고 파여서 엉망이 되어도 보수유지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멘트 도로 위에 아스팔트를 깔면 좋을 것을...

 

  유럽의 화물차는 모두 박스카였다. 화물차 야적 적재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야적 적재함에 짐을 대충 싣고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우리나라 화물차들을 보면  불안하다. 어쩌다 도로 위에 짐을 떨어뜨려 애꿎은 후행차량들에 피해를 주는 것도 다반사인데...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왜 화물차 박스 적재함 제도를 도입하지 않을까.

 

  우리가 타고 다닌 버스는 벤츠사에서 생산한다는 고급 버스 세트라, 1년 미만의 새 차량이었다. 버스는 편안하고 승차감이 좋았다. 버스회사는 체코, 운전기사 역시 중년의 체코인이었다.  휴게소에서 급유 중인 버스. 휴게소 화장실마다 돈을 받는다. 70유로 센트, 영수증으로 물건을 사면 1인당 50유로 센트를 차감해 준다. 선진국이라는 독일에서 쫀쫀하게 놀고 있다. 여타의 동물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징 중 하나가 대소변을 구분한다는 것인데, 참기 어려운 동물적 생리작용 해결에 돈을 받는다는 게 유치하다. 대부분 화장실마다 동전 넣는 통이 있고, 동전을 넣어야 우리나라 전철 타듯, 화장실 개폐기를 밀고 들어갈 수 있다. 식당에서도 휴게소에도 공짜 물은 없다. 운전기사에게 사서 마시는 물은 가장 작은 물병 하나에 1유로이다. 그 흔한 와이파이 서비스도 대부분 돈을 받고 제공한다. 아마도 물쓰듯한다는 우리나라 속담은 유럽에서는 절대 아니었다. 어디에서도 쾌적한 화장실을 마음대로 쓸 수 있고, 휴게소나 식당에서 배 터지게 물을 마실 수 있고, 무료 와이파이가 시설마다 널려있는 우리나라는 정말 좋은 나라였다. 요런 면에서만...

 

  하노버에서 3시간가량 고속도를 달려 베를린에 입성했다. 베를린 시가

 

  베를린 시가 외곽의 어느 철도역사. 역사 주변에 자전거가 즐비하다.

 

  카이저 빌헬름 성당. 전쟁 때 폭격을 맞아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서있다. 전쟁의 상흔으로 참상을 상기시키는 일종의 텍스트인 셈이다.

 

  성당 앞에 펼쳐진 크리스마스 마켓. 추운 날씨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풍물시장에 몰려들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해도 볼 수 없고 비만 내리는 쓸쓸하고 어두운 이 계절에 크리스마스는 우리나라 명절처럼 분위기를 돋우는 그런 존재로 생각되었다. 크리스마스가 없다면 어둡고 기나긴 회색 겨울을 어찌할 것인가. 아마도 햇살을 봐야 정신이 나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기나긴 이 회색 겨울 때문에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다.

 

  성당 안, 화려한 황금 문양 

 

  작은 돔 천장

 

  폭격 맞기 전 성당의 사진

 

  성당을 뒤로 두고 전승탑을 보러 떠났다.  

 

  빅토리아상을 받든 67m 높이의 전승 기념탑. 버스 차창으로 한 바퀴 돌아 스치며 지나갔다. 프로이센이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과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1864년에서 1873년에 걸쳐 지은 것이다. 독일 중심가에 있는 그로쎄 티어가르텐(Große Tiergarten) 공원에 있다. 본래 독일 제국의회 의사당 앞 광장에 세워져 있던 것을 1939년에 나치스에 의해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탑의 꼭대기에 있는 승리의 여신상은 8.3m 높이에 무게는 35톤에 달한다. 탑은 전체적으로 붉은색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탑은 네 부분의 사암 블록으로 되어 있는데 세 부분은 각각 세 개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네 번째 부분은 1938년에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함락한 기념으로 금으로 장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별다른 피해를 받지 않고 보존됐다고 한다.

 

  부란덴 부르크 문 뒤, 베를린 장벽 뒤 동베를린에 있는 부란덴 부르크 문을 향해 절규하는 듯한 조각상. 

 

  브란덴 부루크 문 뒤편에 있는 소비에트 전쟁 기념관, 베를린에 진주한 소련군이 세운 동상과 기념관이란다. 동상의 앞과 좌우에 전쟁 당시 소련제 야포와 탱크가 전시되어 있다. 소련제 탱크는 6.25 전쟁 때 북한군 남침 탱크와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

 

  부란덴 부르크 문 뒤에 있는 안내 게시물. 게시물의 세 번째, 사진이 베를린 장벽으로 분단된 당시의 모습으로, 문 뒤로 장벽이 둘러쳐 있다. 

 

  장벽 뒤에 있었을 부란덴 부르크 문. 문 뒤 광장에선 많은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하고 있었다. 베를린 장벽 바로 뒤에 있었던 이 문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프로필라이아를 본떠서 1791년에 완공한 베를린의 개선문이다. 이 문 위에는 4마리 말이 이끄는 2륜 마차 동상 '승리의 콰드리가'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 전체가 심하게 파괴되어 1957~58년 다시 지었고 동상도 원형대로 다시 주조했다고 한다. 

 

  동 베를린 지역에 있었던 부란덴 부르크 문. 이젠 부란덴 부르크 문 주변엔 장벽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통일 후 장벽은 없어지고 많은 건물들이 들어섰다. 벌써 25년의 세월이 흘러 지나갔다.

 

  지나는 길가에서 본 학생들의 체험활동

 

  벌써 어둠이 내렸다. 대낮에도 흐려서 어두운데, 네시 반이면 어두워졌다. 다섯 시면 이미 깜깜한 밤이었다. 베를린 장벽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스트 사이드 거리. 남아있는 장벽에 사람들이 벽그림을 그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라 부른다. 장벽의 높이는 4m 정도, 두께도 두껍지 않다. 장벽은 두 줄로 세워졌는데, 남아있는 것은 동쪽 장벽이다. 좌측에 빨간 K K 글씨가 쓰인 각목 같은 말뚝이 서베를린 장벽의 흔적이다.

 

  동 베를린 장벽에 그려진 벽화와 낙서

 

  장벽을 끼고 흐르는 서베를린 쪽의 슈프레 강

 

암스테르담으로부터 하노버, 하노버에서 하룻밤 숙박하고 베를린으로 달려온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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