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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프라하

 어둠 속 버스는 베를린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서 블타바 강을 따라 네 시간여를 달려 밤 9시 30분에 체코의 프라하에 도착했다. 강변에 버스를 주차하고 다리를 건너 구시가 광장으로 이동했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 강언덕 위 프라하성이 황금색 조명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구시가 광장으로 이동했는데, 광장에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려 많은 인파들로 북적거렸다. 춥고 밤늦은 시간임에도 사람들은 노점에서 자잘한 먹거리를 사 먹기도 하고, 와인을 뜨겁게 데운 핫와인을 마시며 겨울밤을 맞고 있었다. 밤이 깊고 날씨가 쌀쌀했으나, 조명에 빛나는 황금색 야경과 이국정취에 취해서 힘든 줄도 모르고 가이드를 따라다녔다. 특히 광장에 열린 휘황찬란한 크리스마스 마켓은 처음 보는 광경이어서 호기심 있게 바라보았다. 체코는 유럽연합국가지만, 유로화 대신 자국의 화폐를 사용한다. 체코에는 우리나라 현대자동차가 현재 진출해있고 인근 슬로바키아엔 가아차 공장이 있어서 한국 자동차의 유럽 진출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 제 2 차 세계대전 후 1948년의 이른바 2월 사건, 1968년 1월의 ‘프라하의 봄’으로 부르는 자유화 운동이 바르샤바 조약군을 앞세운 소련군(軍)의 탱크 진압으로 무산되어 소련의 위성국가로 남았었다. 그 뒤, 소련이 붕괴되자 1993년 1월 1일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면서 프라하는 체코의 수도가 되었다.

 

한 때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이기도 했으며, 체코 최대의 경제·정치·문화의 중심도시이다. 시내 한 가운데 너비 100~300m의 블타바 강이 흐르고 있다.  BC 4000년경부터 사람이 거주하였으며 5~6세기에 슬라브 사람들이 들어와 9세기 말엽부터 성을 쌓기 시작했다. 12세기에는 중부 유럽 최대의 도시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14세기에 이르러 카를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14~15세기에는 후스전쟁의 싸움터가 되었다. 15~16세기에는 고딕 건축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7세기에는 바로크 건축이 번성하였고 18세기 말부터 다시 수공업 등이 일어나 경제적으로 회복되어 인구도 8만을 헤아렸다. 그 후에도 인구는 늘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帝國) 최대의 공업도시로 성장하였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한 이래 수도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체코는 기계공업이 발달했는데, 특히 정밀 군수산업 분야에 높은 수준을 보여, 2차대전 당시 이를 탐낸 히틀러가 체코 침공을 감행했다고 전해진다.  프라하에는 11~18세기에 건축된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이 남아 있다. 시가지의 건축물들은 중세의 건축·문화를 대표하는 것들이다.  성안의 성 비투스 대성당(St Vitus Cathedral), 블타바 강을 건너는 까를 다리(Charles Bridge) 등은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건축물로 대부분 14세기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4세 때 건설된 것들이다.

 

 

  블타바 강변의 야경

 

 구시가지 광장으로 오는 길

 

 구 시가지 광장의 틴 성당과 그 앞 크리스마스 마켓

 

  크리스마스 마켓

 

  우리나라 조선시대 장영실이 만들었다는 자격루처럼 인형이 움직이며 소리를 내는 천문 시계탑

 

  천문 시계탑과 틴 성당

 

 구시가지 거리를 걸으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들

 

  까를 4세가 건설했다는 까를 교(橋) 탑과 카를 4세의 동상이 있는 광장

 

 까를교 탑문과 카를 4세 동상

 

  까를 4세 동상

 

  까를교 입구에서 바라본 블타바 강 건너편 프라하 성

 

 다음날 아침 일찍 강 언덕 위에 있는 프라하 성을 찾았다. 해자에 둘러싸인 프라하 성, 해자 위의 다리를 건너 성 뒷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두 개의 첨탑이 솟아있는 건물은 성 비투스 대성당이다.

