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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비엔나

  브라티슬라바에서 비엔나까지는 가까운 거리로 대략 1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비엔나 중국식당에서 흰밥과 제육볶음, 김치찌개로 저녁식사를 했는데, 제법 입맛에 맞았다. 중국사람들이 많은 탓도 있겠지만, 세계 곳곳 구석구석까지 중국식당이 없는 곳이 없다. 일행들의 일부는 비엔나 음악회 관람을 위해 중간에 내리고 우리는 호텔에 들어와 곧바로 취침했다. 일찍 잠자리에 들지만 새벽에 깨는 패턴은 여전했다. 피로감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본격적인 비엔나 투어를 하는 다음날에도 연일 비가 내렸다. 우산을 쓰고 투어길에 나섰는데, 음악의 도시 비엔나임에도 화려한 도시 이미지와는 달리, 비 내리는 겨울 날씨라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여서 그리 흥이 나지 않았다.

 

  비엔나의 밤거리

 

  첫코스로 방문했던 쉔브룬 궁전.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궁이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했다. 정원이 아름답다는데, 비에 젖어 축축한 잔디밖에 볼 수 없었다. 

 

  궁전의 정면, 궁전 앞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준비되었으나, 이른 아침이라 열리지 않았다. 궁전의 좌우에 분수가 설치되어 있다. 쉔브룬은 '아름다운 분수'라는 뜻이란다.

 

 궁전의 분수

 

  궁전앞 크리스마스 마켓.

 

 후원으로 가는 궁전의 측면,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황비인 씨씨를 위해 만든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한데, 겨울철이라 푸른 잔디밖에 볼거리가 없었다. 신통하게도 유럽의 잔디는 겨울철에도 푸른빛이었다. 유럽의 들판은 비가 많이 내리는 우기라서인지 초록빛 때문에 우울함이 덜한 듯했다. 무채색만의 우리나라 겨울보다 풍경이 예뻤다. 

 

궁전 뒤뜰의 조각상들

 

  궁전의 후면, 옥상 난간에 사실적인 조각들을 세웠다. 대부분 유럽의 옛건물들엔 정교한 조각들을 짜 맞추어 아름답고 장엄했다.  

 

  궁전의 후원, 여름철이라면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했을 텐데, 아쉬움이 컸다. 

 

  후원 분수대로 이동하며 정원 중간쯤에서 바라본 궁전

 

  후원 분수대

 

  분수대 근처에서 바라본 궁전 후면

 

  궁전 앞 길가에 세워져 있는 궁전의 안주인이었던 씨씨(Sisi)의 초상. 본명은 캐롤린 엘리자베스(1837.12.24-1898.9.10). 174cm의 키에 허리가 19인치로 키 크고 늘씬하며 아름다운 오스트리아 합스 브르크 왕가의 황비이다.

 

  1837년 막시밀리안 공작과 바이에른 왕의 딸인 마리아 루도비카의 딸로 독일 뮌헨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시골 보냈기 때문에 엄격하기보다 자유분방하게 자랐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재위 1830-1916년)가 온천 휴양차 씨씨가 사는 시골에 왔다가 파티장에서 우연히 열다섯 살의 씨씨를 보고, 한눈에 반해 바로 그날 씨씨에게 청혼을 하고, 다음날 약혼을 했다고 한다.

 

   본디 황제는 씨씨의 언니인 엘레나와 정혼이 되어 있었으나, 그 동생과 약혼함으로써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되었다.  2년 후, 씨씨가 17세 때 황제와 결혼하여 황후가 되었다. 하지만 엄격한 왕궁 생활이 맞지 않아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고, 시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불화가 잦았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결혼생활 초부터 외로움과 병에 시달려, 과격한 운동과 승마에 몰두하였다. 네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자녀들을 시어머니에게 빼앗기고, 왕궁을 떠나 시골에 내려와 전원생활을 하였다. 1857년엔 딸 소피가 죽고, 1889년엔 아들 루돌프가 자살하는 등 불행이 겹쳐서 일어나고, 남편 요제프 황제마저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면서 씨씨는 비엔나를 영원히 떠나 이탈리아와 그리스 등으로 긴 여행을 하게 되었다.

