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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브라티슬라바

  빗속이지만 아쉬운 마음으로 부다페스트를 떠났다. 생전에 다시 돌아볼 기약은 없는데, 이렇게 아름답고 유서 깊은 도시를 불과 몇 시간 훑어보고 떠나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그야말로 점만 콕콕 찍고 다니는 장거리 여행에 회의감이 들었다. 경제적이고 편하긴 하지만, 떠나고 보면 그저 미련감만 잔뜩 떨구고 오기 때문에 여행의 감동이 반감되고 만다. 게다가 행여 친절하지 않은 가이드를 만나게 되면 여행이 즐겁지 않고 불쾌하고 지루해지기도 한다. 연일 계속되는 장거리 버스 이동에 종아리와 발등이 부어오른다. 시차에 적응되지 않은 상태임에도 숙소에 도착하면 그냥 쓰러져 코를 골며 잠드는 것은 그만큼 피곤하다는 것일 게다. 새벽녘에 깨어 뒤척이다 버스 안에서 잠들기도 하지만, 점차 익숙한 여행자의 모습이 되어 가기도 한다. 그렇지만, 여행도 한 때로 젊고 체력이 받쳐줄 때 가능한 일이겠다. 코끝이 간질거리는 가 싶더니 빨갛게 트러블이 생기기 시작한다. 여행 중에 덧나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낭패일 텐데, 보통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부다페스트에서 세 시간을 이동하여 어둠 속에 슬로바키아 수도 부라티 슬라바에서 내렸다. 겨우 오후 네시 30분이 지났음에도 사방은 벌써 어둡다. 남는 게 사진밖에 없는 여행에서 어둠 속 사진 촬영은 그야말로 곤욕스럽다. 감도를 높이다 보면 노이즈가 많아 사진이 거칠어진다. 밝은 렌즈라고 갖고 다니는 표준 줌 24 70 f 2.8로 최저 셔터 속도 1/30을 만들기 어렵다. 작은 3인치 LCD창에야 선명한 듯 보이지만, 크게 확대해 보면 흔들려있기 일쑤이다. 휴대폰으로 야경을 펑펑 찍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생각도 든다. 요즘 최신 폰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광고하던데, 사실이라면 하나 장만해봐야 하겠다고 생각도 해본다. 목에 디스크 생길 정도로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도 좋은 사진들을 건지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 미러리스가 탐나도 밝은 렌즈가 없어서 망설이는데, 핸드폰 성능이 뛰어나다면 미러리스도 필요 없는 일이겠다. 다행히 조리개를 활짝 열고  ISO 6400이 넘어 셔터 속도가 1/30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도 거칠긴 하지만 그런대로 쓸만한 사진(순전히 내 기준)들을 건져낼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다. 야경 촬영을 위해서 다음부터는 가볍고 간단한 삼각대를 하나 준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비엔나로 가는 길에 들린 슬로바키아의 브라 티슬 로바는 생소한 이름이다. 어려서부터 체코슬로바키아로 들어왔던 터라 체코에서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었다는 사실이 낯설다. 우리가 보기에 비슷한 용모의 유럽인들의 족보는 따지고 보면 엄청나게 복잡하게 얽혀 있어 감히 그 내막을 이해하기 어렵다. 과거 유고슬라비아가 인종문제로 코소보 내전을 겪으면서 소위 '인종청소'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학살이 자행된 것을 보면, 이민족 간의 갈등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은 분명한 일이다. 

 

  슬로바키아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패망과 소련의 해방에 따른 공산당 지배 하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공화국이 되었다. 1990년 3월 국명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 공화국'으로 바꾼 후, 1993년 1월 1일 체코와의 분리를 묻는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공식 출범하여 오늘에 이른다. 정식 명칭은 슬로바키아공화국(The Slovak Republic)이다. 북쪽으로 폴란드, 서쪽으로 체코·오스트리아, 남쪽으로 헝가리, 동쪽으로는 우크라이나와 이웃해 있다. 1993년 1월 19일 체코와 함께 UN에 가입하여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고, 2004년 5월 염원해오던 NATO와 EU 가입에 성공하였다. 슬로바키아에 사는 50만 명(전체 인구의 10%)의 헝가리인(人)에 대한 차별 문제로 헝가리와 갈등을 빚고 있다. 