 

 성안의 대통령 집무실과 분수대

 

  대통령 집무실 정문, 보초병의 근무는 그저 형식적인 듯, 관광객들이 자유롭게 출입하고 있었다.

 

 정문 위 조각, 정문 위 창살 무늬는 마리이아 테레지아의 MTJ라는 이니셜을 새겨 넣었다. 마리아 테레지아(1717. 5. 13 ~ 1780. 11. 29)는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였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뵈멘, 만토바, 밀라노, 갈리치아와 로도 메리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파르마 등의 통치자였다. 결혼을 하면서 로렌 공작부인이 되었으며, 후에 토스카나 대공비, 신성로마 황후의 지위를 얻었다.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1713년 국사조칙에 의해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녀로 공표되었으며, 카를 6세는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그의 사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이 되었으며, 영토들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카를 6세 사후 프로이센과 바이에른, 프랑스, 작센에서는 그녀의 계승의 반발하였고, 그 결과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이 발발하게 되지만, 프로이센에 슐레지엔을 내주는 대신 각 국으로부터 그녀의 승인을 인정받는다. 그녀는 후에 슐레지엔을 찾으려고, 7년 전쟁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녀는 로트링겐의 프란츠 슈테판과 혼인하였는데, 16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녀의 자녀들 중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요제프 2세와 레오폴트 2세를 비롯하여서,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나폴리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 파르마의 공비 마리아 아말리아 등이 있다.

 

  정문 보초병 교대식, 행진하는 모습이 러시아풍이었다.

 

 보초병 교대식, 이것도 볼거리라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몰려든 관광객들의 대부분은 일본인들이었다.

 

 집무실 앞 광장, 

 

 광장의 화가

 

 광장 끝에서 내려다보는 프라하 시가

 

 대통령 집무실 뒤편에 있는 사암으로 조각한 두 개의 첨탑이 있는 성 비투스 성당, 사암은 재질이 물러서 조각하기 쉬우나 풍화작용에 손상되기 쉽다. 까맣게 변한 것도 풍화작용 때문이라고 한다. 캄보디아의 까만색의 앙코르왓 사원 역시 사암으로 건축된 것이다. 우리나라 단단한 화강암과 비교되지 않는 물렁한 돌로 조각이 훨씬 수월하다.

 

 성 비투스 성당의 정면

 

  성당 정문 위의 그림

 

  구시가지에서 캐리어를 끌며 관광하는 여행자들

 

  왼편 화약탑과 오른쪽의 시민회관, 화약탑은 러시아와 전쟁 때 화약을 보관했던 곳에서 유래한다. 검게 그을린 것처럼 보이는 것은 역시 사암으로 쌓았기 때문이다. 시민회관에서는 각종 음악연주회가 열린다.

 

  프라하의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던 바츨라프 광장, 뒤의 돔 건물은 자연사 박물관이다.

 

 구시가지의 어지러운 트램 선로

 

  국립극장 

 

  블타바 강과 프라하 성

 

  합스부르크 왕가를 상징하는 크레너 분수대(Kranner's Fountain), 블타바 강변 카를교 부근에 있다. 

 

 블타바강을 건너는 까를 교

 

  까를교 입구의 탑문 

 

  다리 난간 위의 조각상 

 

  손을 대고 기원하면 소원을 성취한다는 조각상, 사람들의 손이 닿은 부분이 닳고 닳아 윤이 나고 있다. 

 

  다리 위의 초상화가 

 

  까를교와 프라하 성

 

  다리입구의 까를 4세 동상

 

  구시가지 광장의 천문시계 

 

  정오가 되자 해골입상이 줄을 당기면서, 창문이 열리고 12제자의 상들이 지나가며, 황금색 닭이 시간을 알리는 소리를 냈다. 많은 사람들이 시계탑 아래 모여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 

 

 시계를 바라보는 사람들 

 

 시계탑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방물을 파는 상인

 

  시계탑 부근의 행위예술가

 

  광장 크리스 마켓을 즐기는 사람들

 

  광장 가운데에 설치한 전망대

 

  거리의 조각상

 

 다리를 건너는 트램

 

 블타바 강을 건너며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강변 풍경들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하노버와 베를린, 프라하까지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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