 

  이후 씨씨는 검은 옷만 입고 다녔으며, 말년에는 지나친 다이어트와 운동으로 영양실조와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녀는 서른이 넘으면서부터 초상화를 단 한 점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1898년, 62세의 씨씨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몽트뢰로 가는 증기선을 타려다가 24세된 무정부주의자 청년의 칼에 찔려 숨지고 말았다. 현재 씨씨의 무덤은 비엔나 카푸친 성당에 있다.  비운 속에서 암살로 삶을 마감했으나, 씨씨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그녀의 흔적은 합스부르크가가 지배한 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수없이 많은 건축물이 씨씨로 이름 지어지고, 그녀의 일생을 다룬 영화와 뮤지컬들도 무대에서 재현되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국내에서도 씨씨의 일대기를 다룬 옥주현의 뮤지컬 엘리자벳이 공연되었다.

 

 

 합스부르크가의 절대 권력가였던 마리아 테레지아, 16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10명이었다. 프랑스 황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그녀의 딸이었다.

 

 

  비엔나 거리

 

  명품관들이 늘어서 있는 게른트너 거리

 

  비엔나의 상징이자 오스트리아 최고의 고딕 성당인 슈테판 성당, 이 성당에서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치러졌다고 한다.

 

  성당의 내부, 어둡고 침침해서 성당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동유럽 성당들의 내부는 모두 그들의 겨울 날씨처럼 어둡고 음산했다.

 

  성당의 한 측면. 바닥에 앉아 학습하는 어린이들, 이런 모습들이 미술관에서도 눈에 띄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년 7월 14일 - 1918년 2월 6일) 그림이 걸려 있는 벨베데레 궁전. 구스타프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키스'는 단 한 번도 해외로 나간 적이 없다고 한다. 

 

  궁전의 전경

 

  궁전의 측면으로 돌아 뒷문으로 입장한다.

 

  궁전 2층에서 창밖으로 내려다 본 전경, 앞의 박스 상점은 역시 크리스마스 마켓이다.

 

  2층 전시실에 걸려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황금으로 그려진  '키스(The Kiss). 이 작품은 클림트가 실제 금박과 금색 물감을 자주 사용하였던 1907-1908년의 이른바 ‘황금 시기(golden period)’의 대표작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시기 작품들의 중요한 특징은 황금이 지닌 함축성과 부와 물질 가치를 극대화하여 클림트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 태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클림트의 낙관적 태도는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사라져, 전쟁 후엔 황금색을 쓰지 않고 검고 어두운 세계를 지향하게 된다.

 

 같은 전시실에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Judith).  클림트 이전의 예술가들은 구약성서의 이야기인 유디트가 적장인 홀로페르네스(Holofernes)의 목을 베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에 비해 클림트의 그림은 살인 행위에 대한 어떠한 직접적인 언급도 담고 있지 않아 오히려 유디트의 초상화에 가깝다. 그는 홀로페르네스에 대한 유디트의 혐오감이나 살해 행위에 대한 고통보다는 승리감과 도취되어 황홀경에 빠져 있는 여인으로 유디트를 표현하였다. 가슴과 배꼽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은 채로 유혹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유디트는 성적 절정감에 빠져있는 몽롱한 모습으로 상상된다.

 

  전시실 2층 뒷면의 창밖, 유리창에 김이 서려 뿌옇긴 하지만 정원에 그려진 문양이 화려하다.

 

  왕궁의 뒷면

 

  왕궁 앞의 크리스마스 마켓

 

 차창을 스쳐 지나가는 오페라 하우스

 

  역시 스쳐지나는 국회의사당, 일정에 쫓겨 내려가 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도 창밖으로 흘려보냈다. 무얼 보러 이곳까지 그 먼 거리를 달려왔다가, 또 어디로 그리 바삐 가는 걸까. 점찍고 다니는 여행에 대한 안타까움이 차창의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비엔나 시외의 어느 농촌 마을

 

  차창을 스치는 오스트리아 농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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