 

  브라티슬라바는 슬로바키아의 애잔한 역사를 지닌 도시이다. 슬로바키아는 오랜 기간 헝가리 통치를 받아, 브라티슬라바는 200년 넘도록 헝가리의 수도이기도 했다. 체코와 병합돼 체코슬로바키아를 세운 뒤에도 경제 발전은 대부분 체코 중심으로 이뤄졌고 전통 농업 국가였던 슬로바키아는 늘 뒷전이었기 했다. 1989년 벨벳혁명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분리되어 독립함으로써 슬로바키아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고 나름대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벨벳혁명(Velvet Revolution)은 1989년 체코(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정권 붕괴를 불러온 시민혁명으로, 피를 흘리지 않은 무혈혁명이었다. 1948년 공산정권이 들어선 체코슬로바키아는 1968년 당 제1서기인 A. 두브체크의 주도로 자유화 운동인 일명 '프라하의 봄'을 시도하였으나 소련 중심의 바르샤바조약군의 진압으로 좌절되었다. 1977년에 다시 일어난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은 정부의 인권탄압에 항의하고 헬싱키 조약 준수를 촉구하는 '77 헌장'을 공표하였다. 이어 구소련이 붕괴되자 1989년에 바츨라프 하벨의 주도 아래 공산통치 종식과 자유화를 요구하는 '벨벳혁명'을 일으켰고 최초의 자유선거로 하벨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를 '벨벳혁명'이라 부르는 까닭은 부드러운 천인 벨벳처럼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적 시위로 정권 교체를 이뤄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구시가지 입구. 페스트로 죽은이들을 위로하는 조형물. 유럽의 도시 곳곳에 이런 위령탑들이 있단다.

 

  마틴 대성당. 성당의 규모는 길이 69.37m, 높이 16.02m, 너비 22.85m로 1452년에 완공되었다. 성당의 탑은 높이 85m이며 상층부는 2㎡의 금으로 도금된 받침대가 있고, 300kg의 무게가 나가는 1m 높이의 헝가리 황실 왕관 복사본이 있다. 이 성당에서 1563-1830년 사이에 11명의 헝가리 왕이 즉위했다. 베토벤의 장엄미사(Missa Solemnis)가 처음으로 연주되었다는 곳이다.

 

  미카엘스 탑으로 가는 구시가지 골목길, 이곳에서도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미로 같은 구시가의 상징적인 존재인 미카엘스 탑.

 

  미카엘스 탑은 시가를 지키는 성문이다. 탑 위에서는 적들의 동태를 감시하며, 유사시 탑문 앞 해자 위의 다리를 들어 올려 시가를 방어한다.

 

  미가엘스 탑의 바깥문과 해자 다리, 문 앞에는 다리가 놓였는데, 다리 아래는 해자로 적군이 침입할 때 이 다리를 들어 올려 마을을 방어한다.

 

 미로 같은 골목길

 

브라티슬라바에서 가장 오래된 성 프란시스코 교회, 역시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려 빗속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흥청거리고 있었다. 천막 안에서 비를 피하며 먹거리를 즐기는 시민들 

 

  익살스러운 길바닥의 조형물, 이른바 하수구 아저씨란다.

 

  빗속의 슬로바키아 기념물의 상징인 브라티슬라바 성. 성은 슬로바키아의 동전에도 새겨져 있고 각종 기념품 단골로 사용한다. 로마의 변경(邊境)이었던 이 성은 1800년대 헝가리 지배 때 파괴됐다가 재건축되었다고 한다. 한 때는 대통령의 거처였고 국회의사당 건물로 이용되기도 했다.

 

 신시가지로 가는 다리의 UFO를 닮은 교각 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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